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2026: 다시 뛰는 심장〉

전시를 둘러본 뒤 남는 것은 개별 작품보다 공간의 감각이다. 〈서울역 2026: 다시 뛰는 심장〉은 어쩌면 출발 전의 예열에 가깝다. 다시 역사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건물에서 그 출발을 위한 첫 신호를 보내고 있다.

〈서울역 2026: 다시 뛰는 심장〉

입구에서 작은 종이 한 장을 받는다.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종이는 행선지와 출발 시각 대신 전시명이 적힌 옛 승차권이다. 일부기에 티켓을 넣은 관람객은 개표 소리와 함께 건물 안으로 깊숙이 들어선다. 전시는 첫 장면부터 옛 서울역을 통과하는 여정을 제안한다. 지난 6월 11일 문화역서울284에서 개막한 철도 문화전 〈서울역 2026: 다시 뛰는 심장〉의 기획 의도다. 전시는 1층 중앙 홀과 대합실, 2층 대식당과 소식당, 복도와 회의실은 물론 평소 접근이 어려운 열차 승강장까지 개방해 옛 서울역 전역을 무대로 삼는다. 문화역서울284 개관 이래 최대 규모인 이번 전시는 개최 시점도 상징적이다. 한국철도공사와 국가유산청은 2025년 업무 협약을 체결하고 공동 용역 발주와 학술 대회 개최를 통해 옛 서울역 복원의 토대를 마련했다. 그 결과를 바탕으로 2027년부터 2년간 본격적인 복원 공사가 예정된 가운데, 이번 전시는 하나의 전환점으로 기능한다. 역사로 돌아가기 직전의 공간에서 126년이라는 철도의 시간과 기억을 되짚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20260625083753 20260625 083753
레오 킴의 ‘목적 없는 항해–순환 속으로의 여정’. 호남평야의 흙과 자연 요소로 구성한 작품은 물류의 흐름을 생명의 순환과 연결 짓는다.
20260625083844 20260625 083843
박선기, ‘An Aggregation 2026–Continuum’. 1만여 개의 크리스털 볼이 빛을 반사하며 공간을 채운다.

실제로 전시는 이동과 대기, 만남과 이별, 출발과 귀환 같은 행위를 경험하며 장소에 대한 기억을 다시 불러온다. 입구를 통과하면 마주하는 중앙 홀은 이번 전시의 주제 의식을 가장 압축적으로 드러내는 공간이다. 철도를 단순한 교통 인프라가 아니라 시간과 기억의 축적으로 바라본다. 12개의 석조 기둥과 스테인드글라스 돔 아래 설치된 박선기의 ‘An Aggregation 2026–Continuum’은 1만여 개의 아크릴 크리스털 볼로 공간의 리듬을 시각화한다. 같은 곳에서 상영되는 조한진의 영상 작품 ‘Flow of Railroad’와 홍인숙의 ‘미디어텍스트-서울역’은 철도를 상징과 기억의 언어로 확장한다. 철도망의 움직임을 모션 그래픽과 파티클 기반의 시각 언어로 풀어낸 조한진의 작업과, ‘서울역’을 문자도와 일월오봉도의 상징 체계로 재해석한 홍인숙의 작업은 이 공간이 품어온 시간과 상상력을 현재의 감각으로 옮겨 낸다. 중앙에 놓인 증기기관차 모형 ‘파시1-4288’은 1930년에 제작한 국내 증기기관차를 5분의 1 크기로 재현한 것으로, 철도가 근대의 상징이던 시대의 열망을 전한다.

20260625083939 20260625 083939
3등 대합실에 설치한 이갑철의 ‘지역의 시간, 기록의 풍경’ 중 ‘부산’(1985~1990). 철도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지역의 삶을 포착했다.

이번 전시에서 흥미로운 점은 역사를 거대한 사건으로 짚는 대신 개개인의 기억으로 이야기한다는 데 있다. 3등 대합실에 전시된 이갑철의 사진 연작 ‘지역의 시간, 기록의 풍경’은 철도역이 있던 지역을 직접 걸으며 기록한 작업이다. 사진 속에는 특별한 사건도, 극적인 장면도 담겨 있지 않지만 익숙한 풍경과 사람들의 표정은 역사가 지역의 삶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를 담담하게 보여 준다. 건물 안쪽에선 철도를 둘러싼 기억이 보다 감각적인 방식으로 펼쳐진다. 귀빈 예비실에 설치된 김보민의 ‘너머의 너머’와 문은준의 ‘스물두 번의 도화지, 그 위를 달려온 기차’가 대표적이다. 특히 문은준의 작업은 철도박물관이 개최한 ‘어린이 기차 그리기 대회’ 수상작을 바탕으로 제작한 영상이다. 가족과의 여행, 창밖 풍경, 미래에 대한 기대를 담은 그림들은 철도가 단순한 이동수단을 넘어 하나의 생활 풍경으로 기억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20260625084127 20260625 084127
전국 27개 노선과 주요 역을 시각화한 인포그래픽, 그리고 그간 우리 곁을 달려온 철도 차량 모형을 3등 대합실에 전시했다.

동시에 시선은 자연스럽게 철도를 움직여 온 사람들로 이어진다. 바로 옆 역장실에는 1990년대 말 역장의 업무 공간을 재현했다. 실제 사용하던 집기와 사료를 통해 열차 운행과 인력을 총괄하던 역무의 현장을 엿볼 수 있다. 승강장에 자리한 김다정의 보태니컬 설치 작업 ‘After Stillness’는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았던 플랫폼 위에 새로운 풍경을 만든다. 2층 대식당에서는 1925년 경성역과 함께 문을 연 레스토랑 ‘그릴’을 만날 수 있다. 붉은 카펫 위로 철도박물관이 소장한 실제 ‘그릴’의 가구와 식기류가 놓였고, 김도현의 영상 작업 ‘Leave Me Alone’이 상영된다. 떠나고 싶지만 떠날 수 없는 한 인물의 내면을 따라가는 영상은 역이 수많은 만남과 이별, 기다림이 교차하는 장소였음을 떠올리게 한다. 근대의 사교 공간이었던 그릴에 대한 기억과 작품의 정서가 자연스럽게 맞물린다. 이 외에 전시와 연계한 프로그램도 다양하다. 현 철도박물관 관장과 철도 산업 종사자들이 참여하는 ‘레일로드 토크’, 철도역이 위치한 지역의 문화를 소개하는 ‘오늘의 행선지’, 브루잉 클래스, 기차 블록 조립 체험 등을 운영한다. 관람객은 스탬프 투어를 따라 공간을 둘러보며 전시와 프로그램을 함께 경험할 수 있다. 전시를 둘러본 뒤 남는 것은 개별 작품보다 공간의 감각이다. 〈서울역 2026: 다시 뛰는 심장〉은 어쩌면 출발 전의 예열에 가깝다. 오랫동안 멈춰 있던 엔진이 다시 온도를 올리듯, 전시는 한때 수많은 사람의 출발과 도착이 이루어지던 공간에 서서히 열을 불어넣는다. 다시 역사로 돌아갈 준비를 하는 건물에서 그 출발을 위한 첫 신호를 보내고 있다.


Interview

20260625083527 20260625 083527
김미연 예술 감독
2024년 KTX 개통 20주년 기념전 〈여정 그 너머〉에 이어 다시 한번 철도를 주제로 한 전시를 맡았다.

2024년 전시가 속도와 기술이라는 비교적 선명한 주제를 다뤘다면, 이번 전시는 126년의 철도 역사에서 무엇을 오늘의 감각으로 다시 불러낼 것인지를 고민하는 과정이었다. 가장 먼저 던진 질문은 ‘긴 역사 가운데 지금의 관람객에게 도착해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였다. 철도사는 연표로 정리할 수 있지만 철도를 통해 경험한 것과 그 감정은 연표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첫 상경의 긴장감, 귀향길의 안도감, 플랫폼에서의 만남과 이별처럼 철도는 언제나 사람과 함께 움직였다. 이번 전시 역시 기술의 발전사를 넘어 철도가 축적해 온 시간과 기억을 보여 주고자 했다.

이번 전시는 철도 역사로의 기능 회복을 앞둔 시점에 열린다. 이러한 맥락이 전시 기획에 어떤 영향을 주었나?

기능 회복이라는 상황은 이번 전시의 중요한 출발점이었다. 그래서 과거를 정리하는 회고전이 아니라, 다시 움직이는 데 필요한 기억을 불러내는 전시를 만들고자 했다. 옛 서울역은 멈춰 있는 유산이 아니라 수많은 사람의 감정이 축적된 장소다. 결국 중요한 것은 건물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그 안에 쌓인 시간을 현재의 삶 속에서 다시 작동하게 하는 일이다. 이번 전시가 옛 서울역의 다음 이야기를 상상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랐다.

20260625084456 20260625 084456
회의실 복도를 장식한 김선희의 ‘Wave of Light’. 프리즘 큐브로 빛의 흐름을 가시화하며 도착이 끝이 아닌 또 다른 시작임을 드러낸다.
옛 승차권을 재현하고 일부기 체험을 마련한 점이 인상적이다.

역사에 관한 기억을 시각으로만 전달하긴 어렵다고 생각했다. 철도는 언제나 기다리고, 떠나고, 도착하는 경험과 함께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람객이 관찰자가 아니라 이 여정에 참여하는 여행자가 되기를 바랐다. 승차권과 일부기 체험도 같은 맥락이다. 종이 승차권 한 장을 손에 쥐는 순간 역사를 관람하는 사람이 아니라 통과하는 사람이 된다. 몸으로 하는 경험은 몇 줄의 설명보다 오래 기억된다.

역대 최대 규모의 공간 활용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공간이 있다면?

내부 전시실을 지나 실제 승강장으로 이어지는 동선이 인상적이다. 플랫폼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승강장 자체가 이번 전시의 중요한 전시 공간이기 때문이다. 관람객은 이곳을 걸으며 철도가 운행되던 장소의 규모와 분위기를 경험하게 된다. 4번 승강장에는 경성역 시절부터 이어진 역사를 연표와 사료로 정리하고, 실물 크기의 기차 모형과 조형물을 배치했다. 실내 전시만으로는 전달하기 어려운 철도의 물리적 규모와 현장감을 보여 주고 싶었다. 이러한 경험은 2층 대식당과 준비실로도 이어진다. 옛 레스토랑 그릴에 관한 기억을 재현한 공간과 간이 화물용 승강기인 ‘덤웨이터’, 차내 판매 카트 같은 사료는 이 공간의 고유한 이동과 체류의 궤적을 드러낸다.

20260625085152 20260625 085152
중앙 홀에 설치된 박선기의 ‘An Aggregation 2026–Continuum’ 앞으로 홍인숙의 ‘미디어텍스트-서울역’과 ‘파시1-4288’ 증기기관차 모형이 자리한다.
전시를 준비하며 새롭게 발견한 자료나 기록이 있었나?

거대한 역사적 기록보다 작고 사적인 유물에 눈길이 갔다. 가장 인상 깊었던 자료는 어린이들이 그린 기차 그림이었다. 철도가 사람들의 기억 속에 어떤 모습으로 남아 있는지를 보여 주는 기록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문은준 감독과 협업해 어린이들의 그림을 움직이는 영상으로 되살렸다. 아이들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철도의 역사가 살아 있는 기억으로 다가온다.

효율이 이동의 중요한 가치가 된 지금, 철도와 역사를 다시 이야기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동이 빨라지고 편리해질수록 우리가 지나온 시간을 돌아볼 기회는 오히려 줄어들었다. 역은 단순한 교통 시설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와 개인의 삶이 교차하는 장소다. 특히 옛 서울역은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장면들이 축적된 공간이기도 하다. 이번 전시는 우리가 이동을 어떻게 기억하고, 공간과 어떤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지 묻는 과정에 가깝다. 유산의 가치는 보존에만 있지 않다. 오늘의 삶 속에서 다시 경험할 때 비로소 새 의미를 얻는다. 옛 서울역 역시 그런 장소가 되기를 기대한다.

〈서울역 2026: 다시 뛰는 심장〉

기간 6월 11일~8월 17일
장소 옛 서울역(문화역서울284)
주최·주관 한국철도공사
협력 국가유산진흥원,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 현대로템
웹사이트 seoul284.org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7호 (2026.07)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