숯으로 공간의 근원을 사유하다, 〈박선기: The Origin of Space〉
신세계 더 헤리티지 뮤지엄에서 열리는 박선기 조각가 개인전
신세계 더 헤리티지 4층 더 헤리티지 뮤지엄과 5층 중앙정원에서 박선기 조각가의 개인전이 9월 13일까지 열린다.

집이 불타고 남는 것은 무엇인가. 형체는 무너져도 기둥과 보가 서 있던 자리, 그 공간의 윤곽만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박선기(1966~)는 이 질문에서 출발해 신세계 더 헤리티지 4층 더 헤리티지 뮤지엄과 5층 중앙정원에서 개인전 <The Origin of Space〉를 연다. 지난 7월 17일을 시작으로 9월 13일까지 총 59일간 이어지는 이번 전시는 대형 설치작품 3점을 중심으로 조각 작품과 드로잉 20점을 함께 선보이며, 탄화된 숯을 재료로 공간을 압도하는 신작을 통해 ‘공간적 근원’을 묻는다.
숯으로 다시 세운 집, 세 개의 물성
박선기는 중앙대학교 조소과를 졸업하고 이탈리아 밀라노 브레라 국립미술원을 거쳤으며, 제9회 김종영 조각상을 수상했다. 설치·조각·건축의 경계를 통합한 ‘공간 조각’으로 국제적으로 확립된 작가로, 지난 30여 년간 숯을 비롯한 자연의 재료를 공간에 매달아 올리는 독자적인 조형 언어를 구축해왔다. 김종영미술관·취리히 Galerie Andres Thalmann·우양미술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LVMH·메르세데스 벤츠가 작품을 소장하고 있으며 인천국제공항과 서울신라호텔 등에 대규모 설치작품을 선보였다.

이번 전시에서 그는 유형문화재인 더 헤리티지 건물 자체를 출발점으로 삼는다. 메인 전시장의 ‘Space-Origin 20260303’은 통나무 숯을 매달아 한옥의 기둥과 보를 허공에 재현한 작품이다. 벽도 지붕도 없이 골조만 남았다. 기둥과 보 구조는 한국 건축의 기본 단위이자 과거를 호명하는 기호인데 작가는 이를 완성된 형태가 아니라 파괴된 직후의 상태로 제시한다. 목재가 숯이 되는 과정은 되돌릴 수 없다. 작품은 그 비가역적인 변화의 한 지점에서 시간을 멈춰 세운다. 설치 장소의 조건도 작품의 일부로 작동한다. 더 헤리티지 건물은 화강석으로 마감된 신고전주의·네오바로크 양식의 서구 근대 건축물로 내부에는 검게 탄 한옥 부재가 떠 있다. 재료도 시대도 건축 언어도 다른 두 체계가 한 공간을 공유하면서,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을 압도하지 않는 긴장 상태에 놓인다.

“저는 숯을 자연의 끝으로 봐요. 자연의 끝 모습으로서 자연을 대표하는 재료로 작품에 계속 제시해왔죠.” 작가는 숯은 단순한 재료가 아니라 자연이 도달하는 마지막 형태라고 말한다. 나무에서 파생된 숯을 자연 전체를 대변하는 상징으로 삼아 온 것이다. “전시장 자체가 유형문화재예요. 그 공간을 보존하는 입장에서 무엇이 가능할지 고민했는데 한옥을 모티브로 제작한 것도 그 맥락입니다. 더 헤리티지 뮤지엄이라는 이름에 부합하게 한옥의 기둥과 보만 남긴 형태로 본질만 남은 공간, 가장 근원적인 공간을 연출했습니다.”

복도로 이어지는 ‘An Aggregation-Plane 20260405’는 작가의 조형 어휘가 도달한 세 번째 단계에 해당한다. 초기 ‘Aggregation’ 연작은 비정형의 숯조각을 무수한 점으로 흩어 군집을 만들었고 이후에는 가늘고 긴 막대형 숯이 공간을 가로지르는 선으로 기능했다. 이번 작품이 다루는 단위는 면이다. 점이 모여 선이 되고 선이 모여 면이 되는 조형의 기본 순서를 연작 단위로 밟아온 셈이다. 면을 만들고자 선택한 재료는 합판 숯이다. 합판은 얇은 나무 단판을 결이 직교하도록 겹쳐 붙인 근대 산업의 산물로 한때 ‘나무의 혁명’으로 불렸다. 통나무가 공장에서 인공의 평면이 되었다가 불을 거쳐 다시 숯으로 돌아온다. 재료의 이력 자체가 자연과 인공을 한 차례씩 통과하는 구조다. 평면 안에 또 다른 평면이 겹쳐 놓여 있어 보는 위치에 따라 면은 선으로, 선은 점으로 분해된다.

5층 중앙정원의 ‘Space 20260407’과 ‘Space 20260408’에서는 얇은 철 판재와 스테인리스로 재료가 바뀐다. 숯이 자연의 마지막 형태였다면 금속은 산업화 이후의 시간 그리고 지금도 생산되고 있는 현재형 재료다. 두 작품은 철판 면을 층층이 쌓아 올린 구조물이다. 벽이 없어 각 층의 내부면과 기둥, 층과 층을 잇는 계단이 외부에서 한꺼번에 드러난다. 건축 도면의 단면도를 그대로 세워 놓은 형태에 가깝다. 층마다 구성과 비어 있는 정도가 조금씩 다르지만 수직 축 하나로 묶여 있어 전체는 하나의 흐름으로 읽힌다. 벽이 제거되면서 안과 밖, 사적 영역과 공적 영역의 구분도 함께 사라진다.

두 점은 같은 재료를 쓰지만 표면 처리가 다르다. “밖에 설치된 세 번째 작품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닌 철로 구성돼 있어요. 하나는 빛이 반사되어 허상의 공간을 만들어내고, 다른 하나는 녹슨 표면으로 근원적인 질감을 드러내죠. 같은 철이지만 전혀 다른 느낌을 주는 두 작품을 함께 제시하면서 상반된 느낌으로 관람객의 흥미를 자아내죠.” 작가의 말처럼 반사면은 빛을 되받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공간을 만들어내고, 산화된 면은 표면 그대로의 질감을 드러낸다. 재료는 동일한데 관람객이 받는 인상은 정반대로 갈린다.
공간을 걸음으로써 완성되는 작품
본 전시는 관람객의 적극적인 참여로 완성된다. 어두운 메인 전시장에서 집중력을 요구하는 ‘Space-Origin 20260303’을 지나면 복도에서는 드로잉과 모형을 먼저 마주하게 된다. 드로잉은 작가의 작업에서 첫 단계에 해당한다. 구상 단계의 공간을 손으로 처음 옮겨보는 자리이고, 도면과 모형은 그 구상이 실제 설치로 넘어가기까지 사유와 형태가 서로를 조정한 기록이다. 이 흔적들을 지나면 판재로 구성된 ‘An Aggregation-Plane 20260405’의 강한 공간감과 마주하게 되고, 거기서 오는 긴장감과 조형적인 미를 느끼며 복도를 빠져나간다. 실내 동선은 5층 중앙정원의 철 조각 두 점에서 끝난다.

“관람객이 공간 안을 걸어 다니면서 생각하고 그 행위로 인해 작품이 완성되는 구조예요.” 작가의 말대로 이번 전시에서 관람은 수동적인 감상이 아니라 작품을 완성하는 행위에 가깝다. 세 점의 신작을 순서대로 지나는 동선은 통나무 숯에서 합판 숯으로, 다시 철로 이어지는 재료의 변주를 몸으로 따라가는 경험이 된다.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다시 보는 공간
이번 전시가 흥미로운 지점은 작가가 재료를 다루는 방식에 있다. 통나무 숯, 합판 숯, 철이라는 세 재료는 각각 자연·산업·현재라는 서로 다른 시간대를 대표하면서도 하나의 전시 안에서 순차적으로 배치되어 하나의 서사를 이룬다. 이는 재료 선택이 미학적 결정에 그치지 않고 재료 자체가 시간성과 서사를 전달하는 매체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사례다. 지속가능성과 순환을 논의하는 오늘의 디자인 담론에서, 소멸과 생성을 한 몸에 압축한 숯이라는 재료는 단순한 물성 실험을 넘어 재료와 개념을 일치시키는 방법론으로 참고할 가치가 있다.

관람객의 동선을 따라 재료가 자연에서 산업으로 변주되도록 짜인 전시 구성 역시 공간 경험을 순서대로 설계하는 시퀀스 디자인의 한 사례로 읽어볼 수 있다. 스크린 위에서 완결된 이미지를 소비하는 데 익숙해진 지금, 몸으로 걸어야만 완성되는 이 전시는 공간을 다루는 이들에게 물성과 동선, 시간이 어떻게 하나의 개념으로 수렴할 수 있는지 되묻는다.
〈박선기: The Origin of Space〉
주소 서울시 중구 남대문로 42, 신세계백화점 본점 더 헤리티지 4층 더 헤리티지 뮤지엄, 5층 정원
기간 2026년 7월 17일 – 9월 13일
운영 시간 월-목 10:30-20:00(입장마감 19:30), 금-일 10:30-20:30(입장마감 20:00) *백화점 휴점일 휴관
문의 02-310-12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