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베를린 디자인 위크 하이라이트
디자인이 현실과 만나는 방식 〈DESIGN REAL〉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베를린 디자인 위크가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베를린 전역에서 열렸다.

올해로 10주년을 맞은 베를린 디자인 위크(Berlin Design Week)가 5월 28일부터 31일까지 베를린 전역에서 열렸다. ‘DESIGN REAL’을 주제로 한 이번 행사는 인테리어와 건축, 그래픽 디자인뿐 아니라 공공디자인과 서비스디자인, 신소재 연구까지 폭넓은 분야를 아우르며 디자인이 현실과 맺는 다양한 관계를 탐색했다.
베를린 디자인 위크의 특징은 프로그램의 규모나 유명 브랜드의 참가 여부가 아니라 서로 다른 분야를 연결하는 방식에 있다. 신제품 발표와 럭셔리 브랜드의 각축전으로 채워지는 다른 디자인 위크와 달리, 이곳에서는 국제 스튜디오와 대학, 기업, 독립 디자이너들이 한자리에 모여 연구와 실무, 사회적 이슈와 제품 디자인이 자연스럽게 교차한다. 완성된 결과물이 아니라 그 과정과 질문 자체를 디자인의 주제로 삼는 것, 그것이 베를린 디자인 위크가 10년간 지켜온 방식이다.
“디자인은 소비하는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함께 살아가는 방식을 만드는 것이다.”
알렉산드라 클라트, 베를린 디자인 위크 CEO
디자인 허브, 디 마허라이

행사의 중심은 크로이츠베르크의 디 마허라이(Die Macherei)였다. 올해 처음 메인 허브로 운영된 이 복합 단지는 KEC Architekten이 설계한 M40과 사우어브루흐 후튼(Sauerbruch Hutton)이 설계한 M60으로 구성되며, 1,000㎡가 넘는 공간에서 전시와 워크숍, 토크, 디자인 마켓이 함께 진행됐다.

메인 허브의 대표 전시였던 <The Tolerance Project>는 미르코 일리치(Mirko Ilić)가 2017년 시작한 국제 순회 포스터 전시다. 보스니아 출신으로 뉴욕타임스 오피니언 페이지 아트 디렉터를 역임한 그는 전 세계 디자이너들에게 단 하나의 조건을 내걸었다. 모국어로 ‘Tolerance’이라는 단어를 포스터에 담을 것. 82개 언어로 제작된 82점의 포스터는 같은 단어를 출발점으로 삼았지만 문화와 언어에 따라 전혀 다른 시각적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줬다.

연구와 교육 현장에서 출발한 프로젝트들도 눈길을 끌었다. 우크라이나와 오스트리아 학생들이 참여한 <Design in Wartime>은 전쟁이라는 현실 속에서 건축과 디자인이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를 탐구했다. 분쟁 지역의 현실을 디자인의 언어로 풀어낸 프로젝트로, 올해 주제인 ‘DESIGN REAL’과 가장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는 전시 중 하나였다.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의 <Wood Is…?>는 목재라는 재료를 새롭게 해석하는 학생 프로젝트를 선보이며 실험과 연구의 과정 자체를 드러냈다.


과테말라는 국가 차원에서 참여해 <Guatemala Crafted by Hand>를 통해 전통 수공예와 현대 디자인의 접점을 소개했다.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통 직물과 건축적 레퍼런스를 결합한 설치 작업은 문화적 유산이 오늘날 어떻게 새로운 디자인 언어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보여줬다. 체코 토마시 바타 대학교와 오스트라바 공과대학교가 공동 개발한 4인승 전기 슈퍼카 ‘타이탄(Titan)’은 베를린 디자인 위크에서 세계 초연을 가졌다. 기업도, 외부 투자도 없이 순전히 대학 연구실 안에서 외관부터 인테리어까지 완성됐다는 것이 이 프로젝트의 특별한 점이다.
도시 전체를 무대로
도시 곳곳에서도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어졌다. 건축 담론과 실험적 전시, 브랜드 쇼룸, 디자인 센터까지 베를린 전체가 하나의 무대가 됐다.

디자인·인테리어·건축 분야의 네트워킹 플랫폼으로 자리 잡은 부다페스트 살롱(Budapester Salon)에서는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디자이너들의 작업을 선보였다. 목재를 얇게 재단해 텍스타일처럼 엮는 작업으로 알려진 엘리사 스트로지크(Elisa Strozyk)는 기하학적 패턴의 표면이 패브릭처럼 유연하게 움직이는 작품들을 통해 소재의 물성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아틀리에 하우스만(Atelier Hausmann)은 1930년대 산업용 작업 가구에서 영감을 받은 철강 튜브와 원목 결합 가구를 선보이며 전통 금속 공예에 대한 현대적 해석을 보여줬다.

옛날 정육점을 개조해 쇼룸과 제작소로 운영하는 유니크 팩토리 베를린(Unique Factory Berlin)에서는 스웨덴 출신 디자이너 모니카 푀르스터(Monica Förster)의 전시 <Form and Adventure>가 열렸다. 자연과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러그를 비롯해 다양한 프로젝트를 한자리에 모은 이번 전시는 재료와 제작 과정을 디자인의 출발점으로 삼는 그의 작업 방식을 보여줬다. 보스니아의 전통 목공 브랜드 자나트(Zanat)과의 협업에서는 유네스코 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전통 목각 기술을 현대 디자인과 연결한 작업들을 선보였다. 스웨덴 가구 브랜드 포지아(Fogia)를 위해 디자인한 테이블 ‘Kern’도 눈길을 끌었다. 이탈리아 북부 채석장의 대리석 잔재로 만든 소재 ‘OUTT’를 활용한 작업으로, 산업 폐기물에서 새로운 형태와 가치를 끌어내는 접근을 보여줬다. 푀르스터는 더 베를린 포맷(The Berlin Format) 컨퍼런스 연사로도 참여했다.

100년 역사의 독일 스틸 에나멜 욕실 브랜드 칼데바이(KALDEWEI)는 e15와의 협업 컬렉션을 통해 욕실을 하나의 생활 공간으로 제안했다. 스테판 디츠(Stefan Diez)가 디자인하고 e15가 제작한 이번 컬렉션은 유러피안 오크 원목 가구와 스틸 에나멜 욕조를 함께 구성하며 소재 간의 대비를 활용했다. 올해 레드닷 디자인 어워드(Red Dot Award) 2026을 수상한 NUIO DUO ZEN Edition(누이오 듀오 젠 에디션) 욕조도 함께 선보이며 브랜드의 소재 기술과 디자인 역량을 보여줬다.


40여 개 브랜드 쇼룸이 입점한 인테리어 디자인 복합 공간 리빙 베를린(LIVING BERLIN)에서는 <Nordic Masterpieces>가 열렸다. 헨드릭 볼레(Hendrik Bohle)와 얀 디모그(Jan Dimog)가 기획한 이번 전시는 덴마크 건축가 아르네 야콥슨(Arne Jacobsen)과 파트너 오토 바이틀링(Otto Weitling)이 독일에 남긴 건축 작업을 6편의 단편 영상으로 재조명했다. 가구 디자이너로만 알려진 야콥슨이 독일 전후 건축에 얼마나 깊이 관여했는지를 보여주는 전시였다.
베를린의 밤, 그리고 투어
5월 28일 저녁 시작된 베를린 디자인 나이트(Berlin Design Night)는 베를린 디자인 위크의 분위기를 가장 잘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크로이츠베르크와 미테, 시티 웨스트 곳곳의 30여 개 쇼룸과 스튜디오가 늦은 시간까지 문을 열었다. 전시와 토크, 네트워킹이 동시에 이어지며 도시 전체가 하나의 무대가 됐다.

올해 처음 운영된 큐레이션 투어(Curated Tour)는 흩어진 프로그램들을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했다. 지역별·주제별로 구성된 투어 중 베를린 아이웨어 브랜드 마이키타(MYKITA)의 스페셜 투어가 특히 인기였다. 디자인·개발·생산이 한 지붕 아래 이뤄지는 크로이츠베르크 본사를 공개하며 브랜드의 작업 방식을 직접 보여줬다.

행사 마지막 날에는 폴란드 가구 브랜드 타일코(Tylko)의 베를린 쇼룸에서 <Kindertag>이 열렸다. 아티스트 이시스-마리아 니데켄(Isis-Maria Niedecken)과 함께하는 인터랙티브 설치와 워크숍으로 구성된 이 행사는 어린이도 디자인 페스티벌에 함께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줬다.
“정부 지원 없이 작은 프로젝트로 출발해 10년 만에 국제 디자인 페스티벌로 성장한 것은 베를린 디자인 커뮤니티가 함께 구축해온 네트워크의 힘을 보여준다.”
알렉산드라 클라트, 베를린 디자인 위크 CEO
이번 베를린 디자인 위크를 관통한 것은 ‘무엇을 만들었는가’보다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관심이었다. 올해는 베를린이 유네스코(UNESCO) 디자인 도시 지정 20주년을 맞는 해이기도 하다. 연구와 교육, 산업과 문화가 교차하는 이 도시는 완성품을 올리는 무대이기 이전에 실험실에 가깝다. 베를린 디자인 위크는 그 실험실 안에서 디자인이 현실과 연결되는 다양한 방식을 보여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