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응적 재사용 ③] 빈자리에 새긴 장인의 시간, 에르메스 가죽공예 학교
월간 〈디자인〉 Vol.577 | Special Feature
에르메스 가죽공예 학교는 덜어내고 비워내며 오히려 공간의 쓰임을 선명히 했다. 낡은 건물에 숨결을 불어넣는 과정이 꼭 극적일 필요는 없다.

1990년대 이후 생산된 버킨백은 모두 팡탕(Pantin)에서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에르메스는 파리 근교의 이 작은 도시를 브랜드의 핵심 거점으로 삼았다. 본사, 작업장, 쇼룸 등 에르메스 소유 건물이 도시 곳곳에 흩어져 있는데 가죽공예 학교도 그중 하나다. 목구조 프레임과 천창이 인상적인 이곳은 20세기 초 인쇄소를 개조한 공간이다. 애초에는 쇼룸으로 활용할 계획이었지만 예상보다 엄격한 소방 안전 규정에 가로막혀 공간을 제대로 써보기도 전에 새로운 쓰임을 고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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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르메스가 APA 아키텍처에 설계를 맡기며 내건 조건은 세 가지였다. 추가 면적을 확보할 것, 향후 용도 변경에 대응할 수 있을 것, 건물 후면부터 전면까지 시야가 막힘없이 이어지도록 할 것. 건축가는 이것을 흰 도화지 같은 공간으로 해석했다. 요소를 더하기보다 덜어내는 데 집중했다. 그럼에도 부족한 공간은 새로 조성했다. 지하층을 새로 파내 창고, 기계실, 회의실을 배치하고 건물 내부에 메자닌을 설치해 공간의 위계를 나눴다. 자연광이 들어오는 상층부에 사무실을 배치하는 대신 아래층은 탁 트인 공간을 비워두어 건물 전체가 한눈에 보이게 했다. 메자닌에는 특수 콘크리트 슬래브를 적용했다. 공간을 덜 차지해 층고를 충분히 확보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훗날 이 건물을 쇼룸으로 전환할 경우 배연 설비를 비교적 쉽게 추가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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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100년을 견딘 목조건물인 만큼 기둥은 보수가 불가피했다. 건축가는 건물의 기본 골조를 유지하되 가운데에 홈을 낸 새 기둥으로 교체해 보이지 않는 개방감을 확보했다. 과거를 지키기 위해 현재의 편리를 포기하지도, 현재의 목적을 위해 과거를 희생하지도 않았다. 에르메스 가죽공예 학교는 덜어내고 비워내며 오히려 공간의 쓰임을 선명히 했다. 낡은 건물에 숨결을 불어넣는 과정이 꼭 극적일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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