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DW 2026 ③ 밀라노를 매료시킨 한지, 조명 디자인의 옷을 입다
안드레아 클레어 스튜디오의 '토테믹'
세계 최대 디자인 행사로 손꼽히는 〈밀라노 디자인 위크〉 가 지난 4월 26일 막을 내렸다. 디자인 위크 기간 중 주목 받은 글로벌 브랜드 간의 협업부터 한국 디자이너와 디자인 스튜디오의 전시, 전통 소재인 '한지'를 활용한 클레어 스튜디오의 조명 등 밀라노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디자인 장면을 정리했다.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가장 화제가 된 전시는 단연 ‘알코바(Alcova)’였다. 올해 알코바는 밀라노 서부의 ‘바조 군 병원(Baggio Military Hospital)’을 무대로 130여 팀의 실험적인 작업을 소개했다. 수많은 작품 중에서도 한국의 전통 소재인 한지를 조형적으로 풀어낸 안드레아 클레어 스튜디오의 ‘토테믹(Totemic)’은 관람객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
숭배의 형상, 건축이 된 조명 ‘토테믹’
안드레아 클레어 스튜디오는 한국 전통 한지를 현대적 미학으로 재해석해 압도적인 시각적 경험을 선사한다. 이번에 선보인 ‘토테믹’은 숭배의 대상을 수직으로 쌓아 올린 형상을 의미하며, 위로 상승할수록 경외심과 의미가 축적되는 구조적 미학을 상징한다. 작가는 조명을 단순히 어둠을 밝히는 도구를 넘어 공간의 분위기를 완성하는 ‘공간을 위한 주얼리(Jewelry for space)’로 정의하며, 이를 통해 조명을 하나의 독립된 건축적 요소로 확장했다.


전시의 주인공은 한지를 한 겹씩 수작업으로 적층해 만든 세 가지 형태의 쉐이드다. 문(Moon, 불변과 낭만), 어거스트(August, 지혜와 무게감), 세이지(Sage, 축적된 지식)라는 이름을 지닌 유닛들은 가느다란 황동 프레임에 지지되어 수직으로 배열된다. 한지를 겹겹이 쌓아 올린 표면은 빛을 투과시켰을 때 마치 대리석의 결이나 정교한 모자이크 같은 깊이감을 자아내며, 종이라는 유기적 소재가 지닌 물리적 한계를 넘어선 구조적 완성도를 보여준다. 특히 이번 알코바 설치는 뉴욕 데뷔작보다 규모를 두 배 가까이 키워, 직경 최대 56cm의 쉐이드가 높이 약 4미터(13피트)에 이르는 웅장한 수직 구성을 완성했다. 여기에 22K 금박, 문 골드(Moon Gold), 스털링 실버 박과 같은 화려한 금속 마감을 도입해 시각적 밀도를 높였다.

공간의 몰입감을 극대화한 협업 역시 돋보였다. 아티스트 매튜 데이 페레즈(Matthew Day Perez)와 협업한 핑크·앰버 톤의 주물 유리(cast-glass) 테이블은 스탠딩 토템에 통합되어 바닥에 유채색 그림자를 드리웠고, 맷 오스틴(Matt Austin)의 거울은 한지의 은은한 빛을 공간 전체로 굴절시키고 확산하며 관람객들을 빛의 숲으로 초대했다. 모든 작품은 로스앤젤레스 프로그타운(Frogtown) 워크숍에서 10명의 숙련된 장인들에 의해 소규모 일괄 제작(Small-batch) 방식으로 만들어져 수공예적 가치를 보존한다.
Interview
안드레아 클레어 Andrea Claire Studio 대표디자이너

이번 밀라노 디자인 위크의 알코바 전시가 이전의 작업들과 차별화되는 지점이 궁금하다. 특히 ‘컬렉터블 NYC(Collectible NYC)’에서 선보인 원작보다 규모를 두 배 가까이 키우고 22K 금박이나 문 골드(moon gold) 같은 새로운 마감을 도입했다.
알코바 전시의 가장 큰 차이점은 마침내 이 컬렉션이 본래 의도했던 규모(Scale)로 작업할 수 있었다는 점이다. 로사나 오를란디 갤러리나 컬렉터블 NYC에서의 지난 전시는 개별 작품을 보여주거나 부스 안에서 작업해야 하는 제약이 있었다. 반면 이곳에서는 방 전체를 온전히 사용할 수 있었기에, 환경을 통제하고 작품을 둘러싼 완벽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었다. 컬렉션의 규모를 키우는 것은 매우 중요한 과제였다. 우리는 항상 대형 건축 환경에 맞는 작업을 지향해 왔고, 이 시스템 역시 그러한 방식으로 작동하도록 설계되었으나 지금까지는 이를 제대로 보여줄 기회가 없었다.


알코바에서 선보인 작품들은 수직으로 확장되며 공간 안에서 서로 관계를 맺는다. 이를 통해 단독 오브제를 넘어 공간적이고 몰입감 있는 경험으로 변화한다. 마감 측면에서는 컬렉터블 NYC에서 처음 선보였던 기법들을 더욱 확장했다. 대형 쉐이드에 커피 염색 처리를 더하고, 스탠드 조명 안에 주물 유리(cast-glass) 테이블 요소를 개발해 넣었는데 이들 모두 새롭게 시도한 것들이다. 이와 함께 23K 금박, 문 골드, 스털링 실버 박의 사용은 이 작업이 ‘공간을 위한 주얼리’라는 개념을 더욱 직접적으로 강화해 준다. 나는 늘 샹들리에가 주얼리가 의상을 완성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공간을 완성한다고 생각해 왔다. 이번 전시에서 그 아이디어는 더욱 구체화되었다. 조명 기구들이 바닥에서 천장까지 공간의 윤곽을 따라 흐르며, 실내 전체에 완성도와 의도된 존재감을 부여한다.
작업에서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한국의 전통 종이인 ‘한지’다. 로스앤젤레스에서 활동하는 디자이너로서 이 낯선 소재를 처음 접하게 된 계기가 있다면?
오랫동안 이사무 노구치(Isamu Noguchi)의 ‘아카리(Akari)’ 조명 조각을 흠모해 왔기에 종이라는 소재에 늘 끌렸다. 소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던 중 한지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현대적인 조명 디자인에서 한지가 널리 사용되지 않는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덕분에 규정되지 않은 개방된 느낌을 받았고, 우리만의 것을 개발할 여지가 많다고 느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 선택한 이유는 실용적인 측면 때문이다. 한지는 따뜻한 톤을 지녔으며, 다른 종이에서는 볼 수 없었던 미묘한 섬유질 질감이 빛을 독특하게 확산시킨다. 또한 놀라울 정도로 튼튼하고 다루기 쉬우며 큰 폭의 종이를 구할 수 있어, 작품의 형태적 완성도를 해치지 않으면서도 규모를 키우는 것이 가능했다. 정서적인 끌림도 있었지만, 결국 한지가 지닌 시각적인 부드러움과 구조적인 성능의 결합이 이 작업을 구축하는 데 가장 적합한 재료라고 판단했다.
한지를 겹겹이 쌓아 대리석 같은 질감과 모자이크 같은 깊이를 만들어내는 과정은 고도의 섬세한 수작업을 요한다. 한지라는 유기적인 소재를 구조적인 조명으로 변환할 때 기술적 한계나 재료 특유의 다루기 어려운 점은 없었나?
한지를 다루며 발견한 핵심 중 하나는 보기보다 훨씬 강하다는 점이며, 이 강도 덕분에 구조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젖었을 때의 특성, 찢어지는 방식, 그리고 물, 풀, 우레탄에 반응하는 방식 등이 제작 과정 전체를 정의한다. 동시에 이러한 특성들이 한계가 되기도 한다. 한지는 유기적인 재료이기에 작업 과정에서 팽창하고 부드러워지며 변형된다. 따라서 이를 과도하게 통제하려 들지 않으면서도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법을 배우는 것이 과제였다.

대리석 같은 깊이감을 만드는 적층 과정은 고도의 정밀함이 필요하지만, 동시에 재료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려는 태도도 필요하다. 나는 늘 루이스 칸(Louis Kahn)이 “벽돌이 무엇이 되고 싶어 하는지 물어보라”고 했던 말을 떠올린다. 나 역시 한지를 같은 방식으로 대하려 노력한다. 한지를 새로운 맥락으로 밀어붙이는 데 관심이 있지만, 한지가 아닌 다른 무언가가 되도록 강요하지는 않는다. 나의 작업은 통제와 수용 사이의 균형점에 머물러 있다. 재료가 무엇을 하고 싶어 하는지 이해하고, 재료와 충돌하는 것이 아니라 재료와 함께 작동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다.
현재 로스앤젤레스에서 10명의 숙련된 장인 및 제작자 팀을 이끌고 있다. 모든 피스를 스튜디오 내부에서 직접 제작하는 방식을 고수하고 있다고. 대량 생산이 아닌 ‘소규모 일괄 제작’ 시스템을 유지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대량 생산에는 관심이 없다. 스튜디오 설립 당시의 원칙 중 하나는 ‘슬로 디자인(Slow design)’, 즉 더 적은 물건을 만들더라도 정성을 다해 훌륭한 품질로 만드는 것이었다. 어떤 이들은 대량 생산에 능숙하고 세상에는 그런 방식이 필요한 영역도 있겠지만, 적어도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내 작품이 대부분의 대량 생산 제품처럼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흘러도 변치 않고 견뎌내기를 바란다.
프랭크 게리(Frank Gehry), 모포시스(Morphosis) 같은 건축 거장들의 사무소에서 실무 경험을 쌓았다. 이러한 건축 교육과 실무 경험이 오늘날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나?
나에게는 매우 중요한 형성기였다. 당시 나는 젊고 배우려는 의지가 충만했으며, 게리 파트너스나 모포시스와 같은 스튜디오에서 접한 수준 높은 사고방식은 공간에 접근하고 문제를 해결하는 나의 방식을 형성하는 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동시에 내 기질이 건축의 속도나 규모와 완전히 맞지는 않는다는 사실도 곧 깨달았다. 건축의 개념적 엄격함과 건축이 지닌 문화적, 역사적 의미에 매료되었지만, 좀 더 즉각적이고 손으로 직접 만질 수 있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여전히 그때의 배경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 사물이 공간 속에 어떻게 놓이는지, 그것이 움직임과 분위기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등 공간적으로 작업하고 건축적으로 생각하게 해준다. 다만 제작 과정에 훨씬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규모로 일한다는 점이 다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작업은 내가 건축에서 가장 가치 있게 여기는 요소들을 더욱 직접적이고 유연한 방식으로 유지하고 있는 셈이다.
아티스트 매튜 데이 페레즈와 맷 오스틴과 협업도 선보였다. 이들과 함께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무엇보다 ‘한지’라는 소재에 유리와 거울이라는 물성을 결합했을 때 기대한 시각적 시너지도 궁금하다.
맷 오스틴은 재능 있는 오랜 친구다. 그가 새로 개발 중이던 벽 장식 작품(wall piece)이 내게 즉각적인 영감을 주었다. 알코바 설치를 구상하기 시작했을 때 그의 작품을 공간에 들이는 것은 매우 당연한 수순처럼 느껴졌다. 그의 작업이 내 작업과 조화롭게 어우러져 더욱 층위가 풍부한 환경을 만들어낼 것이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맷 오스틴을 통해 매튜 데이 페레즈를 소개받았다. 그는 벽 장식 작업에 참여했을 뿐만 아니라 브루클린 레드훅에서 유리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다. 주물(casting)에 대한 그의 접근 방식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했고, 그를 만난 후 내가 테이블에 대해 가지고 있던 비전을 세련되면서도 재료의 특성이 잘 드러나는 결과물로 구현해 줄 적임자라는 확신이 들었다. 시너지는 단순히 미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제작 과정과 감수성의 결을 맞추는 데서 나왔다. 우리 모두 재료를 매우 직접적이고 수작업적인 방식으로 다루기 때문에, 이러한 접근 방식이 모여 설치 전체가 통일되지는 않으면서도 응집력 있는 느낌을 줄 수 있었다. 각 요소가 고유한 존재감을 가지면서도 공유된 분위기에 기여하는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