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만드는 디자인 ①] 사물이 아닌 지각을 디자인하다
월간 〈디자인〉 Vol.580 | Special Feature 2
앞으로 50년, 디자인은 무엇을 만들고 누구를 위해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게 될까? 월간 〈디자인〉은 창간 50주년을 맞아 아직 작고 희미하지만 서로 연결되기 시작한 변화들을 모아 앞으로의 디자인을 그려볼 몇 가지 흐름을 제시한다.

시각 중심 디자인에서 벗어나 소리와 향, 맛, 촉감까지 아우르는 멀티센서리 디자인은 이제 익숙한 개념이다. 실제로 미각, 후각, 청각 등 특정 감각을 자신만의 창작 언어로 삼는 디자이너도 적지 않다. 최근 눈여겨볼 것은 각각의 감각을 디자인하는 데서 한발 더 나아가 여러 감각이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만들어내는 ‘지각’ 자체를 적극적으로 다루는 시도다. 디자이너의 손이 사물의 형태를 넘어 우리가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에까지 닿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지각은 어떻게 새롭게 디자인될까? 미각부터 생각해 보자. 우리가 느끼는 맛은 혀에 닿는 음식만으로 결정되지 않는다. 눈으로 본 색과 형태, 코로 맡은 향, 귀로 들은 소리 같은 정보가 함께 작용해 하나의 맛을 만든다. 감각을 바꾸면 같은 음식도 다른 맛이 난다는 뜻이다. 센서리 푸드 디자이너 라일라 스네벨레가 이끄는 센소버스Sensoverse의 ‘피지털 시즈닝’은 이 원리를 디자인의 영역으로 끌어들였다. 애플 비전 프로를 착용한 참가자가 똑같은 음식을 먹으면서 서로 다른 색과 빛, 소리와 향으로 구성된 가상 환경을 경험한다. 음식의 성분은 그대로지만 주변의 감각적 조건이 달라지면서 맛에 대한 지각 역시 변한다.
![[미래를 만드는 디자인 ①] 사물이 아닌 지각을 디자인하다 1 20260930063759 Phygital Seasoning ai image Laila Snevele](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9/30153805/20260930063759-Phygital-Seasoning-ai-image-Laila-Snevele-832x590.jpg)
스네벨레는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모노 프로덕트’라는 미래 식품 시스템을 제안한다. 요구르트나 탄산음료, 과자처럼 하나의 식품을 여러 가지 맛으로 생산하는 대신 영양적으로 최적화된 하나의 기본 제품을 만들고, 각자가 원하는 맛을 빛과 소리, 색과 향을 이용해 디지털로 ‘시즈닝’하는 것이다. 하나의 음식이 사람과 상황에 따라 무수한 맛으로 변한다면 맛의 다양성을 위해 수많은 제품을 생산할 일도 줄어든다. 스네벨레는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사람들이 감각을 받아들이는 ‘지각의 패턴’이 새로운 디자인 재료라고 말한다. 맛을 만드는 대상이 음식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의 지각으로 옮겨간 것이다. 조미료가 음식이 아닌 우리의 지각에 뿌려지는 셈이다.
하나의 경험을 다른 감각으로 번역하는 것 역시 지각을 새롭게 디자인하는 방법이다. 눈에 보이지도, 냄새가 나지도 않는 개인의 기억과 이야기에 향을 입힌다면 어떨까? 에브리휴먼의 ‘알고리드믹 퍼퓨머리’는 예술가이자 테크놀로지스트인 프레데릭 뒤랭크와 향 디자이너 아나히타 메카닉이 참여형 설치로 시작한 프로젝트다. 사용자가 AI와 상호작용하며 자신의 기억과 상상, 취향과 정체성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주면 알고리즘이 이를 해석해 향으로 조합한다. 말하자면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코로 맡아보는 셈이다. 본래 냄새가 없는 개인의 경험과 언어를 후각으로 치환해, 익숙한 기억과 정체성을 전혀 다른 방식으로 지각하게 한다.
![[미래를 만드는 디자인 ①] 사물이 아닌 지각을 디자인하다 2 20260930054159 Machine Dubai 2 300ppi](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9/30144201/20260930054159-Machine-Dubai-2-300ppi-832x554.jpg)
한편 소리는 형태가 없고 공간을 따라 퍼진다는 점에서 다른 감각이나 환경과 유연하게 결합할 수 있는 재료다. 필립 스튜디오의 ‘택타일 오케스트라’는 청각과 촉각을 결합한 작업이다. 털로 뒤덮인 벽을 손으로 쓰다듬으면 만지는 위치와 압력, 움직임에 따라 오케스트라 소리가 흘러나오고, 여러 사람이 동시에 참여하면 각자의 움직임이 서로 다른 소리를 만들어 하나의 음악으로 겹쳐진다. 소리를 듣는 수동적인 경험에서 벗어나, 손으로 만지고 움직이며 음악을 만드는 감각적 경험으로 확장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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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가 소리는 공간을 새롭게 지각하는 장치가 되기도 한다. 이런 실험은 사운드 아티스트이자 디자이너인 유리 스즈키의 주특기다. 대표적으로 방콕의 원 방콕One Bangkok에 설치한 ‘메트로폴리탄 심포니’가 있다. 두 점의 사운드 조각은 주변의 도시 소리와 관람객의 목소리를 수집해 생성형 소프트웨어로 실시간 변환하고, 이를 다시 음악으로 들려준다. 유리 스즈키는 이를 위해 방콕 곳곳에서 180개의 사운드 샘플을 수집했으며, 작품에 말을 건 사람의 목소리는 이 소리들과 뒤섞여 매번 다른 음악이 된다. 두 조각은 서로 소리를 주고받으며 장소 전체에 하나의 사운드스케이프를 형성한다. 도시의 소음을 제거하거나 다른 음악으로 덮는 대신, 그곳에서 발생하는 소리 자체를 재료로 삼아 익숙한 공간을 새롭게 듣게 하는 것이다.
![[미래를 만드는 디자인 ①] 사물이 아닌 지각을 디자인하다 4 20260930054600 20260930 054600](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9/30144604/20260930054600-20260930_054600-832x1248.jpg)
그런데 감각은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다른 생명체는 인간이 감지하지 못하는 미세한 전자기장이나 진동, 분자의 흔적까지 포착하며 저마다 다른 감각의 세계를 살아간다. 최근에는 다른 종의 감각을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형태로 번역하려는 시도도 나타나고 있다. 매튜 C. 윌슨과 에밀리아 타프레스트가 진행한 ‘Interspecies Interfaces’가 흥미로운 사례다. 두 사람은 감각 증강 기술과 AI를 매개로 인간과 다른 종의 지각 세계가 만날 가능성을 탐색한다. 첫 번째 작업 ‘Into the Endless Night’에서는 감각 체계가 서로 다른 인간과 박쥐, 기술 사이의 새로운 접점을 상상했으며, 두 번째 작업 ‘Shape of Language’에서는 다른 종을 이해하는 방법 자체를 질문한다.
![[미래를 만드는 디자인 ①] 사물이 아닌 지각을 디자인하다 5 20260930055127 Shape of Language 3](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9/30145131/20260930055127-Shape_of_Language-3-832x468.jpg)
![[미래를 만드는 디자인 ①] 사물이 아닌 지각을 디자인하다 6 20260930055127 Shape of Language 5](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9/30145131/20260930055127-Shape_of_Language-5-832x468.jpg)
특히 ‘Shape of Language’는 AI로 동물의 의사 소통을 인간의 언어로 ‘해독’하려는 접근에서 벗어나, 그들이 세계를 지각하는 방식을 인간이 감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상상한다. 영상은 8마리 과일박쥐의 집단적 인지를 연구하는 가상의 연구 팀을 따라가고, 전시장에서는 실제 박쥐의 초음파 녹음을 변형한 사운드와 신경 데이터를 표현하는 디스플레이 등으로 인간과 박쥐의 서로 다른 지각 방식을 드러낸다. 다른 종을 이해한다는 것은 그들의 말을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들이 감각하는 세계에 잠시 접속하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제안이다. 이렇듯 세계에는 우리가 아직 감각하지 못하는 수많은 경험이 존재한다. 디자이너가 다룰 수 있는 것이 사물에서 지각으로 확장될수록 디자인이 우리에게 보여줄 수 있는 세계 역시 더 넓어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