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크리에이티브 ⑨ 하지훈 계원예대 리빙디자인과 교수
하지훈 교수에게 ‘막’은 작업의 단서이자 방법이다. ‘막’ 만들어진 전통에서 가능성을 발견하고, 이를 자유롭게 다루며 미래의 전통을 만들어낸다. 그렇게 ‘막’을 통해 익숙한 관념을 전복하고 주저 없이 다른 방식을 시험한다.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전통을 잇는 그에게 ‘막’의 사용법을 물었다.


디자인하우스 50주년 문화 캠페인 ‘막, 크리에이티브!’에 대한 생각이 궁금하다.
예전에는 한국의 ‘빨리빨리’ 문화나 일단 저지르고 보는 태도, 즉 ‘막’ 하는 것을 고쳐야 할 습성처럼 여겼다. 지금은 오히려 그런 태도가 강한 힘으로 작용하는 시대가 됐다고 생각한다. 본질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시대가 이를 필요로 하게 된 것이다. 지금은 모든 것을 완벽하게 준비한 뒤 움직이기보다 일단 시도하고, 그 과정에서 생기는 문제를 해결하며 나아가는 힘이 중요하다. 나는 이런 ‘막’이 하나의 태도를 넘어 우리만의 미학으로도 이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하지훈의 작업에서 ‘막’은 어떤 영향을 끼쳤나?
내게 ‘막’은 작업의 단서에 가깝다. 과거 사람들이 ‘막’ 만들어낸 것에서 감성을 발견하고, 이를 지금의 방식으로 활용하는 데 관심이 있다. 병산서원의 기둥을 보면 철저하게 계산된 비례나 정돈된 형태와는 다른, 즉흥적이고 자유로운 손길에서 오는 멋이 있다. 나는 이를 일종의 ‘추상적 자연스러움’이라고 생각한다. 중요한 것은 형태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감성을 이해하는 것이다.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무언가를 창조할 수 없다. 결국 이미 존재했던 것에서 출발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 나 역시 과거에 존재한 것을 지금의 기술과 소재로 재해석한다. 그런 점에서 나는 편집자와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이미 있는 것을 조합하고 편집해 낯설게 만드는 것이다. 과거 수공예의 손의 감각과 자연스러움을 오늘날의 산업과 생산 방식 안에서 어떻게 구현할지를 고민한다. 그것이 내가 생각하는 창조이고, ‘막’을 작업에 활용하는 방식이다.
그런 작업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소반’ 작업인 듯하다. 다양한 방식으로 소반을 재해석했는데, 왜 소반에 주목했나?
전통에 관심을 가진 계기부터 말해야 할 것 같다. 덴마크 유학 시절 한국에서는 해외의 새로운 트렌드를 좇는 분위기가 강했다. 반면 덴마크에서는 자신들의 전통적인 디자인과 문화를 존중하고, 그 안에서 동시대의 것을 만들어내려는 태도가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우리 문화에서는 무엇을 새롭게 가져올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무조건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우리 것 가운데 무엇이 정말 고유하고 가치 있는지 선별할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그런 관점에서 소반은 굉장히 독특한 대상이었다. 여러 사람이 모이는 테이블과 달리 소반은 1인 1상이고, 사람이 상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상이 사람에게 간다. 해주반, 나주반처럼 작은 나라 안에서도 지역마다 형태와 특징이 다르다는 점도 매력적이었다. 다른 문화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운 우리만의 특징이 분명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소반 작업을 시작했고, 다양한 소재와 제작 방식을 적용하며 계속 변주해 왔다. 소반은 지금도 달리 해석할 가능성이 보인다. 그래서 여전히 해볼 것이 많은 대상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소반뿐 아니라 반닫이처럼 우리 문화만의 특징을 지닌 다른 기물로도 관심을 넓혀가고 있다.

전통을 재해석하는 과정에서 장인들과도 활발히 협업했다.
장인과 디자이너는 정반대 역할을 하기에 오히려 궁합이 잘 맞는다. 장인이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기술과 형식을 보존하고 전승하는 사람이라면, 디자이너는 이를 동시대에 맞게 변화시키는 사람이다. 디자이너에게는 장인의 기술과 완성도가 필요하고, 장인에게는 자신의 기술을 새로운 방식으로 바라보는 디자이너의 기획과 시각이 도움이 될 수 있다. 서로에게 없는 것을 지녔기에 함께할 때 새로운 결과가 나온다. 생산 측면에서도 서로 보완할 수 있다. 공예 역시 실제 쓰임과 만나려면 일정한 생산성을 갖춰야 하고, 반대로 대량생산을 전제로 하는 디자인에서는 에디션이나 협업으로 희소성을 만들기도 한다. 서로 반대편에 있던 공예와 디자인이 이런 방식으로 점차 접점을 넓혀가고 있다고 본다. 나는 장인의 기술도 소재나 제작 방식처럼 작업을 구성하는 하나의 요소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 기술과 전통을 존중하는 것이 전제지만,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는 데 머무르기보다 내가 지닌 미감과 지금의 시대성에 맞게 어떻게 활용할지가 중요하다.
동시대적으로 변형한 것이 하나의 새로운 디자인을 넘어 새로운 전통이 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시대성이다. 그 시대를 느낄 수 있어야 한다. 시간이 지나면 진부하게 보일 수도 있지만, 그 안에 자신이 살았던 시대의 흔적이 남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내가 새로운 기술이나 소재를 사용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과거의 것을 그대로 재현하는 일은 장인이 나보다 훨씬 잘할 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이를 지금의 기술과 소재, 감각으로 바꿔보는 것이다. 누군가에게는 파격적으로, 때로는 낯설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자기 시대의 것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변화시킬 때 비로소 지금의 작업이 훗날 새로운 전통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본다.

앞서 말했듯 재료는 시대성을 반영하는 방법 중 하나다. 하지훈 역시 다양한 소재와 제작 방식을 넘나들며 작업해 왔다. 재료를 선택할 때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무엇인가?
재료 자체에 좋고 나쁨이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천연 소재라고 무조건 친환경적이고 플라스틱이라고 무조건 환경에 나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재료를 선택했느냐보다 어떤 방식으로 생산하고 얼마나 오래 사용하도록 설계했느냐다. 플라스틱 소반도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다. 재활용 소재를 사용하고 접착제나 볼트를 쓰지 않는 방식으로 제작해 폐기 이후까지 고려했다. 일회용 포장 용기의 제작 방식도 오래 사용할 수 있는 물건을 만드는 데 적용해 봤다. 일회용품을 만드는 기술 자체가 일회용인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료를 관념적으로 판단하지 않으려 한다. 흔히 좋은 재료라고 여기는 것을 사용했다고 그 자체로 작업의 가치가 높아지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왜 그 재료와 방식을 선택했는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재료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는 시도가 나 같은 디자이너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앞서 디자이너의 역할에 대해 계속 이야기했다. 오늘날 디자이너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나?
지금의 디자이너에게는 클라이언트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을 넘어 작가적 관점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산업 디자이너는 오랫동안 기업이나 클라이언트를 위한 일을 중심으로 해왔다. 그러다 보면 프로젝트나 회사를 떠난 뒤 정작 자기 이름으로 남는 것이 없을 수 있다. 반면 작가는 자신의 작업과 세계를 지속적으로 축적해 나간다. 디자이너 역시 클라이언트 작업과 별개로 자신이 소유하고 지속할 수 있는 작업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작업 영역을 굳이 한정할 필요도 없다. 나 역시 제품을 개발하며 얻은 경험을 공예 작업에 적용하고, 반대로 공예에서 시도한 것을 산업 디자인으로 가져오기도 한다. 디자인과 공예, 예술을 오가며 각각의 경험이 서로 영향을 주는 것이다. 기업과 협업할 때도 가능하면 작업의 권리를 직접 보유해 프로젝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발전시킬 방식을 고민한다. 결국 중요한 것은 디자이너가 자신의 관점과 작업을 계속 축적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야 디자이너라는 직업도 지속성을 지닐 수 있다.

오랫동안 학교에서 학생들을 만나온 만큼 다음 세대 디자이너에 대한 고민도 많을 것 같다. 자라나는 디자이너들이 어떤 태도를 지녔으면 하나?
20년 넘게 학생들을 가르치며 많은 제자를 지켜봤는데, 결국 실력이나 재능보다 중요한 것은 ‘기세’라고 생각하게 됐다. 어떻게 보면 이 역시 ‘막’과 연결된다. 주저하지 않고 일단 시도하고, 실패하더라도 다시 해보며 계속 나아가는 힘이다. 재능이 뛰어나도 어느 순간 작업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는 반면, 끊임없이 시도하며 자기 것을 만들어가는 사람이 있다. 결국 후자가 오래 살아남는다. 내 제자 중 문승지나 김하늘처럼 자기 작업을 꾸준히 밀고 나간 디자이너들이 그런 경우다.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만들어내는 것도 중요하다. 머릿속에 있는 것은 아직 자기 것이 아니다. 글로 남기든 결과물로 만들든 밖으로 꺼내 보여줘야 비로소 자기 것이 된다. 특히 AI로 아이디어를 시각화하는 일이 쉬워질수록 그다음 단계인 구현 능력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그래서 학생들에게도 컴퓨터 안에서 작업을 끝내지 말고 직접 재료를 만지고 무언가를 만들어보게 한다. 생각에 머무르지 않고 실제로 해보는 힘, 그것이 앞으로의 디자이너에게 필요한 기세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