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픽 디자인의 50가지 도구 ①] 책상 위의 도구

월간 〈디자인〉 Vol.566 | Special Feature

그래픽 디자인 결과물도 변화하지만 그 뒤에서 작동하는 도구의 변화는 더 현저하다. 디자이너들은 간혹 이런 도구의 역사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도 하고, 이 자체를 소재 삼아 작업하기도 한다.

[그래픽 디자인의 50가지 도구 ①] 책상 위의 도구

로트링 펜(Rotring Pen)

선을 긋는 데 쓰는 제도 펜의 일종. 원래는 독일 회사의 상표명이었는데 지금은 보통명사화되었으며 테크니컬 펜(technical pen)이라고도 한다.

1928년 독일에서 탄생한 이 제도용 필기구는 1970~1980년대 한국 디자인 현장에서 전문 디자이너임을 증명하는 일종의 자격증과도 같았다. 0.1mm부터 시작해 소수점 단위로 나누어진 펜촉의 굵기는 디자이너들에게 세상을 규격화하고 통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줬다. 확대경으로 들여다봐도 흐트러짐 없는 선의 농도, 자를 대고 그었을 때 시작과 끝이 완벽하게 일치하는 그 정교함은 디자이너라면 누구나 바라던 완벽성을 충족시켰다. 로트링 펜이 등장하기 전, 디자이너들의 손에는 제도용 펜인 ‘오구(烏口)’가 들려 있었다. 금속 사이에 먹물을 찍어 선을 긋던 집게 모양의 오구는 숙련도에 따라 선의 굵기가 천차만별인 야생의 도구였다. 반면 로트링 펜은 수직으로 세워 긋기만 하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굵기의 선이 그려졌다. 1980년대 한국의 수많은 잡지 제호와 광고의 외곽선, 정밀한 레이아웃 가이드는 모두 여기에서 탄생했다. 로트링 펜과 함께 책상을 지켰던 스테들러(Staedtler)의 홀더 펜슬, 촘촘하게 눈금이 새겨진 아크릴 자 그리고 컴퍼스는 디자인이 그리는 일이면서 동시에 설계하는 일임을 명확히 드러냈다. 1980년대 중반 한국 디자인계에 그리드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도입되자 로트링 펜은 그 수단을 물리적으로 구현하는 유일한 수단이 됐다. 디자이너들은 로트링 펜으로 대지 위에 오차 없는 가이드라인을 표시하며 지면의 질서를 구축했다.


팬톤 컬러북(Pantone Colors)

미국 팬톤사에서 제작한 인쇄 및 소재별 잉크를 조색한 색표집. 유광판, 무광판, 메탈릭, 파스텔, 네온 등 다양한 컬러가 출시된다. 인쇄, 텍스타일, 플라스틱, 웹 등 용도별로 여러 종류가 있으며 디자인 분야 전반에서 사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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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채 형태로 펼쳐지는 팬톤 컬러북은 색상을 겹쳐보거나 실제 인쇄물에 대조해 보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기에 최적화된 디자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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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톤과 일본 컬러 차트에 의존하던 한국 디자이너들은 색상 표준화와 인쇄 환경의 한계 속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국내 인쇄 기업들은 자체 컬러 차트북을 제작하며 대안을 모색하기도 했다. ‘한국 광양사의 프로세스 컬러 차트북’, 월간 〈디자인〉 1986년 7월호.

색은 이름만으로는 전달되지 않는다. 너의 빨강과 나의 빨강은 다르다. 이 주관적인 감각의 영역을 객관적인 숫자의 세계로 번역해 낸 도구가 바로 팬톤 매칭 시스템이다. 팬톤의 역사는 1960년대 초, 인쇄 회사에서 시간제 직원으로 일하던 로렌스 허버트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다. 인쇄소마다 배합 비율이 달랐고, 같은 색을 주문해도 결과가 달랐다. 그는 작업 안료를 12종으로 줄이고, 이 12종만으로 상업적으로 필요한 모든 색을 정밀하고 반복 가능하게 만들 수 있음을 증명했다. 흔히 ‘부채’라 부르는 독특한 가로형 바인더 형태는 단순히 휴대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이는 두 가지 이상의 색상을 겹쳐보며 인접 색상과의 조화를 즉각적으로 확인하고, 인쇄물 위에 직접 대보며 색의 일치 여부를 판별하기 위해 고안한 최적의 디자인이었다. 1963년 단 20장의 카드로 시작한 이 부채는 이제 수천 가지 색상을 담은 거대한 아카이브가 되어 전 세계 디자인의 공용어가 되었다. 국내 인쇄 현장에서는 팬톤과 함께 DIC 컬러 가이드를 병행해 썼다. 일본의 잉크 제조사 DIC가 1968년 초판을 발행한 이 컬러북은 일본 인쇄 장비와 함께 한국에 유입됐다. 일본·프랑스·중국의 전통 색 시리즈까지 포함해 2000가지 이상의 색을 수록한 컬러북으로 동아시아 인쇄 현장에선 팬톤 못지않은 표준이 됐다. 2022년 어도비는 자사 소프트웨어에 내장된 팬톤 라이브러리를 유료 구독제로 전환하면서 기존 작업물의 팬톤값이 모두 검정으로 치환되는 일이 벌어졌다. 디자이너들은 어도비와 팬톤이 자신들의 작업물을 인질로 삼았다고 불평했다. 색은 모두의 것이지만 표준색은 팬톤의 전유물인 셈이다.


에어브러시(Airbrush)

작품 표면을 도색하는 기계적 분사 도구. 정밀하고 입체적인 이미지를 구사할 수 있다. 컴프레서로 압축한 공기를 이용해 도료를 분사하는 장치로, 붓으로 칠하는 것보다 부드러운 표현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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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브러시의 구조와 사용법을 소개한 기사. ‘부드럽고 자연스러운 표현을, 에어브러시’, 월간 〈디자인〉 1980년 8월호.

디지털 리터칭이 존재하지 않던 시절, 광고 속 제품의 매끄러운 광택이나 인물의 결점 없는 피부는 모두 ‘보이지 않는 붓’ 에어브러시의 결과였다. 1970년대 말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디자인 현장을 지배했던 에어브러시는 압축 공기를 이용해 미세한 잉크 입자를 분사하는 도구로, 손의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완벽한 입체감을 구현해 냈다. 1980년대 월간 〈디자인〉 연재 시리즈 ‘디자이너를 위한 도구들’에서 세 차례나 비중 있게 다룰 만큼 에어브러시는 당시 일러스트레이터와 광고 디자이너들에게 필수 기술이자 도구였다. 작동 원리는 간단하다. 펜 모양 기구에 달린 트리거를 누르면 컴프레서 압축기에서 생성된 공기가 잉크를 끌어 올려 안개처럼 뿜어낸다. 붓과 달리 종이에 직접 닿지 않기 때문에 자국이 전혀 남지 않고, 특유의 부드러운 그러데이션 효과는 금속의 차가운 광택이나 과일의 질감을 표현하는 데 탁월했다. 그 때문에 에어브러시가 가장 번성했던 시대의 광고 이미지는 오늘날 과도하게 완벽한 시대의 미감으로 기억된다. 에어브러시 작업은 마스킹과의 싸움이기도 했다. 잉크를 원하는 위치에 딱 맞게 분사하려면 나머지 부분은 ‘프리스킷’이라는 얇은 필름으로 덮고 칼로 일일이 오려야 했기 때문이다. 공기를 공급하는 컴프레서의 진동 소음, 노즐이 막히지 않게 수시로 닦아야 하는 번거로움, 그리고 잉크 안개를 들이마시지 않도록 착용하는 마스크 역시 에어브러시를 사용하는 데 따르는 어려움이었다. 디지털 이미지 편집 소프트웨어의 등장은 에어브러시의 자리를 빠르게 대체했다. 포토샵의 에어브러시 툴은 물리적 도구의 이름을 그대로 빌려왔다. 실물 에어브러시는 이제 자동차 도색, 네일 아트, 모형 제작 등 특수 분야에서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것이 빚어낸 매끄럽고 완벽한 이미지의 미학만큼은 디지털 보정 기술 분야에서 자리를 굳건히 하고 있다.


레트라세트(Letraset)

영국의 레트라세트사가 1961년에 개발한 전사식 활자 시스템이자 그 브랜드 자체를 가리킨다. 신축성 없는 폴리에스터 필름 뒷면에 글자, 기호, 패턴 등이 감압식 접착제로 부착되어 있다. 인쇄된 대지 위에 시트를 얹어 문지르면 글자가 그대로 전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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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와 기호가 인쇄된 레트라세트.

레트라세트가 등장하기 전, 디자이너들은 번듯한 글자 한 줄을 얻기 위해 식자소에 원고를 맡기고 반나절을 기다려야 했다. 그러다 1970년대 후반 알파화학이 건식 전사 시트 레트라세트를 수입, 유통하기 시작하면서부터 디자이너들은 자신의 책상 위에서 완벽한 서체를 부릴 수 있게 되었다. 레트라세트의 가장 큰 매력은 물질적 쾌감에 있다. 다 쓴 볼펜이나 전용 트랜서로 글자 배면을 슥슥 문지를 때 들리는 마찰음, 그리고 시트를 조심스럽게 들어 올리는 순간 대지 위에 안착한 검은 글자를 확인할 때의 희열은 디자이너들만이 공유하던 감각이었다. 레트라세트는 한국 디자인의 ‘외양’을 서구적 모더니즘으로 빠르게 변모시켰다. 1980년대 초반에 강렬한 존재감을 뽐냈던 광고 문구나 잡지 제호 뒷면에는 늘 레트라세트가 제공한 영문 서체, 이를테면 헬베티카와 쿠퍼 블랙, 아방가르드가 있었다. 서구에서 레트라세트가 펑크 문화의 거친 DIY 미학을 탄생시켰다면 한국에서는 역설적으로 가장 세련되고 정교한 도시적 미감을 구현하는 도구가 된 것이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6호(2026.06)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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