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도 타다오 건축에 스민 숯의 시간, 이배 개인전

뮤지엄 산 〈En attendant: 기다리며〉전

30여 년간 숯이라는 단 하나의 재료를 천착해온 이배의 작업이 안도 타다오의 건축과 만났다. 뮤지엄 산이 개관 이래 첫 한국 작가 개인전을 선보인다.

안도 타다오 건축에 스민 숯의 시간, 이배 개인전

30여 년간 숯이라는 단 하나의 재료를 천착해온 작가 이배. 나무가 불을 지나 숯이 되듯, 생성과 소멸의 순환을 작업 중심에 두었다. 이배의 작업이 안도 타다오의 건축과 만났다. 뮤지엄 산 개관 이래 첫 한국 작가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가 열리고 있다. 안도가 빚어낸 빛과 그림자의 공간에서 회화, 조각, 설치, 영상을 아우르는 39점이 본관 입구부터 야외 ‘무의 공간’까지 미술관 전체를 한 호흡으로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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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배 작가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En attendant은 프랑스어로 ‘기다리는 동안’을 뜻한다. 전시명 〈En attendant: 기다리며〉는 아직 완성되지 않은 상태 속 미래를 향해 열려 있는 시간을 의미한다. 그저 멈춰 있는 시간이 아니다.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기다림이다. 숯이 만들어지는 과정도 마찬가지. 나무는 가마 속에서 불에 타며 형태를 잃는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식으며 새로운 물질로 재탄생한다. 가장 뜨거운 순간을 지나 비로소 숯이 된다. 생성과 소멸 사이 인고의 기다림. 그로인해 완성되는 변화의 시간은 이배 작업의 핵심 사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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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 du feu, 800x250x250cm, 스틸 프레임에 숯, 2026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이배는 전시를 준비하며 1년 반 동안 스무 차례 넘게 원주를 찾았다. 이곳에서 현대적인 수도원에 와 있는 것 같은 평온을 느꼈다. 동시에 안도 타다오 건축 특유의 강한 존재감은 긴장으로 작용했다. 작가는 무언갈 새롭게 더하기보다 안도의 건축 안에 스며드는 방식을 택했다.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건축물 사이에서 작가의 생각이 그 틈을 찾지 못하면 수용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이배 작가

염원을 쌓아 올린 숯 기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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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 du feu, 800x250x250cm, 스틸 프레임에 숯, 2026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본관 입구에서 관람객을 맞이하는 것은 높이 8m, 무게 7톤의 숯 기둥 〈불로부터(Issu du feu)〉다. 2023년 뉴욕 록펠러센터에서 선보인 작업의 확장된 형태다. 나무로 둘러싸인 미술관 정상에 나무가 탄 결과물인 숯이 서 있는 모습은 토템이자 기원을 담은 기둥처럼 보인다. 이 작품에는 4년 전 강원도 고성 산불 현장에서 마주한 작가의 기억이 담겨 있다. 다 타버린 숲에 남아 있던 거목을 떠올리며 한 조각씩 숯을 쌓아 올렸다. 재난의 기억 위에 다시는 그런 일이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다.

붓질로 이루어진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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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rushstroke, 227.3×181.8cm(each) 16ea, Charcoal Ink on Paper, 2026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청조갤러리 로비는 휴식의 공간에서 전시장으로 전환됐다. 거대한 통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 아래 16점의 〈붓질(Brushstroke)〉 연작이 마주 보며 배치된다. 숯 먹으로 그려낸 거대한 획들은 시간과 계절에 따라 변하는 외부 풍경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다. 관람객은 그림 사이를 지나며 붓질로 이루어진 풍경 속을 산책하게 된다. 이배에게 붓질은 단순한 회화 행위가 아니다. 숯가루를 압착해 자신의 호흡과 신체적 움직임을 종이 위에 남기는 수행의 과정이다. 30년간 반복해온 시간이 이 16점에 담겨 있다.

비움과 채움, 백과 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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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ite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청조갤러리 1관 〈White〉는 이름 그대로 백의 공간이다. 안도 타다오의 노출 콘크리트를 종이로 감싸 비워진 공간을 조성했다. 건축물의 벽면을 그대로 살리기 위해 그림을 거는 대신 바닥과 천장을 잇는 곡선의 종이 설치물과 완성되지 않은 형태의 조각들을 배치했다. 그림을 그리기 위해 준비된, 그러나 그리지 않은 종이가 걸려 있는 방. 이배에게 흰색은 비어 있음이 아니라 의미가 생성되기를 기다리는 여백이다. 벽면 한켠에는 약 3만 5천 개의 스테이플러 심이 박혀 있다. 멀리서 보면 연필로 그은 선처럼 옅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금속 물성이 드러난다.

“안도 선생님이 만들어 놓은 공간에 그림을 그리지 말아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공간을 고스란히 살리고 싶었어요.”

이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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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 du feu, 260x170cm(each) 6ea, 캔버스에 숯, 2003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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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White〉가 비움이었다면 청조갤러리 2관 〈Black〉은 채움이다. 길이 10.4m에 달하는 대형 〈불로부터(Issu du feu)〉 연작과 붓질을 입체화한 브론즈 조각이 함께 놓인다. 바닥에 직접 그린 드로잉은 고향 청도의 숲 바닥을 옮겨온 것이다. 마치 숲을 그리듯 바닥에 그림을 그렸다고 작가는 말했다. 그 위에는 2000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 전시에서 사용한 숯 덩어리들이 함께 놓인다. 과거의 작업과 현재의 드로잉이 중첩되는 순간이다. 작가는 이 공간을 구상하며 겸재 정선의 ‘인왕제색도’를 떠올렸다. 산과 물이 흘러가듯 바닥 드로잉과 벽면 회화, 숯 덩어리와 브론즈 조각이 겹쳐 산수화 같은 풍경을 이룬다.

황무지에 선 농부의 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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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coming, video, sound, color. 13min05sec, 2026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청조갤러리 3관 〈Becoming〉은 이 전시에서 가장 날것에 가까운 공간이다. 높이 9m의 스크린에는 작가가 청도의 논 위에서 붓질하는 영상이 흐르고, 그 앞에는 청도에서 가져온 흙으로 만든 약 14m 길이의 논두렁이 놓여 있다. 이 흙 위에서 전시 기간 동안 식물들이 자라고 사라진다.

“나는 농부의 아들이라는 생각이 마음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이배 작가

이배는 스스로를 “황무지에 선 농부”라 표현한다. 화가가 되겠다는 아들에게 과수원을 물려주고자 했던 아버지의 기억, 농부의 아들이라는 자신의 본질. 그는 논 위에서 붓질을 하며 농사와 예술 사이의 간극을 몸으로 좁힌다. 2024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전 세계인의 소원을 태우며 새로운 시작을 기원한 〈달집태우기〉와 맥을 같이하되, 이번에는 불이 아닌 흙 위에서 생명이 자라는 과정을 보여준다.

산을 보게 하는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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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u du feu, 800x250x250cm, 스틸 프레임에 숯, 2026 ⓒ Museum SAN, Photo by Sangtae Kim

야외 ‘무의 공간’에는 건축물의 지붕과 주변 나무들의 높이에 맞춘 약 10m 규모의 브론즈 조각 〈붓질(Brushstroke)〉 6점이 서 있다. 이 조각들은 스스로 전면에 나서기보다 그 사이로 보이는 원주의 산세와 하늘을 더 아름답게 드러낸다. 조각은 풍경의 중심이 아니라 풍경을 바라보게 하는 프레임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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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SAN

1990년 파리 슈퍼마켓에서 바베큐용 숯을 사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후 이배는 여전히 숯을 쥐고 있다. 처음에는 저렴한 재료였을 뿐이었지만, 동양의 수묵 문화와 자신의 정체성을 겹겹이 입혀가며 숯은 그만의 언어가 되었다.

오랫동안 해외에 머물던 작가에게 전시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는 여정이었다. 삶 전체를 되돌아보는 시간. 자신의 근원에 대해 곱씹으며 예술과 노동, 자연의 관계를 다시금 사유했다. 이 사유는 전시 전반에 걸쳐 생명과 순환, 시간의 흐름을 탐구하는 구조로 나타난다. 전시장의 흙 위에서 자라기 시작한 식물들은 겨울이면 소멸할 것이다. 전시는 12월 6일까지 이어진다.


About 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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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경북 청도 출생. 1989년 파리로 이주한 뒤 숯이라는 매체를 통해 독보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했다. 숯의 물성을 극대화한 〈불로부터(Issu du feu)〉, 신체의 호흡을 기록한 〈붓질(Brushstroke)〉 연작으로 세계적인 주목을 받았으며, 프랑스 문화예술 훈장 기사장(2018),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2000), 대한민국 문화예술상(2023) 등을 수상했다.

이배 개인전 〈En attendant: 기다리며〉

기간 2026년 4월 7일 – 12월 6일
운영 시간 화 – 일요일(월요일 휴관), 10:00 – 18:00
장소 뮤지엄 산 본관 입구, 청조갤러리 로비·1·2·3관, 무의 공간
웹사이트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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