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모던보이, 유영국 전시를 읽는 세 가지 키워드
탄생 110주년 회고전,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한국 추상미술의 거장 유영국의 예술 세계를 집대성한 역대 최대 규모 회고전을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라는 타이틀로 5월 19일부터 10월 25일까지 서소문본관에서 열리고 있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이자 거장으로 추앙받는 화가 유영국(1916~2002)의 예술 세계를 집대성한 역대 최대 규모의 회고전이 열리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은 5월 19일부터 오는 10월 25일까지 서소문본관 1층에서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서울시립미술관이 새롭게 기획한 ‘한국 근대 거장’ 시리즈의 첫 번째 프로젝트다. 앞서 데이비드 호크니, 에드워드 호퍼 등을 소개한 ‘해외 걸작전’ 시리즈와 균형을 이루는 또 하나의 시리즈 전시 트랙이다. 세계적인 거장의 시각을 선보여온 흐름에 더해, 한국 근대 미술의 독자적인 뿌리를 깊이 있게 조명하는 또 하나의 축을 세운 셈이다. 특히 이번 전시는 작가 탄생 110주년을 맞이해 15점의 미공개작을 포함하여 유화 115점, 드로잉 12점, 부조 4점, 사진 8점, 아카이브 자료 등 총 178점의 작품과 자료를 선보인다. 유행이 빠르게 소비되고 트렌드가 범람하는 지금, 우리가 다시 만난 작가 유영국의 세계를 세 가지 키워드로 따라가본다.
시대의 풍파를 견뎌낸 성실한 고독
우리가 지금 작가 유영국에게 다시 매료되는 첫 번째 이유는 시대의 풍파에도 흔들림 없던 주체성에 있다. 1916년 경상북도 울진에서 태어난 유영국은 한국 근현대사의 깊은 격동을 온몸으로 관통했다. 그는 일제 강점기, 한국전쟁, 민주화와 경제 성장기를 거치면서도 추상미술이라는 당대의 전위 예술을 삶과 작품으로 올곧이 실천했다.

예술가로서의 출발점은 일본 도쿄 유학 시절이다. 1935년 도쿄 문화학원 유화과에 입학한 그는 학교의 자유주의적 분위기 속에서 입체파, 미래파, 초현실주의, 러시아 구성주의 등 서구 아방가르드 사조를 흡수했다. 이 시기 무라이 마사나리, 하세가와 사부로 등 일본의 추상 작가들은 물론 김환기, 장욱진, 이중섭 등과 교류하며 전위적인 추상미술에 관한 관심을 키웠다. 1938년에는 <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에서 협회상을 수상하며 본격적인 추상의 길로 진입했다.
1943년, 한국으로 귀국한 그를 맞이한 것은 해방과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였다. 격동의 시기, 유영국은 가장으로서 생계를 책임져야 했다. 그는 고향 울진에서 어선을 타고 양조장을 직접 운영하며 가족을 부양했다. 이로 인해 약 10년(1943~1955년)의 작업 공백기를 가졌고, 스스로 이 시기를 ‘잃어버린 10년’이라 채찍질하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의 경험은 그를 삶과 일상을 아는 단단한 화가로 만드는 토대가 되었다. 1955년부터 유영국은 다시 본격적인 작업에 매진한다. 모던아트협회, 신상회 등 전위적인 미술 단체를 주도하며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자리매김했다.


결정적 생애의 변곡점은 48세가 되던 1964년에 찾아온다. 신문회관에서 생애 첫 개인전을 개최한 유영국은 이 시기를 기점으로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작가 동인전 중심의 그룹 활동을 일절 중단하고, 오직 개인전으로만 작품을 선보이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김환기, 한묵, 문신 등 동료 예술가들이 파리와 뉴욕으로 떠날 때, 그는 한국에 남아 스스로 철저한 고독을 선택했다.
이후 그는 집 안의 작업실로 매일 아침 9시에 출근해 저녁 6시에 퇴근하는 규칙적인 일상을 고수했다. 그의 작품은 나이 59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단 1점 판매될 만큼 지독한 외면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유행과 타협하지 않고 묵묵히 고독의 길을 걸었다. 이는 평생 약 800점에 이르는 유화 작업을 남기는 원동력이 되었다. 삶의 의무와 예술적 신념을 성실하게 견뎌냈다. 이처럼 독자적인 길을 개척한 주체적 삶은 묵직한 감동을 선사한다.
응축된 자연을 만나다
두 번째 키워드는 초기 아방가르드 실험부터 만년에 이르는 ‘작품 세계의 치열한 진화’다. 이번 전시는 전통적인 연대기 순을 탈피했다. 작가의 예술적 결단이 이루어진 1964년을 기점으로 삼아 시간을 역행했다가 다시 순행하는 독창적인 시간 여행의 리듬을 제안한다.



1930년대 도쿄 유학 시절과 1940년대 초기의 유영국은 회화, 부조, 사진 등의 매체를 넘나들며 서구 아방가르드 미술 사조를 실험했다. 이후 1950~70년대에 이르러 그의 추상미술은 절정기를 맞이한다. 선명한 원색과 대담한 기하학적 구성을 통해 점·선·면·색의 조형 요소들이 화면 위에서 대치와 균형을 이루는 독창적인 시각 언어를 구축했다. 그는 빨강, 노랑, 파랑의 삼원색뿐만 아니라 보라, 분홍, 초록의 변주를 과감하게 시도하며 기하학적 추상의 열풍을 이끌었다.

이번 전시의 핵심 하이라이트는 ‘유영국 후기 추상의 새로운 조명 – 자연과 합일을 통한 심상(心象) 추상’ 파트다. “60세까지는 기초 공부를 하겠다”던 작가는 생애 후반기에 이르러 평생 천착해온 ‘산’이라는 모티프가 내면과 하나가 된 심상 추상의 세계에 도달했다. 그에게 산은 외부의 재현 대상을 넘어, 고향 울진의 실제 풍경과 기억의 총체가 선과 색의 균형으로 응축된 내면의 구조였다.


(오른쪽) 산-Blue, 1994, 캔버스에 유채, 260×200cm. ⓒ유영국미술문화재단

특히 1980년 이후 강렬한 긴장감을 넘어 평온과 절제의 미학을 담아낸 후기 작업을 새롭게 조명한다. 유영국은 1977년 심장 박동기 부착 수술을 시작으로 생애 마지막까지 8번의 큰 수술을 치르고 37번의 입퇴원을 반복하는 병고를 겪었다. 그러나 조수도 없이 매일 작업실을 지키며 직접 캔버스를 마주했다. 전시에서 조명하는 그의 만년 절필작과 역대 최대작인 ‘산-Red'(1994), ‘산-Blue'(1994)는 생로병사의 무게를 성실히 견뎌낸 인간이 도달한 고요와 완숙의 경지를 증명한다. 이처럼 추상을 넘어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된 풍경은 오늘날 디지털과 AI 기술이 창작의 개념을 흔드는 시대에 ‘창작이란 무엇인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을 던진다.
디자인을 만난 유영국
우리가 지금 유영국을 호명하는 마지막 키워드는 최초로 공개되는 미공개작의 발굴과 동시대 디자이너들과의 협업을 통한 공감각적 미학의 재탄생이다.

이번 회고전은 작가 탄생 110주년을 맞이해 그간 대중에게 단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15점의 미공개작을 새롭게 발굴해 전면에 내세웠다. 1961년 작 ‘작품(Work)’을 비롯해 1980~90년대 만년에 이르기까지 화업 전반을 가로지르는 미공개 유화 작품들은, 거장이 남긴 추상 세계의 빈 링크를 채우며 전시의 역사적 가치를 더한다. 전시에서는 화업 전반을 가로지르는 동명의 세 작품을 만날 수 있다. 첫째, 1961년 작 ‘작품(Work)’은 두꺼운 마티에르의 독특한 재질감과 붉은 황토색조의 과감한 원색 대비를 통해 격동하는 자연의 에너지를 표현하던 정점의 반(半) 추상 단계를 선명히 보여준다.


둘째, 초록 중심의 1989년 작 ‘작품(Work)’은 부드러운 기하학적 선과 면, 동그라미의 배치를 통해 자연과의 완숙한 조화를 구현한다. 셋째, 푸른 색조 위주의 1992년 작 ‘작품(Work)’은 수평적인 선의 흐름과 바다를 연상시키는 절제된 화면 구성으로 고요하고 깊은 내면의 풍경을 시각화한다.



한편 유영국의 세계를 재해석한 공간 디자인과 전시 아이덴티티 디자인도 눈여겨봐야 한다. 전시 공간 디자인은 태오양 스튜디오가 맡았다. 전형적인 연대기 순을 완전히 탈피했다. 도입부에서 거장의 결단이 일어난 1964년의 시공간으로 관람객을 안내한 뒤, 시간을 역행했다가 다시 순행하도록 전시 동선을 입체적으로 조립했다. 양태오 디자이너는 관객이 마치 인생의 산을 오르고 내리듯 거장의 화업을 따라 걸으며, 작품이 지닌 숭고미와 내밀한 예술 언어에 완전히 몰입할 수 있는 구조를 구현했다.

디자인 스튜디오 일상의실천이 진행한 그래픽 디자인과 전시 아이덴티티 역시 돋보인다. 유영국이 평생에 걸쳐 구축한 점·선·면의 조형 문법과 대담한 삼원색, 보라와 초록 등 독창적인 색채 변주를 현대적인 그래픽 언어로 시각화해 도록과 포스터 등에 적용했다. 질서 정연한 아름다움을 담아낸 그래픽 아이덴티티는 미술관 안팎에서 유영국의 조형적 질서와 시대를 초월한 현대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이번 전시는 1930년대 초창기 아방가르드 실험부터 1990년대 만년의 심상 추상까지의 여정을 통해, 유영국의 예술 세계가 얼마나 단단하고 깊은 조형적 본질을 품고 있는지를 포괄적으로 보여준다. 디지털과 AI 기술이 창작의 개념을 흔드는 오늘날, 그의 회화는 창작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한 명확한 해답보다도 더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시대를 타협하지 않고 캔버스를 마주했던 거장의 산 앞에서 우리는 각자의 삶과 내면의 질서를 다시 바라보게 되며, 그가 남긴 선과 색채는 때마다 다른 깊이의 위로로 다가온다.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전은 단순히 눈으로 보는 전시가 아닌, 거장이 평생을 바쳐 구축한 단단한 생명력을 통해 우리 안의 숨은 산을 다시 발견하게 하는 시간이다.
유영국: 산은 내 안에 있다
주소 서울시립미술관 서소문 본관(서울특별시 중구 덕수궁길 61)
기간 2025년 5월 19일 – 10월 25일
주최 서울시립미술관, 유영국미술문화재단, 조선일보사
주관 서울시립미술관
후원 불가리, 신영증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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