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회화의 정원과 낙원, 조은·이기훈 원화전
그라운드시소 이스트에서 열리는 〈오늘의 정원〉과 〈내일의 낙원〉
그라운드시소 이스트에서 동시대 한국 회화의 두 풍경이 11월 29일까지 펼쳐진다. 조은과 이기훈. 두 작가의 원화전이다.

한지 위에 스며드는 먹과 캔버스 위에 겹겹이 쌓이는 오일파스텔. 쉽게 지우거나 되돌릴 수 없는 재료다. 먹은 번진 자리에 남고, 오일파스텔은 선과 면을 거듭하며 쌓인다. 그라운드시소 이스트에서 7월 17일부터 11월 29일까지 두 개의 원화전이 동시에 열린다. 한국화 작가 조은의 〈오늘의 정원〉과 회화 작가 이기훈의 〈내일의 낙원〉이다. 조은은 일상의 풍경을, 이기훈은 무너진 세계 이후의 풍경을 그린다.


서툰 오늘이 완성하는 풍경
조은 원화전 〈오늘의 정원〉

조은의 시선은 ‘오늘’을 향한다. 동양화가인 아버지 밑에서 자라 한지와 먹을 자연스럽게 다뤄온 그는 수묵의 바탕 위에 아크릴과 구아슈를 덧입히는 방식으로 동시대적인 한국화를 그려왔다. 조은의 그림은 전통 수묵화의 여백보다 도시와 자연, 인물로 화면을 빼곡하게 채운다. 실제로는 한곳에 함께 존재하기 어려운 요소들도 나란히 놓인다. 작가가 바라본 세계를 다시 편집하고 조합한 장면들. 건물 사이에 나무가 자라고, 공원에는 사람들이 머문다. 물가에는 또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그 중심에는 한지와 먹이 있다. 조은은 밑그림 없이 한지 위에 먹을 올리고, 번짐이 만들어내는 우연을 작업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한 번 스며든 먹은 쉽게 되돌릴 수 없지만, 그 흔적을 애써 지우기보다 다음 장면으로 이어간다. 아크릴과 구아슈를 더해 화면의 밀도를 높이는 방식 역시 전통적인 수묵화와는 다른 조은만의 화풍을 만든다.

〈오늘의 정원〉은 그렇게 쌓인 흔적을 ‘정원’에 빗댄다. 지나간 하루 중에는 다시 고치고 싶은 순간도 있고 예상과 다르게 흘러간 일도 있지만, 그 모든 시간이 결국 지금의 나를 만든다는 이야기다. 지우고 싶은 흔적까지도 한데 모이면 고유한 풍경이 될 수 있다. “오늘을 고치려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작가의 말처럼.

전시장도 하나의 산책길처럼 구성했다. 도시의 틈에서 자연을 발견하는 ‘보물 찾기’를 시작으로, 먹의 유연한 곡선을 공간에 반영한 ‘숲의 미로’, 가로 2m급 대작과 루페가 설치된 ‘공중산책’, 관찰 일지를 작성하는 ‘나의 정원’, 색채를 비워낸 흑백 공간 ‘묵분오색’으로 이어진다. 신작 30점을 포함해 80여 점의 원화를 만날 수 있으며, 전시장에 흐르는 새소리와 물소리 등 자연의 앰비언스 사운드가 실제 숲을 걷는 듯한 감각을 더한다.
무너진 세계 속 남은 희망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

조은이 지나온 시간을 담는다면, 이기훈은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바라본다. 동화책 작가로 시작해 볼로냐 국제아동도서전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 선정 등 국내외에서 주목받아온 그는 대홍수 설화를 현대적인 서사로 가져와 인간과 자연, 생명과 공존을 이야기한다.

화면에는 동물 가면을 쓴 아이들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아이들은 서로를 밧줄로 연결하고, 작은 생명을 품에 안고, 어둠 속에서는 불씨를 들어 올린다. 재난 그 자체보다 무너진 세계에서 생명을 돌보고 서로를 지키는 모습에 초점을 맞춘다. 이기훈이 그리는 세계는 얼핏 디스토피아처럼 보이지만, 이야기가 향하는 곳은 파멸이 아니다. 무너진 세계에서도 끝내 남는 생명과 연대, 그리고 희망이다.


작업 방식 역시 시간을 물리적으로 쌓아 올리는 과정이 동반된다. 작가는 수채화와 한국 전통 잉크 위에 오일파스텔을 겹겹이 쌓아 밀도 높은 그림을 완성한다. 오래 바라보고 가까이 다가갈수록 선과 면의 축적이 눈에 들어온다. 디지털 이미지에서는 느끼기 어려운 손끝의 압력과 온기가 화면에 남아 있다.

신작 30점을 포함해 총 60여 점의 원화는 책 한 권을 넘기듯 펼쳐진다. 빛바랜 기록 같은 ‘제0장: 반복되는 이야기’에서 시작해 ‘가면과 아이들’, ‘이어지는 희망’, ‘빛이 이끄는 길’, ‘세상의 끝에서’를 지나 마지막 ‘부록: 누미노제’에 닿는다. 가면을 쓴 아이들, 서로를 잇는 밧줄, 피어오르는 불씨를 따라가다 보면 재난의 풍경은 어느새 생명에 대한 이야기로 바뀐다. ‘누미노제’는 설명하기 어려운 신비와 경외감을 뜻한다. 모든 것이 무너진 자리에서 오히려 선명해지는 장면을 통해, 작가는 우리가 무엇을 낙원이라 부를 수 있는지 되묻는다.
오늘과 내일 사이에서

두 전시는 대칭을 이룬다. 조은은 한지와 먹으로 번짐의 순간을 화면에 펼쳐 보이고, 이기훈은 오일파스텔을 겹겹이 쌓아 시간의 서사를 만든다. 사소한 일상의 풍경과 신화적 규모의 세계가 한 공간에 놓인다. 그러나 두 작가가 현실을 바라보는 방식에는 닮은 점이 있다. 완벽하지 않은 현실을 지워버리기보다, 이미 남아 있는 흔적과 생명의 온기를 바라본다.

서툰 오늘도 모이면 정원이 되고, 무너진 내일 속에서도 끝내 지켜낸 온기가 있다면 낙원이 된다. 상반된 두 풍경은 같은 질문을 남긴다. 우리는 오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떤 내일을 그려갈 것인가. 전시는 11월 29일까지 이어진다.
〈조은 원화전: 오늘의 정원〉& 〈이기훈 원화전: 내일의 낙원〉
주소 서울시 중구 광진구 아차산로402 이스트폴 2층, 그라운드시소 이스트
기간 2026년 7월 17일 – 11월 29일
운영 시간 매일 10:00 – 19:00
홈페이지 그라운드시소
인스타그램 @groundseesa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