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티지의 실험가들] 나까지 전통일 필요는 없다, 유남권
월간 〈디자인〉 Vol.579 | Special Feature
유남권은 전통 옻칠의 기본기를 바탕으로 색과 소재, 형태와 공간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옻칠의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한다. 전통을 지키는 데 머무르지 않고 동시대의 쓰임을 끊임없이 찾아가는 그의 작업을 들여다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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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계승하는 사람은 얼마나 전통적이어야 할까? 옻칠 작가 유남권은 이 질문에 조금 의외의 답을 내놓는다. “전통에서 이어져 내려온 옻칠을 다루고 있지만, 굳이 나까지 전통적일 필요는 없다.” 얼핏 전통과 거리를 두는 말처럼 들리지만 그의 이력을 살펴보면 오히려 정반대다.
중학생 시절부터 동양화를 익힌 그는 일찍이 한국적인 색채를 지닌 작업에 관심이 많았다. 대학에서도 동양화를 전공했지만 자신만의 길을 찾기 위해 한복과 단청 등 전통문화의 여러 영역을 기웃거렸고, 그러다 옻칠을 만났다. 대학 재학 중에는 옻칠장 박강용을 찾아가 약 1년 반 동안 공방에 머물며 도제식으로 옻칠의 기본기를 익혔다. 이후에도 서울과 남원을 오가며 스승 곁에서 작업을 이어갔다. 그렇게 전통의 안쪽에서 익힌 기술은 훗날 자신만의 방식으로 옻칠을 변주할 수 있는 기반이 됐다. “전통을 변주하려면 코어가 탄탄해야 한다. 그래야 무엇을 넣어도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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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유남권은 자신이 익힌 전통을 작업에서 어떻게 풀어낼까. 먼저 옻칠을 바라보는 관점부터 달리 했다. 전통 옻칠에서는 여러 번 칠하고 갈아내 매끈한 표면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는 옻을 ‘오래전부터 존재해 온 하나의 도료’로 바라보면서 완벽하게 정돈된 표면에서 벗어났다. 옻이 흐르고 겹치며 생기는 흔적과 결을 감추기보다 하나의 표현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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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태도는 그의 대표적인 작업 방식인 지태칠기에서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흥미롭게도 처음에는 오랫동안 동양화를 해온 탓에 종이와 한지를 의도적으로 멀리했다. 과거의 작업으로 되돌아가는 듯한 느낌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연히 한지에 옻칠할 기회가 생기면서 생각이 달라졌다. 옻을 먹처럼 사용해 농담을 만들고, 동양화에서 익힌 배접 기법을 접목하면서 한때 벗어나고 싶었던 경험이 오히려 자신만의 옻칠을 만드는 자산으로 돌아왔다.
변주는 색과 소재에서도 이어졌다. 스승의 공방에는 이미 다양한 색의 옻이 있었지만 전통적인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이유로 좀처럼 사용하지 않았다. 하지만 유남권은 노랑과 보라 등 다채로운 색을 적극적으로 사용했고, 2014년에는 ‘옻칠 색잔’을 선보였다. 옻칠의 바탕 역시 반드시 원목일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칠뿐 아니라 기물 자체를 이해하고 싶어 대학원에서 가구 디자인을 공부하며 합판과 피스 등 현대적인 제작 방식을 접했고, 이후 합판을 비롯한 다양한 소재를 작업에 활용했다. “많은 이들이 합판 같은 데 옻칠을 하면 아깝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버려야 한다. 옻칠도 결국 하나의 도료다. 더 다양한 소재와 방식에 적용해야 쓰임도 넓어지고 계속 이어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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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업의 크기도 점차 커졌다. 생활 기물과 가구를 넘어 벽과 공간으로 옻칠 범위를 확장하며 이제는 전시장에 작품을 어떻게 배치할지가 아니라, 공간 자체를 어떻게 옻칠로 구성할지를 고민한다. 전통 재료와 기술은 그대로지만, 그것을 사용하는 방식과 대상에는 굳이 전통이라는 울타리를 두를 필요가 없는 셈이다. 이러한 실험은 외부에서도 주목받았다. 2022년 유남권은 ‘예올이 뽑은 올해의 젊은 공예인’에 선정돼 예올×샤넬 프로젝트 전시 〈반짝거림의 깊이에 관하여〉에 참여했다. 예올은 그의 작업을 두고 “거친 질감 위로 옻칠이 스며들고 겹치는 과정을 반복하면서 작가만의 ‘겹’을 쌓아간다”고 평했다.
유남권이 이처럼 끊임없이 새로운 시도를 이어가는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하나는 주변 사람의 존재다. 새로운 소재와 기술을 실험하는 동료 작가와 디자이너를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의 시야도 자연스럽게 넓어졌다고 말한다. “주변에 계속 새로운 걸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을 보면서 나도 자극을 받고, 옻칠로 또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하게 된다.”
![[헤리티지의 실험가들] 나까지 전통일 필요는 없다, 유남권 5 20260826064145 IMGL0067](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8/26154156/20260826064145-IMGL0067-832x1247.jpg)
또 하나는 옻칠이 과거의 기술에 머물지 않고 앞으로도 계속 쓰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유남권은 지금도 스승 박강용이 직접 정제한 옻을 사용하고, 남원의 장인들과 함께 동시대 가구와 오브제에 전통 옻칠을 적용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프로젝트를 이어가고 있다. 그에게 새로운 쓰임을 찾는 일은 결국 전통을 지속하는 방법이기도 하다. “이런 전통이 개인의 노력만으로 이어지기는 어렵다. 기업이나 국가 차원의 관심과 후원이 필요하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이 재료로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를 계속 보여주는 것이다.” 유남권의 실험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스페인과 한남동에서 열리는 개인전을 통해서도 지금까지 확장해 온 옻칠의 새로운 면모를 선보일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