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대문극장의 제2막

오랫동안 쓰임을 잃고 방치되었던 남대문극장이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과거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상영하던 공간은 이제 전시와 출판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동시대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남대문극장의 제2막

오늘날 영화관이 몇몇 대형 멀티플렉스 브랜드로 수렴한 것과 달리, 불과 몇십년 전만 해도 한국의 극장은 저마다 다른 간판을 내걸고 있었다. 1959년 남대문시장 초입에 문을 연 남대문극장도 그중 하나다. 작은 건물 한 동을 오롯이 차지한 이 극장은 비주류 영화를 상영하며 관객을 맞이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이 극장의 불빛도 서서히 꺼져갔다. 그렇게 오랫동안 쓰임을 잃고 방치되었던 건물이 올해 복합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했다. 이름과 장소는 그대로지만 그 안의 풍경은 사뭇 달라졌다. 과거 스크린을 통해 영화를 상영하던 공간은 이제 전시와 출판을 비롯한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으로 동시대의 이야기를 펼쳐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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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 리더보드를 한글로 재해석한 로테크 하이파이 간판. 사진 정희승

새롭게 문을 연 남대문극장과 그 안에 자리한 서점 ‘로테크 하이파이’의 그래픽 디자인은 모두 워크룸이 맡았다. 두 공간 모두 고정된 정체성을 드러내기보다 변화하는 콘텐츠를 유연하게 담아내는 데 방점을 두었다. 남대문극장의 사이니지는 실제 목활자에서 수집한 글자 이미지를 바탕으로 제작했다. 공간 곳곳에 설치한 알루미늄 프레임 사이니지는 액자처럼 이미지를 갈아 끼울 수 있는 구조로, 새로운 프로그램이 시작될 때마다 그 안의 내용도 달라진다. 극장의 상영작이 바뀌듯 일정 기간마다 새로운 기획을 선보이는 남대문극장의 운영 방식을 시각적으로 구현한 것이다.

서점 역시 이러한 철학을 공유한다. 로테크 하이파이라는 이름에는 낮은 기술(로테크)로 만든 물건이 오히려 높은 해상도(하이파이)로 세계를 담아낼 수 있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종이와 잉크라는 단순한 재료로 무한한 이야기와 지식을 담아내는 책의 가능성에 주목한 것이다. 남대문극장이 새로운 프로그램으로 관객을 맞이하듯, 서점도 주기적으로 큐레이션을 바꾸며 매번 새로운 책의 세계를 펼쳐 보인다. 서점 간판에도 같은 원리를 적용했다. 슬기와 민이 디자인한 탈네모틀 한글 서체 ‘원형체’의 자모를 정사각형 모듈에 각각 배치해 필요에 따라 글자를 갈아 끼울 수 있도록 했다. 영화관에서 상영작을 알리는 리더보드를 한글로 재해석한 디자인으로, 극장의 옛 정체성을 계승하면서도 끊임없이 변화하는 공간의 특성을 담아냈다. 프레임이 만드는 그림자를 고려해 자모를 원래 크기의 90%로 줄이는 등 세부적인 완성도에도 공을 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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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문학이라는 세계〉 전시 풍경. 서로 다른 시대의 출판 문화를 보여준다.

한편 지금 남대문극장에서 열리고 있는 〈세계문학이라는 세계〉전은 이 공간의 지향점을 가늠할 수 있는 개관전이라는 점에서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정 기간 수집한 세계문학 총서를 전체 발간 규모에 따라 10권, 30권, 50권, 100권으로 구분해 선보이는데, 이는 단순히 책의 수량을 비교하려는 것이 아니다. 총서의 규모를 통해 출판사가 구상한 문학의 범위와 편집자의 시대 인식, 책을 소장하고 읽는 환경까지 들여다보려는 시도다. 책 내용뿐 아니라 분류와 수납 방식, 표지 디자인과 시각 언어, 문학의 창작과 향유를 둘러싼 다양한 조건을 함께 조명한다는 점도 흥미롭다. 오래된 극장의 기억을 오늘날의 방식으로 재해석한 남대문극장은 앞으로도 다양한 기획으로 공간의 쓰임을 확장해 나갈 예정이다. 이곳에서 펼쳐질 제2막을 기대해봄 직한 이유다.

남대문극장 & 로테크 하이파이
주소
서울시 중구 남대문시장길 25-8
그래픽 디자인 워크룸, workroom.kr
건축 설계 조현석, johyunseok.kr
인스타그램 @namdaemuntheater

〈세계문학이라는 세계〉전
기간
9월 18일~12월 31일
주소 서울시 중구 남대문시장길 25-8 남대문극장 3~4층
기획 남대문극장, 윤율리, 워크룸 프레스
참여 작가 강주홍, 김승일, 김유자 등 14명
그래픽 디자인 워크룸 프레스, workroompress.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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