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은주·김형재

의심과 고민이 만든 디자이너의 세계

15년 차 그래픽 디자인 듀오. 이들은 대학교 동문이자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하고, 부부이기도 하다.

홍은주·김형재

김춘수의 시 ‘꽃’은 명명 자체가 현상학적 존재론과 직결됨을 은유한다. 그런데 만약 부르는 이름이 제각각이라면? 존재는 획일화되고 고정된 정의를 벗어나 열린 해석에 도달하지 않을까? 어느덧 15년째 디자인 신에서 활동 중이지만 여전히 다양한 이름(홍은주·김형재, 김형재·홍은주, 홍킴…)으로 불리는 이 디자인 듀오를 보며 든 다소 엉뚱한 생각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디자인은 이들을 닮았다. 섣부른 확신보다 고심 가득한 질문을 던지는 태도는 지극히 디자이너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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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그래픽 디자이너 듀오. 활동 장르를 하나로 특정하기 어려워 디자인 사무소 이름을 정하지 못했다. 국민대학교 시각디자인학과와 동 대학원 석사 과정을 마친 두 사람은 아티스트 진 〈가짜잡지〉를 기획·발행해 디자인 신에서 두각을 드러냈다. 스튜디오를 열고 초기엔 주로 문화·예술, 건축 분야의 출판·인쇄, 온라인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이후로 점차 클라이언트와 프로젝트의 범주를 넓혀갔다. 최근에는 마곡리빙디자인페어의 키 비주얼을 디자인했다. 현재 홍은주는 국민대학교, 서울시립대학교에서 스크린 기반의 타이포그래피를 가르치고, 김형재는 동양대학교 디자인학부 조교수를 맡고 있다. hongxkim.com

독립적인 대등한 존재의 연합체

15년째 활동하면서도 스튜디오명을 짓지 않고 두 사람 이름을 사용하는 점이 흥미로워요.

홍은주(이하 홍) 상대를 흡수하거나 한 사람이 우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동등한 선상에서 함께 작업한다는 것을 의미해요. 현실적으로 두 사람이 하나가 되는 일은 불가능하죠. 한 사람만의 의견으로 작업이 진행되지도 않습니다. 의견과 아이디어가 경합하고, 교차하고, 보태거나 더해지는 과정에서 작업이 구체화되고 실행력을 갖춥니다. 서로가 독립적인 대등한 존재이고 굉장히 다르므로 두 사람이 함께하는 것에 의미가 생기는 것 같아요.
김형재(이하 김) 대학교 선후배로 만난 사이이다 보니 처음에는 홍은주 실장이 존칭을 썼는데 어느 순간 말을 놓겠다고 선언하더군요.(웃음) 그래야 대등한 관계가 성립할 수 있다고요.

〈가짜잡지〉를 통해 두 사람을 처음 알게 됐어요. 당시 디자인 신은 물론 문화·예술계에서도 반향이 있었죠.

우리에게도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어요. 스튜디오에서 함께 활동하게 된 계기가 됐으니까.
처음엔 독립해서 스튜디오를 낼 생각이 아예 없었어요. 그런데 간텍스트에서 활동하던 김형재 실장이 당시 큰 사고를 당하면서 상황이 달라졌죠. 오랫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고 이에 따라 김형재 실장은 물론 저도 일반적인 직장 생활이 어려워졌습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머리를 다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몸이 근질근질했나 봐요.(웃음) 극단적인 잉여 상황에서 〈가짜잡지〉를 구상하게 된 것이죠.
2000년대 중반 그래픽 디자인 신의 상황도 영향을 미쳤어요. 슬기와 민과 그들이 속한 DT 동인의 활동, 권혁수 선생, AGI 소사이어티의 김영철 대표, 간텍스트 조주연 대표 등이 보여준 사회·문화적 디자인 선동이 활발하던 시기였죠. 마이클 록Michael Rock의 저서를 읽으며 디자이너의 저자성에 대해 감화되기도 했고요.
디자이너들이 저술, 기획, 전시, 출판 등의 프로젝트에서 주체가 되어 자율적으로 역할의 한계를 확장해가는 모습에 영향을 받았던 거예요. 어차피 일을 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같은 신세였던 디자이너, 미술가, 연구자 등을 동료로 모았습니다. 유사 출판물이라는 형식을 매개로 이전까지 장르로 규정된 바 없는 창작 활동을 실험했죠. 여기에는 느슨한 원칙이 있었는데 시각물 생산, 저술 등의 형식이 기존에 발표된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생산된 결과의 질이 누구도 시비를 걸 수 없을 정도로 탄탄하고 정교해야 한다는 룰도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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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7회 별마당도서관 열린아트공모전의 디스플레이 프로모션 머티리얼. 미디어보드 등에서 상영됐다. 클라이언트 스타필드 사진 장보라
국내에서 독립 잡지 신이 막 형성되던 시기였잖아요. 지금은 기성 출판과 독립 출판의 경계가 모호해졌죠. 최근 이 신에 관한 생각이 문득 궁금하네요.

최근에 발표한 논문 ‘소규모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의 역할과 생존 모델의 성립: 2010~2015년을 중심으로’에서 해당 주제와 관련해 기술한 부분이 있습니다. 독립 출판 신이 막 활발해지기 시작한 때는 외환 위기 등으로 취업 시장이 재편되던 시기, 실제 출판 시장이 급격히 축소된 시기 등과 맞물려 있죠. 문학의 주요 소비층으로 대변되는 20~30대가 탈권위적이고 비주류적인 콘텐츠, 자유분방한 표현과 생산 양식 그리고 직접적인 일대일 소통 방식을 기치로 내건 독립 출판에 매료된 결과였어요. 2010년대 초·중반에는 ‘언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취향 공동체 기반의 플랫폼도 확고히 자리 잡았습니다. 이들이 보여준 새로운 콘텐츠 생산, 소비 형식과 유통 방식이 디자인계의 작은 움직임이던 독립 출판을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창작, 유통의 순환이 이루어지는 플랫폼 형태로 탈바꿈시켰습니다. 기성 산업으로서 출판은 내리막길을 걷고 있었지만, 책을 중심으로 한 문화 상품, 아트 상품, 굿즈로서의 역할은 독자적인 길을 모색하고 있었어요. 건국대학교 오창섭 교수는 이를 두고 “기호로서의 사물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자아 정체성을 확인하고 이를 공유하는 과정을 통해 연대감을 느끼는 세대의 등장”이라고 분석하기도 했습니다. 디자인 전문 출판으로 시작한 워크룸프레스가 문학 출판 시장에 뛰어든 게 2014년이었어요. 매체와 경제 상황의 변화를 바탕으로 새롭게 등장한 생산과 소비 주체들을 일종의 공동체로 파악했고 새로운 독자군(혹은 굿즈 소비층)에 맞춰 콘텐츠를 물질화하고 유통했죠. 이 실험이 성공하면서 워크룸프레스는 2010년대 말부터 ‘강소 출판사’로 높은 평가를 받기에 이릅니다. 디자이너가 콘텐츠를 매개하는 역할을 넘어 스스로 콘텐츠를 기획하고 소비 공동체를 상상해 실제로 소비로 이어지게 만드는 모델을 만든 것이죠. 그리고 일련의 모델들이 햇빛서점, 코우너스, 과자전이 등장한 배경이 됐다고 생각해요. 자신의 세계관을 만들고 자신들을 지지하는 공동체를 형성해 영향력을 갖췄다는 점에서 말이죠.

비주류로 인식되던 주제들이 어느 순간 메인스트림에 영향을 미치고, 더 나아가 전복하는 결과까지 낳았군요.

처음 이들이 등장했을 땐 자기만족을 위한 디자이너들이 만들어낸 일시적 과잉 현상이란 말도 있었어요. 〈그래픽 디자인, 2005~2015, 서울〉전이 그런 식의 비판을 받았죠. 그런데 지금은 이들의 활동이 스튜디오의 표준이 되었어요. 문화·예술 관련 프로젝트는 물론 기성 출판과 큰 예산이 집행되는 상업 프로젝트까지 섭렵하고 있고요. 앞서 말한 스튜디오의 활동들이 확산·확장·복제 가능한 역할 모델로 작동했기 때문에 그 이후 세대가 다음 단계로 넘어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전방위 스튜디오의 활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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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현대 서울 오프닝 그래픽. 클라이언트 더현대 서울 사진 Pluto Shin ©현대백화점
스튜디오 활동 이야기로 돌아가죠. 개인적으로 김형재 실장이 유닛으로 활동했던 옵티컬레이스도 흥미롭게 지켜봤어요.

사실 처음 활동을 시작할 당시 그래픽 디자이너보다 다른 역할로 먼저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어요.
실제로 디자이너가 아닌 독립 잡지 기획자라고 알고 있는 사람이 훨씬 많았습니다.(웃음)
독립 잡지 활동과 더불어 힘을 쏟은 것이 조사 연구 기반의 기획 프로젝트였습니다. 사실 인터뷰 서두에 언급한 사고 직전 간텍스트에서 처음 독립적으로 맡았던 프로젝트 역시 리서치 작업에 가까웠어요. ‘dna_R 도시문화리서치, 안양’이라는 출판 기획 및 디자인 프로젝트였는데 2006년 월간 〈디자인〉이 주관한 코리아디자인어워드 그래픽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죠. 당시 조직이 문화리서치팀과 그래픽디자인팀이 뒤섞인 상태였는데 신입인 제가 얼떨결에 리서치를 맡게 되었어요. 그때 함께 참여한 박해천 선생(현 동양대학교 교수), 슬기와 민의 최성민 선생과 처음 연이 닿았는데, 특히 박해천 선생의 추천으로 브루스 마우, 렘 콜하스, 스튜디오 바우와우 등 건축 분야의 도시 리서치 관련 도서를 다수 접하게 되었어요. 그 영향이 이후 ‘티팟’이 주관한 디자인리서치학교 활동이나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세 도시 이야기〉전, 국립현대미술관의 〈아키토피아의 실험〉전 그리고 옵티컬레이스의 활동으로 이어졌죠. SoA의 강예린, 이치훈 소장과도 그때 많은 활동을 함께 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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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사사무소 SoA의 아이덴티티 리뉴얼과 웹사이트 디자인 프로젝트. 클라이언트 SoA 웹사이트 societyofarchitecture.com
하지만 요즘에는 옵티컬레이스로서의 활동은 뜸한 것 같네요.

당시 옵티컬레이스가 천착한 주제가 1980년대생을 중심으로 한 세대에 관련된 것이었는데 이제 그 담론의 주체가 다음 세대로 넘어갔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데이터 시각화 기술 등의 발달도 영향이 있습니다. 손쉽게 통찰을 제시할 수 있는 첨단 기술이 등장하면서 그래프 등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수요가 예전보다 줄어든 것이죠.
하지만 스튜디오 활동 전반에서 리서치는 여전히 중요해요.
리서치를 아예 콘텐츠의 한 축으로 프로젝트에 포함해 의뢰하는 경우가 상당히 많거든요. 디자인 외에 방대한 아카이브의 내용을 기획·편집하는 역할까지 맡을 때도 있고요. 편집자, 연구자, 디자이너의 역할을 구분하지 않고 맡기는 것이죠. 우리도 스스로 이것이 상당한 강점이라고 생각합니다. 본격적인 작업에 착수하기에 앞서 사전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라면 적극적으로 방안을 역제안하기도 합니다. 전통적인 의미의 분업에 익숙한 파트너라면 이런 태도가 약간 껄끄러울 수도 있겠네요.
최근에는 현대자동차의 울산 공장 아카이브 도서 작업을 맡아 1년 가까이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내용을 많이 줄였는데도 여전히 약 1000쪽에 달해요. 처리해야 할 콘텐츠의 양이 많으면 많을수록 즐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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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자인 아카이브 총서 2 〈세기 전환기, 한국 디자인의 모색 :1998~2007〉에 수록한 인포그래픽 포스터 ‘한국의 디자인 1998~2007’. 발행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상대적으로 덜 알려졌지만, 사실 홍은주·김형재 스튜디오는 상당히 일찍부터 웹 프로젝트를 수행한 그래픽 디자인 사무소입니다.

실제로 대부분 우리가 개발(이라고 하기에는 미미한 수준이지만)을 겸한다는 사실을 잘 모르더군요. 처음에는 전시 홍보나 간단한 아카이브 프로젝트를 위한 도구를 주로 개발했습니다. 전시나 문화·예술 프로젝트 홍보 이미지를 의뢰받은 경우 전시 정보나 개요를 담은 간단한 웹사이트를 함께 제안했어요. 스마트폰이 자리 잡고, 소셜 미디어를 효과적인 홍보 및 소통의 매체로 인식하기 시작하던 시기였죠. 초기에는 아주 적은 추가 비용으로 홍보 그래픽 이미지에 웹사이트까지 제공했기 때문에 수익이 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시대와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했어요. 일련의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적인 웹사이트 프로젝트도 의뢰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텍스트 기반, 스크립트 기반의 웹 언어와 반응형 디자인 등이 우리가 주로 담당하는 문화·예술 분야에 잘 어울리는 방식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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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회 광주비엔날레 파빌리온의 웹사이트. 클라이언트 재단법인 광주비엔날레


간단한 구조의 웹사이트를 주로 만들었지만, 때때로 데이터베이스가 연동되는, CMS를 포함한 웹사이트 디자인과 개발 의뢰도 들어왔죠. 문화·예술 프로젝트는 규모가 크지 않다 보니 전문적으로 활동하는 소규모 개발자 그룹이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설치형 블로그, CMS 서비스를 연동하는 방법을 독학하기 시작했어요. 덕분에 아주 크지 않은 규모라면 클라이언트가 직접 콘텐츠를 관리할 수 있는 웹사이트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죠. 물론 서울시립미술관처럼 아주 방대하고 복잡한 구조의 웹사이트는 개발사와 협업하는 방식으로 맡았지만, 그동안의 경험을 통해 개발사와 소통하거나 개발 결과를 평가, 개선하는 과정에서 더 유리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가지 인상 깊었던 포트폴리오는 슈퍼 그래픽입니다. 디자이너가 공간 장악력이 약하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던 터라 더욱 기억에 남을 수밖에 없었어요.

옵티컬레이스의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다른 팀에 비해 벽면 혹은 구조물에 그래픽을 입히는 경험치가 쌓여 있었어요. 최소 몇십 미터 단위의 평면이나 공간이 주어지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전시장에서 콘텐츠를 식별하려면 그래픽의 크기가 일단 그래픽 디자이너가 주로 사용하는 지면이나 화면 크기보다 수십 배에서 수백 배는 커야 합니다. 당시 단순한 디지털 인쇄 시트보다 색면 시트를 커팅해 부착하는 쪽을 고집했습니다. 디지털 인쇄 시트를 부착하는 방식을 택하면 물질성이 사라지고, 그러다 보면 압도적으로 보이지 않으니까요. 별색 다도 인쇄처럼 다중 레이어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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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립미술관 등의 미술관과 협업한 프로젝트도 경험을 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어요. 소규모 스튜디오가 대규모 미술관과 작업하기 시작한 초기였는데, 이전까지만 해도 전시 아이덴티티 등을 전시장 외의 벽면에 사용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죠. 그런데 신은진 큐레이터 등 미술관 관계자들이 우리에게 아예 전시장 벽을 통째로 활용할 기회를 주었습니다. 내용도 마음대로 하게 해주었죠. 그렇게 탄생한 것이 2015년 코리아디자인어워드 그래픽 디자인 부문을 수상한 〈아프리카 나우: Political Patterns〉전이었습니다. 5m가 넘는 회랑에 디아스포라와 관련한 도표를 설치하고 네온사인으로 만든 타이포그래피를 전시 아이덴티티로 활용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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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나우: Political Patterns〉 전시 그래픽. 아프리카 출신의 이민 2~3세 작가들의 현대미술 작품 전시였다. 기획 단계에서 두 사람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사는 아프리칸 디아스포라diaspora에 관한 인구 통계학적 지표들을 전시 내용에 추가할 것을 역제안했다. 이 디자인은 2015년 코리아디자인어워드 그래픽 부문을 수상했다. 클라이언트 서울시립미술관
그래도 가장 임팩트가 컸던 것은 역시 더현대 서울의 오프닝 그래픽이 아닐까 싶네요.

앞으로 평생 진행할 슈퍼 그래픽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규모가 아닐까요?(웃음)
고생스러웠지만 정말 즐겁게 수행한 프로젝트였습니다. 그동안 경험한 공간 그래픽 경험이 극대화된 케이스였죠. 잘하는 것을 마음껏 하게 해주니까 신이 났죠.(웃음) 보통 백화점은 외부보다 내부가 화려하기 마련인데 막상 현장 답사를 가보니 외관에서 느껴지는 아우라가 엄청났어요.

우리의 목표가 리처드 로저스의 디자인을 이기는 것이었어요.(웃음)
실제로 극도로 추상화된 그래픽과 컬러로 압도하는 것이 의도이자 목표였습니다. 사실 이것이 가능할 수 있었던 데에는 더현대 서울 담당자였던 한경희 디자이너의 역할이 지대했습니다. 프로젝트를 진행할 당시에는 몰랐는데 나중에 듣고 보니 우려도 컸고 설득과 조율의 과정도 지난했다고 하더군요.

더현대 서울의 경우 외에도 클라이언트의 외연이 확장된 느낌입니다. 사실 오랫동안 홍은주·김형재 스튜디오라고 하면 ‘언더그라운드’라는 편견이 있었거든요

우리에 앞서 소규모 스튜디오로서 기업과 협업한 선례를 보여준 디자이너들의 영향이 컸다고 봅니다. 스튜디오 fnt나 CFC 같은 곳이 소위 업체가 아닌 파트너로서 기업과 긴밀히 협력하고 캠페인을 성공시킨 선례가 있었기에 우리에게도 기회가 온 것이죠. 팬데믹의 영향도 있었습니다. 2010년대까지 스튜디오 활동은 주로 커뮤니티를 형성하고 사람들을 모아 일을 벌이는 데에 집중되었죠. 출판, 전시, 강연 같은 외부 활동도 많았지만, 사실 바운더리가 넓진 않았습니다. 미술 등 문화·예술 분야에 종사하는 창작자나, 많아 봐야 수천 명 단위였던 소비자 그룹이 상대하는 거의 전부였죠. 그런데 팬데믹 기간이 이어지면서 인스타그램 활동을 늘리게 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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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현대 서울 오픈 1주년 기념 그래픽. 클라이언트 더현대 서울

사실 2010년대까지도 우리는 인스타그램에 큰 관심이 없었습니다. 반짝 유행일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런데 코로나19 때문에 공공 공간이 폐쇄되면서 인스타그램이 필수적인 소통 매체가 되어버렸어요. 인스타그램 활동을 늘리자, 이전에 교류하던 무리 밖의 사람들이 우리를 인지하기 시작했습니다. 활동 기간은 꽤 되지만 인스타그램상의 인지도는 신인과 다름없다 보니(웃음) 우리 작업을 신선하게 느낀 것 같아요.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의 활동 영역이 넓어진 배경에는 중재자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해요. 앞서 언급한 한경희 디자이너도 그렇지만, 스튜디오를 운영하던 박이랑 선생 같은 분들이 큰 조직으로 영입되면서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의 생리를 이해하고 중재하는 사례가 늘어난 것이죠. 소규모 디자인 스튜디오는 사내 조직과 조직이 만나 결과물을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른 프로세스를 거칩니다. 개개인의 역량이 무척 중요하죠. 그만큼 우리를 100% 잘 써먹었으면 좋겠어요.(웃음)

클라이언트는 다변화됐지만 변치 않는 것도 있죠. 벌써 15년째 을지로 한곳에 터를 잡고 활동하는데요, 그동안 달라진 지역의 풍경을 보면서 느끼는 바가 있나요?

저는 중학교 때부터 을지로를 좋아했어요. 명동, 충무로를 도보로 10~20분이면 갈 수 있다는 점도 좋았고요. 스튜디오를 오픈할 때 을지로 외의 지역은 별로 생각해보지 않았죠.
지금도 저는 동대문에서 시청까지 이어지는 지하도를 좋아해요. 산업 현장의 복판에 있는 셈이잖아요. 사실 그때는 을지로가 지금 같은 모습은 아니었어요. 오후 5~6시면 모두가 퇴근하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음산하기까지 했죠.(웃음)
많은 사람들처럼 우리도 처음에는 그런 을지로가 변하는 것에 반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 약간은 운명처럼 받아들인 부분도 있습니다. 타이포잔치 2015 당시 프로그램의 하나로 을지로를 투어하면서 인근 건물의 등기를 다 떼어본 적이 있어요. 원래 일제강점기에 북에서 내려온 분들이 소유하던 건물을 토지 개발 회사들이 매입하고 곳곳에서 막 개발에 착수하기 시작한 때였습니다. 그때부터 이미 지역의 변화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죠. 게다가 팬데믹을 겪으면서 생각이 바뀐 부분도 있어요. 어쨌든 도시가 활기를 띠는 건 중요하더군요.
당시 텅 빈 명동 거리를 보고 슬펐던 기억이 있어요.
그래서 요즘에는 달라지는 모습까지도 사랑하려고 해요. 물론 젠트리피케이션 문제는 해결되어야 하겠지만.

의심이 만든 디자이너의 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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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DP를 둘러싼 모험 2009~2023’ 포스터. 지난해 10주년을 맞이한 DDP 특별전에서 선보인 작품이다. 클라이언트 서울디자인재단
아티스트로도 꾸준히 활동 중입니다. 디자이너와 예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분리하는 편인가요?

우리는 어디까지나 시각 디자이너라는 인식이 강했습니다. 이 직능의 범위를 넓게 확장하는 교육을 받은 세대도 아니죠. 활동 양상은 다양했지만, 디자인 분야에서 활동하기 위해 기본적으로 해야 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가까웠어요. 문제 해결 능력이나 통합적 사고력 등을 활용하는 것은 디자이너의 직능 안에 포괄할 수 있는 것이라고 본 것이죠. 전시 작업을 의뢰받거나 전시에 실제로 참여할 때도 마찬가지 태도를 유지했습니다. 다만 우리 작품을 디자인으로 해석할지는 감상하는 이들에게 달려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우리의 작업이 전시장에 놓인 맥락과 닿거나 벗어나 전형적인 시각 디자인에 대한 이해나 인식을 벗어나는 측면이 있다면 시각 디자인 자체가 그렇기 때문일 수도 있고, 우리가 그런 존재이기 때문일 수도 있는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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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도차’. 2021년 플랫폼엘에서 열린 〈UNPARASITE〉전에서 선보인 설치 작품이다. “한 이불 덮고 산다”라는 관용구에 착안해 가족 공동체와 독립된 주체로서 개인 사이의 관계를 탐구했다.
‘의도된 모호함’인가요?

그보단 반신반의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이것이 창작자로서 우리의 일관된 주제 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겠네요. 그런 맥락에서 우리 두 사람의 첫 단독전인 〈제자리에〉가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2021년 시청각랩에서 연 이 전시는 스튜디오 오픈 10주년을 자축하는 자리이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지난 작업을 그대로 모아 전시하는 방식을 택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전시장 가운데에 김동희 작가가 제작한 긴 테이블을 놓고, 그 위에 갖가지 사물을 놓았습니다. 지난 10년 동안의 작업을 떠올리면서 관련된 사물을 하나하나 인터넷 쇼핑몰에서 주문한 것이죠. 그렇게 총 92개의 물건을 배치했고 테이블을 둘러싼 사면의 벽에는 이 물건들을 처음 주문한 날과 시간, 배송이 완료된 날과 시간, 그리고 배송사 정보 등을 시계열로 배치했습니다. 전시를 어떻게 구성할지 결정한 날로부터 물건들이 모두 배송된 마지막 날까지의 시간을 벽에 기록한 것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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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전. 2021년 시청각랩에서 열린 이 전시는 뜻밖에도(?) 두 사람이 함께 진행한 첫 단독 전시였다. 사진 김경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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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자리에〉전경. 사진 김상태

이는 전시를 마치 하나의 프로젝트로 생각하고 마감 시한과 싸우는 저희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물건들은 각각 작업에 내재한 구조를 표상하거나 저희가 발상하는 과정을 복기하는 것에 가깝습니다. 즉 전시장 안에 그 전시를 위해 수행한 10년에 걸친 우리의 작업에 대한 기억, 그리고 전시를 위해 구체적으로 수행한 행동들의 기록과 결과가 전부 담겨 있었어요. 그 물건들은 모두 공장에서 대량생산한 것들이에요. 어디까지나 아주 평범하고 일상적인 물건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4면의 벽에 적당히 배치된 액자에는 작업 몇 개를 선별해 제작한 미니어처 인쇄물을 시간 순서대로 늘어놨어요. 마지막에는 10년간 작업한 거의 모든 작업을, 마찬가지로 아주 작은 섬네일 이미지로 축소해 액자에 담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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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를 위한 시간과 행동을 작은 전시 공간에 압축했고, 벽면을 따라 다시 10년이라는 시간을 순환하듯이 배치한 것입니다. 그렇지만 전시는 결국 10년을 박제해 기록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실체를 가진 그 무엇으로 다시 환원하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었어요.
결과로서의 전시 형상은 그래픽 디자인이라고 불러야 할지 알쏭달쏭한 측면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래픽 디자인 전시라고 불렀습니다. 전시한 사물은 제가 그동안 열었던 개인전과 출판물, 그룹전 등에 참여하며 선보인 현실과 가상 세계를 매개하는 사물들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벽면의 타이포그래피는 김형재 실장이 옵티컬레이스 활동을 하면서 사용한 방법론과 관계가 깊고요. 결국 완전히 다른 두 사람이 융합하는 것이 아닌, 병치하고 공존하거나 서로 다른 역할로 서로를 떠받치는 구조였죠.

두 사람 모두 디자인 교육자로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최근 교육 현장에서 감지한 디자인의 변화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올해로 강의를 시작한 지 17년째입니다. 처음 출강한 것은 계원예술대학이었는데 당시에는 리서치 위주의 수업 방식을 주로 택했습니다. 입시 미술을 경험하지 않았고, 출신 학교가 당시만 해도 그래픽이나 타이포그래피에 강하지 않았기 때문에 솔직히 조형 교육은 자신이 없었어요. 스튜디오도 현장에서 닥치는 대로 상황과 조건에 대응하며 우리만의 조형을 찾고자 버둥대던 때였고요. 학교에 전임으로 부임한 후에는 조금 달라지긴 했습니다. 기본기를 갖추지 못하면 심화 학습에 적응할 수 없으므로 추상화, 관찰과 연구, 유형화, 컬러 시스템 등 기초적인 조형 교육에 집중하는 편입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학생들에게 좋은 디자인의 정의를 섣불리 제시하지 않게 되었어요. 워낙 시대가 빠르게 바뀌고 트렌드도 변하기 때문이죠.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조형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역량입니다. 그래야 졸업 후에도 변화하는 환경에 대응할 능력이 갖춰진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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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송은미술대상의 디스플레이 영상. 클라이언트 송은 사진 장보라

저는 주로 웹을 비롯한 디스플레이 화면상의 그래픽 디자인, 타이포그래피 수업을 맡아왔습니다. 저는 HTML이나 CSS처럼 웹의 시각성을 구축하는 마크업 언어를 반드시 교육하는 편입니다. 마크업 언어는 완전한 프로그래밍 언어는 아니에요. 어떻게 보면 편집 디자인에서 문서의 레이아웃과 타이포그래피를 결정하듯이 웹 문서의 서식을 텍스트화하거나 그 반대로 적용하는 쪽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타이포그래피 교육과 상당히 밀접한 관련이 있죠. 초급 타이포그래피 과정에서 텍스트를 시각화하는 리터러시, 즉 문법을 학습하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처럼, 웹 기반의 디스플레이 매체에서의 텍스트-시각화 리터러시를 학습하는 기회를 마크업 언어를 통해 배우게 됩니다. 그런데 현재 HTML이나 CSS가 복잡하고 정교한 기능을 포함하고 다루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기 때문에 마크업 언어가 점차 시각화된 화면으로 환원되지 않기 시작했어요. 화면과 말의 거리가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죠. 여기에 AI 툴을 활용해 직접 코딩하기보다 자연어로 프롬프트를 통해 화면 레이아웃에 접근하는 경향까지 강해지고 있어요. 저는 여기에 장단점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받아들여야 할 부분은 받아들여야 하지만, 자신이 디자인하는 과정의 많은 부분을 외부에 의존하다 보면 놓치게 되는 부분도 생기기 마련이죠.

지금처럼 다변화된 시대에 디자이너란 어떤 존재여야 할까요?

자신의 세계가 분명한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추구하는 것이 특정한 조형 언어일 수도 있고, 장르적 형식 실험일 수도 있고, 세상을 향한 어떤 구체적 메시지나 문제의식일 수도 있고, 인간으로서의 태도와 관련된 것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프로젝트라도 자신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한 과정으로써 연속성을 가지고 접근한다면 그 면면이 구체적으로 다르다고 할지언정 통합적으로 보았을 때는 그 디자이너의 세계관의 일부로 보일 것 같아요. 우리는 오랫동안 온전히 추구하는 바가 구체적으로 존재하는지 스스로 계속해서 의심해왔습니다. 그런데 지나고 보니 의심의 과정에서 내재한 조형적 사고가 조금씩 구체화되기 시작하더군요. 동시대 디자이너의 역할을 고민하는 과정이 세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되었던 것이죠. 그런 고민에 대한 욕구 자체가 없었다면 이 직업을 계속해오지 않았을 것 같고, 계속할 이유도 없었을 것 같습니다. 더 잘 먹고살 방법은 얼마든지 있으니까요. 우리가 왜 이런 디자인을 하는지, 이게 어떤 의미와 가치가 있는지 끊임없이 의심하고 대화를 통해 고민을 이어나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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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합이론〉전. 2021년 DDP에서 슬기와 민, 신신과 함께했다. 사진 박수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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