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헤리티지의 실험가들 ③] 파종하는 민요 실험가, 이희문

월간 〈디자인〉 Vol.579 | Special Feature

경기소리꾼 이희문에게는 언제나 파격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하지만 그는 결코 전통을 놓치지 않는다.

[K-헤리티지의 실험가들 ③] 파종하는 민요 실험가, 이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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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소리꾼이며 이희문컴퍼니 대표이자 예술감독.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이수자로, 제16회 전국민요경창대회 종합 부문 대통령상, 2015 문화예술발전유공자 포상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2021 서울시 문화상 국악 부문 등을 수상했다. 지난해에는 국립극장 여우락 페스티벌 예술감독을 맡았다. @leeheemoon.official

이희문에게 민요는 ‘공기처럼 늘 주변에 있던 것’이었다. 어머니 고주랑 명창의 소리가 그의 유년 시절을 채웠으니 “어머니가 민요요, 민요가 곧 어머니”라는 그의 말도 이해가 간다. 하지만 단순히 익숙함에 이끌려 소리꾼이 된 것은 아니다. 어머니는 아들이 힘든 소리꾼의 길을 걷기를 원치 않았고, 그 역시 민요보다 영상에 더 눈길이 가던 시기가 있었다. 영상 연출을 공부하러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뒤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일하던 그가 진로를 바꾼 데에는 어머니와 동문수학한 이춘희 명창의 권유가 결정적이었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며 “마치 누군가 내게 민요를 해도 된다고 말해주기를 바랐나 싶을 정도로 권유를 받는 순간 마음에 파문이 일었다”라고 말했다. 남성 경기민요 소리꾼이 드물던 시대,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이미 여성의 음역과 활동 방식에 맞춰진 판에 뒤늦게 뛰어든 그는 자연스럽게 ‘별종’이 됐다. 소리 자체는 좋았지만 전통 예술계의 위계와 규율이 숨 막혔다.


이런 가운데 현대무용가 안은미와의 만남은 전환점이 됐다. 안은미의 작품 〈바리공주〉 오디션에 참가해 중성적인 음색과 이미지 덕에 바리공주 역을 맡았다. 이후 약 10년간 해외 투어를 함께하며 움직이면서 노래하는 법을 익혔다. 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창작의 방식을 배웠다는 점이다. 안은미가 작품을 만들 때 음악가뿐 아니라 미술가와 개념이나 이미지를 논의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무대는 음악을 올려놓는 그릇이 아니라 음악, 몸, 시각의 총체임을 깨달았다. 이후 이희문의 작업 방식에는 이때 얻은 감각이 선명하게 남았다. 국악 작곡가 이태원, 대중에게 이날치의 프로듀서로 잘 알려진 장영규 등과 어우러지며 새로운 환경에 자신의 민요를 입혔다.

2017년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에 출연한 씽씽. 미국의 공영방송 NPR이 제작하는 콘서트 영상 시리즈로, 제한된 공간에서 라이브 음악을 선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난봉가’와 민요 메들리를 불러 세계적인 관심을 끌었다.

그 과정에서 탄생한 결과물 중 하나가 프로젝트 그룹 씽씽이다. 경기민요와 록, 팝의 감각을 거칠게 뒤섞고 젠더의 경계를 흔드는 강렬한 의상과 퍼포먼스를 앞세워 점잖고 권위적인 전통의 이미지를 단숨에 무너뜨렸다. 이희문의 표현을 빌리면 “전통음악의 선생님 같은 이미지를 B급으로 낮춘” 셈이다. 적당히 변형했다면 논쟁이 됐을 테지만 그는 선을 멀찍이 넘어버렸다. 욕조차 할 수도 없을 만큼 틀을 깨자 오히려 대중은 열광했다. 씽씽 해체 이후에도 그의 실험은 계속됐다. 다른 장르와의 이종 교배로 민요의 외연을 넓히는 한편 무대, 의상, 조명 등을 파격적이면서도 섬세하게 설계해 강렬함을 더했다.

‘어랑브루지’ 뮤직비디오. 뮤직비디오 조감독으로 일한 경험이 있는 이희문은 시각 문법을 잘 이해하는 창작자다. 이희문 프로젝트 ‘오방신과(OBSG)’의 이 곡은 ‘어랑타령’을 재즈적으로 재해석했다. 1970~1980년대를 풍미한 글램룩을 재현해 블루지한 느낌을 살렸고, 크로마키 기술을 접목한 영상으로 음악의 분위기를 독창적으로 전달했다. 총괄 프로듀서 우상희
2024년 ‘오방신과’로 다시 한번 타이니 데스크 콘서트 콘셉트의 영상을 촬영했다. ‘어허구자’, ‘싫은 민요’, ‘나리소사’ 등을 부른 이 영상도 화제가 됐다.

지난해 그가 예술감독을 맡은 여우락 페스티벌은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 자리였다. 단순히 프로그램의 라인업을 짜는 데 그치지 않고 무대 디자인과 조명, 출연자의 의상과 콘셉트까지 관여했다. 무대를 미니멀하게 만들고 무대 위 뮤지션과 퍼포머가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음악인을 넘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서 역량을 발휘한 것이다. 총 12개 프로그램 가운데 세 공연은 직접 연출하며 전통을 다른 방식으로 보여주는 실험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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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여우락 페스티벌. 예술감독으로서 무대 디자인, 조명, 출연자의 의상과 콘셉트까지 직접 구상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다운 면모를 보였다. 자료 제공 국립극장

그렇다고 이희문이 파격만 좇는 사람은 아니다. “전통을 제일 좋아하고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걸 잘하기 때문에 이런 시도도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은 그의 실험을 이해하는 중요한 열쇠다. 실제로 그는 한편으로 새로움을, 다른 한편으로 전통의 원형을 전하는 무대에 서는 투 트랙 전략을 구사한다. 가지는 최대한 멀리 뻗되 가능한 한 땅속 깊이 뿌리 내리고자 하는 시도다. 일견 상반돼 보이는 이러한 행보가 가능한 배경에는 민요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는 그의 시선이 있다. 그는 전통을 고정된 원형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민요는 본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졌고, 시대와 지역을 건너며 끊임없이 변했다. 제도화된 ‘전통’이 오히려 특정한 계보와 양식을 표준으로 만들며 그 바깥의 다양성을 지워버렸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런 점에서 이희문의 실험은 전통이 본래 지녔던 유동성을 복원하는 일에 가깝다고도 볼 수 있다.

GMV 프로젝트: 설렘, 소춘향가 2018’. 이희문은 춘향과 몽룡의 만남으로 인한 설렘을 2018년 새해를 맞이하는 설렘으로 표현했다. 디자이너 안상수(날개)가 영상을 기획하고 스타일리스트 서영희와 57Studio가 공동 작업해 관심을 모았다.

그는 민요가 대중가요처럼 다시 모두의 음악이 되리라 기대하지 않는다. 오히려 ‘틈새시장이 있는 장르 음악’이 되기를 바란다. 거대한 대중성보다 깊이 좋아하는 소수의 귀, 자신만의 취향을 끝까지 파고드는 사람을 믿는 것이다. 그래서 이희문이 중요하게 여기는 단어는 ‘혁신’보다 뜻밖에도 ‘지구력’이다. 흔들림 없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을 계속 좋아할 수 있는 힘이 중요하다는 뜻. 그에게 사명감을 묻자 “여러 가지 샘플을 많이 만들어놓고 갔으면 좋겠다”라는 답이 돌아왔다. 과실을 수확하는 것은 후대의 몫으로 돌리고 민요로 할 수 있는 다양한 실험을 선례로 남기겠다는 의미다.

뮤직 필름 ‘낯선 반가움’ 1편. 환경, 인간, 상호 소통을 주제로 경기민요의 대표곡을 회차별로 구성한 3부작 영상 필름이다. 1편은 간결한 구성으로 자연의 소리와 경기민요의 조화, 미학, 소통을 보여줬다. 총괄 기획 이지연 제작 이원아트컴퍼니 후원 문화체육관광부,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온라인미디어예술활동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헤리티지를 동시대적으로 다루는 가장 건강한 태도인지도 모른다. 오래된 것을 유리 진열장 안에 보존하는 대신 다시 사용하고, 다른 것과 충돌시키고, 때로는 섹시하고 낯선 모습으로 변형해 보는 것. 이희문에게 전통은 과거의 형식이 아니라 끊임없이 새 버전을 만들어낼 수 있는 소스 코드에 가깝다. 그는 그 코드에 누구보다 능숙한 사용자이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면으로 전환하는 디렉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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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사진 윤선웅(에스플러스튜디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9호(2026.09)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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