헬싱키 디자인 위크가 익숙한 디자인과 도시를 다루는 방식
‘다가오는 타자’를 통해 본 디자인의 쓰임과 역할
'다가오는 타자'를 주제로 한 '2026 헬싱키 디자인 위크'는 결과물 대신 만남에 주목했다. 도심 곳곳의 미팅 포인트를 통해 디자인 유산을 재해석하고 공실 실험을 펼치며, 누구를 위한 디자인인지 성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헬싱키의 디자인을 이야기할 때 역사를 빼놓기는 어렵다. 알바 알토를 비롯한 핀란드 모더니즘 유산이 도시 곳곳에 남아 있고, 이딸라와 마리메꼬 등 핀란드를 대표하는 디자인 브랜드 역시 오랜 시간 역사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 매년 도시 전역에서 열리는 헬싱키 디자인 위크는 이러한 유산을 바탕으로 동시대 디자인의 흐름을 소개해왔다. 지난 8월 28일부터 9월 6일까지 열린 헬싱키 디자인 위크 2026의 주제는 ‘다가오는 타자(The Oncoming Other)’였다. 새로운 결과물을 앞세우기보다 서로 다른 사람과 생각이 만나고 관계를 만들어가는 과정에 주목했다.
헬싱키 디자인 위크의 창립자인 카리 코르크만은 창조 산업이 “폐쇄된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 사이의 연결, 아이디어와 자원, 의미가 순환하는 네트워크 안에서 만들어진다”라고 말한다. 올해 행사 구성도 이러한 생각을 반영했다. 중심에 프로그램을 모으는 대신 도심 곳곳에 ‘미팅 포인트(Meeting Points)’를 마련한 것이 핵심이다. 카이사니에미 식물원과 사우스 하버, 도심의 거리와 새로운 문화 공간을 오가며 각기 다른 프로젝트를 만나는 방식이다. 도시 곳곳으로 흩어진 프로그램 가운데, 올해 헬싱키 디자인 위크의 성격을 선명하게 드러낸 네 장면을 따라가 보자.
마리메꼬가 다시 채운 마티 수로넨의 푸투로 하우스

카이사니에미 식물원(Kaisaniemi Botanic Garden)의 나무와 온실 사이에 UFO를 연상시키는 낯선 구조물이 자리했다. 1968년 핀란드 건축가 마티 수로넨(Matti Suuronen)이 설계한 ‘푸투로 하우스(Futuro House)’다. 둥근 몸체와 타원형 창을 지닌 이 조립식 주택은 본래 이동 가능한 스키 샬레로 고안됐다. 유리섬유 강화 플라스틱을 사용해 가볍게 제작하고 운반과 조립이 가능하도록 설계한 점에서 당시의 실험적인 주거 개념을 엿볼 수 있다.


이번 헬싱키 디자인 위크에서는 푸투로 하우스를 단순히 과거의 디자인으로 소개하는 대신, 마리메꼬와 함께 내부를 새롭게 구성했다. 책과 스테레오, 식품과 생활용품을 채워 생활 공간과 가까운 모습을 연출하고, 여기에 브랜드의 텍스타일과 의류를 더했다. 공간 곳곳에는 덴마크 프린트 디자이너인 비베케 롤란(Vibeke Rohland)이 마리메꼬의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개발한 패턴도 사용됐다.
알토 화병의 90년을 건축과 사진으로 다시 읽기
사우스 하버(South Harbor)에 들어선 ‘알토 90 파빌리온(Aalto 90 Pavilion)’은 익숙한 곡선을 전혀 다른 크기로 보여준다. 시작은 1936년 알바 알토가 디자인한 ‘알토 화병(Aalto Vase)’이다. 탄생 90주년을 맞아 이딸라와 하이드로(Hydro)는 테이블 위에 놓이던 화병의 윤곽을 높이 7미터의 구조물로 확장했다. 라르스 벨러 피에틀란(Lars Beller Fjetland)과 타블로 코펜하겐(TABLEAU CPH)이 디자인에 참여했으며, 하이드로의 저탄소 알루미늄을 사용해 제작했다.


크기가 달라지면서 화병을 경험하는 방식도 달라진다. 손에 들고 바라보던 오브제의 윤곽이 사람이 드나드는 파빌리온의 벽이 되고, 특유의 유기적인 곡선은 내부 공간을 형성한다. 9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하나의 오브제를 건축적 경험으로 전환한 것이다.


파빌리온에서는 사진작가 아르노 라파엘 민키넨(Arno Rafael Minkkinen)의 전시 ‘알토의 정신(The Spirit of Aalto)’이 이어진다. 50여 년간 인간의 신체와 자연의 관계를 사진에 담아온 그는 이번 전시를 위해 자신의 아카이브를 다시 살피고 새로운 작업을 촬영했다. 과거와 현재의 사진을 두 장씩 짝지은 구성으로, 알토의 디자인이 지닌 형태와 감각을 자신만의 시선으로 풀어냈다.
비어가는 도심에서 시작된 새로운 공간 실험
올해 헬싱키 디자인 위크가 다룬 또 하나의 주제는 도심의 변화다. 클루비카투(Kluuvikatu)와 알렉산테린카투(Aleksanterinkatu)가 만나는 모퉁이에 마련된 ‘HDW 랩’에서는 거리와 맞닿은 1층 공간의 새로운 쓰임을 모색했다. 오랫동안 도심의 1층은 상점과 은행, 각종 서비스 시설이 차지해왔다. 전자상거래와 원격근무의 확산, 달라진 소비 습관은 이러한 풍경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기존 상업 시설이 빠져나간 자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는 헬싱키 역시 마주하고 있는 도시 문제다.


HDW 랩은 이를 구체적인 공간의 문제로 가져왔다. 도시 개발 관계자와 전문가들이 참여한 워크숍에서는 상업 공간과 공공 공간의 새로운 활용 방안을 논의하고, 거리에서 실제로 적용할 수 있는 아이디어를 발전시켰다. 여기서 나온 일부 제안은 2027년 헬싱키 디자인 위크를 통해 실제 도시 환경에서 시험될 예정이다.


이러한 논의와 나란히 거리에서는 또 다른 실험이 진행됐다. 셰프 사미 탈베리(Sami Tallberg)가 알렉산테린카투 9에 문을 연 ‘와일드 머시룸 바’다. 핀란드의 가을 수확철에 맞춰 야생 버섯을 중심으로 메뉴를 구성한 팝업 스트리트 키친으로, 디자이너 라우리 요한손(Lauri Johansson)과 그래픽 디자이너 일카 캐르캐이넨(Ilkka Kärkkäinen) 등 여러 분야의 창작자가 함께 참여했다. 주방과 테이블이 거리 가까이 들어서자 평소 이동을 위해 지나치던 공간에 사람들이 앉고 머무는 시간이 마련됐다. HDW 랩에서 논의한 도심 1층의 가능성을 멀지 않은 거리에서 다른 방식으로 경험할 수 있었던 셈이다. 거창한 공간 변화 없이도 프로그램 하나가 더해지는 것만으로 거리의 쓰임과 사람들의 움직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였다.
새로운 뮤지엄을 준비하는 에텔래란타 6
사우스 하버의 에텔래란타 6(Eteläranta 6)는 헬싱키 건축·디자인 박물관이 새롭게 선보인 공간이다. 전시뿐 아니라 행사와 모임을 위한 장소로 운영되며, 앞으로 만들어질 새 박물관을 둘러싼 생각과 의견을 나누는 거점 역할을 한다. 헬싱키 디자인 위크 기간 열린 첫 공개 프로그램에서는 도시 전략가 카트야 린드로스(Katja Lindroos), 미래 연구자 알렉시 네우보넨(Aleksi Neuvonen), 큐레이터 카슨 챈(Carson Chan)이 한자리에 모였다. 이들은 박물관과 공공 공간이 사회적 대화를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지 논의하고, 관객과 함께 10년 뒤 도시와 문화 공간의 모습을 그려봤다.

에텔래란타 6에서 눈에 띄는 것은 새 박물관이 완성되기 전부터 이러한 논의가 시작됐다는 점이다. 완성된 공간과 프로그램을 시민에게 소개하는 데서 출발하는 대신, 박물관이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에 관한 대화를 먼저 열어 뒀다. 아직 정해지지 않은 미래를 여러 사람의 시선으로 함께 들여다본다는 점에서 이곳의 첫 프로그램은 올해의 주제와 맞닿아 있었다. 새로운 박물관을 준비하는 과정 자체를 하나의 공개된 논의로 만든 에텔래란타 6는 이번 디자인 위크가 ‘만남’을 다룬 또 하나의 방식이었다.



올해 헬싱키 디자인 위크는 새로움이나 파격적인 결과물을 앞세우기보다 타자를 정의하고 이해하고자 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다른 세대와 관점, 익숙하지 않은 삶의 방식과 도시의 변화를 디자인 안에서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지 묻고, 그 답을 하나로 정해두지 않았다. 그래서 ‘다가오는 타자’라는 주제는 행사장을 벗어난 뒤에도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빠르게 새로운 것을 생산하는 일보다 서로 다른 생각을 충분히 듣고 이해하는 일이 중요해진 지금, 디자인 역시 무엇을 만들 것인가에 앞서 누구를 위해, 어떤 삶을 상상할 것인지부터 살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