웨인 티보 전, 케이크 한 조각에 숨은 기하학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31 웨인 티보 전 〈The Order of Things〉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의 31번째 주인공 미국 현대미술 거장 웨인 티보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이 9월 19일부터 2027년 2월 21일까지 DDP 뮤지엄 전시1관에서 열린다.


“삼각형을 그리다가 결국 파이가 되었다.”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웨인 티보(Wayne Thiebaud, 1920–2021)가 자신의 작업을 두고 한 말이다. 그의 그림 속에는 누구나 한 번쯤 마주한 평범한 사물이 가지런히 놓인다. 케이크와 파이, 아이스크림과 사탕, 신발과 식료품. 기하학적 형태를 탐구하던 화가가 어쩌다 케이크와 파이를 반복해서 그리게 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 그림들이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사람들의 시선을 붙잡을까. 그 답을 알 수 있는 전시가 지금 동대문디자인플라자(이하 DDP)에서 열리고 있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의 31번째 주인공 웨인 티보의 국내 첫 대규모 회고전 〈The Order of Things〉가 9월 19일부터 2027년 2월 21일까지 DDP 뮤지엄 전시1관에서 열린다. 전시는 초기작부터 2020년 마지막 자화상까지, 회화와 드로잉 105점을 통해 약 75년에 걸친 그의 작품 세계를 조망한다. 25년간 티보와 협업해 온 큐레이터 디터 부르크하르트(Dieter Buchhart)와 안나 카리나 호프바우어(Anna Karina Hofbauer)가 전시 기획을 맡았다.

전시 제목 ‘The Order of Things(사물의 질서)’는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의 동명 저서에서 착안했다. 푸코가 말한 질서는 사람들이 세상을 이해하도록 만드는 보이지 않는 규칙을 뜻한다. 티보 역시 평범한 사물의 표면 아래 놓인 기하학적 구조를 캔버스 위에서 끊임없이 재구성했다. 진열대 위 케이크, 줄지어 놓인 신발과 식료품은 무작위로 놓인 것이 아니라 원과 삼각형, 일정한 간격과 대칭적 배열에 따라 화면을 구성한다.
평범한 사물에서 발견한 질서

웨인 티보는 소비문화의 대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팝아트와 함께 언급되기도 하지만, 그의 작업은 전통적인 회화 기법과 물리적인 제작 과정에 대한 탐구를 바탕으로 전개됐다. 1940~50년대 초기 회화에서는 추상표현주의의 영향 속에 밀도 높은 질감과 흙빛 계열의 색채를 실험했다. ‘자화상’(1947), ‘시가 진열대’(1955) 등에서는 빌럼 데 쿠닝과 같은 스승들의 영향을 확인할 수 있다. 이후 상업 디자인과 만화, 무대 디자인, 미술 교육 등 여러 분야를 경험한 그는 1960년대 초부터 일상적 사물을 본격적으로 화면에 담기 시작했다.

그가 그린 음식은 실제보다 더 실제처럼 보인다. 케이크 위에 올라간 프로스팅은 두껍게 쌓인 물감 덕분에 생크림처럼 보이고, 파이와 디저트에서는 표면의 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티보는 이를 ‘액추얼리즘(actualism)’이라 불렀다. 물감 자체가 묘사하고자 하는 대상처럼 물질적인 존재감을 갖도록 하는 방식이다. 작품에 따라 물감이 8밀리미터 높이까지 쌓인 경우도 있다. 두꺼운 물감은 대상의 존재감을 더욱 실감 나게 만드는 동시에 티보 회화의 중요한 조형 요소가 된다.

티보는 균일하게 반복되는 질감 사이에 불쑥 변주를 심어 놓기도 했다. 비슷한 사물을 나란히 놓더라도 장식이나 그림자, 간격에 조금씩 차이를 두고, 대칭적인 구도 안에도 미세한 변화를 넣었다. 그에게 질서는 완벽한 반복을 의미하지 않았다. 큐레이터가 ‘질서 속의 차이와 변주’라고 설명한 지점이다.
나란히 앉은 사람들의 고독

1960년대 중반부터 그리기 시작한 인물화에서도 정물화와 같은 형식적 질서를 적용했다. 밝고 단순한 배경 앞에 인물을 배치하고 이야기의 배경이나 구체적인 감정 표현은 지웠다. ‘앉아 있는 다섯 인물’(1965)에서 인물들은 나란히 앉아 있지만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함께 있지만 각자의 세계에 머무는 모습에서 티보가 말한 ‘외로운 함께 있음’이 드러난다.
큐레이터는 이를 티보가 바라본 인간의 근원적인 질문과 연결했다. 곁에 있으면서도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수많은 존재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혼자인 상태. 다만 그 고독은 암울하지 않다. 서로의 세계가 맞닿지 않더라도 각자의 세계 안에서 온전하고 충만하게 존재하는 모습이다.

인물화에서는 색과 그림자를 다루는 감각도 돋보인다. ‘초록 드레스’(1966)에서는 가슴 아래에 그어진 보라색 선이 눈가의 그림자로 반복되며 화면의 구조를 만든다. 아내이자 뮤즈였던 베티 진을 그린 ‘베티 진 티보와 책’(1965–1969)에서도 주황색 선이 코끝과 눈가에서 되풀이된다. 라벤더와 오렌지, 파란색 등으로 표현한 그림자 역시 단순히 대상을 설명하는 요소가 아니라 독립적인 형태로 기능한다.
풍경의 기하학, 삶에 대한 관조

전시 후반부에서는 샌프란시스코의 도시 풍경과 캘리포니아의 자연을 만난다. 가파른 언덕과 도로, 건물은 강렬한 색과 그림자 속에서 기하학적 구조로 재구성된다. 티보는 전통적인 수평 구도에서 벗어나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거나 극단적인 원근법을 활용하며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는 방식을 발전시켰다. 정물에서 인물, 도시와 자연으로 소재가 확장되어도 대상을 질서 있게 배열하고 그 안에 차이와 변주를 만드는 방식은 계속된다.


전시의 마지막을 장식하는 작품은 2020년에 완성된 ‘백 살 광대’다. 1930년대 캘리포니아 롱비치에서 서커스를 보러 다녔던 어린 시절의 기억에서 출발한 광대 연작 가운데 하나로, 세상을 떠나기 1년 전에 그린 마지막 자화상으로 여겨진다. 흰색 화장과 의상을 한 나이 든 광대의 모습을 통해 자신의 삶과 예술을 돌아본 작품이다. 티보에게 광대는 사람들을 즐겁게 하기 위해 힘든 기술을 끊임없이 연마하는 동시에 유머와 연약함을 함께 지닌 존재였다.

티보의 그림 앞에서는 익숙한 사물의 이름을 잠시 내려놓게 된다. 케이크는 케이크인 동시에 원과 곡선, 색과 질감으로 이루어진 하나의 구조가 되고, 파이는 삼각형의 형태로 다시 보인다. 반세기 전 캘리포니아에서 시작된 일상의 질서는 오늘 서울의 관람객에게도 낯익고 깊은 여운을 남긴다. 전시는 2027년 2월 21일까지 DDP에서 이어진다.
현대카드 컬처프로젝트 31 웨인 티보 전 〈The Order of Things〉
기간 2026년 9월 19일 – 2027년 2월 21일
장소 동대문디자인플라자 뮤지엄 전시1관
운영 시간 매일 10:00 – 20:00
주최 현대카드, 지엔씨미디어
협력 웨인 티보 파운데이션, 크로커 미술관, 샌프란시스코 현대미술관, 셸던 미술관, 내셔널 아카데미 오브 디자인을 비롯한 주요 기관 및 개인 소장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