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암미술관으로 무대를 옮긴 2026 아트스펙트럼

2001년 국내 신진 작가를 발굴하기 위해 출범한 아트스펙트럼이 25년 만에 호암미술관으로 무대를 옮기며 변화의 의지를 드러냈다. 제도적 관습에서 벗어나 전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호암미술관으로 무대를 옮긴 2026 아트스펙트럼

‘방이있고모든라디오가각기다른주파수를향하고있다’. 띄어쓰기 없이 줄줄이 이어진 전시 제목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9월 1일 막을 올린 이 전시는 아트스펙트럼이 25년의 궤적 위에서 선보이는 새로운 시도다. 국내 신진 작가 발굴과 지원을 위해 2001년 출범한 아트스펙트럼은 2024년부터 참여 작가의 범위를 아시아로 확대하며 새로운 방향을 모색해 왔다. 올해는 전시 장소까지 호암미술관으로 옮기며 변화의 의지를 한층 선명히 드러냈다. 서울 중심부의 리움미술관을 벗어나는 데 적잖은 고민이 따랐을 터. 거리도 거리지만, 호암미술관의 엄숙하고 정제된 분위기도 부담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게다가 이번 전시는 호암미술관이 개관 이래 처음 선보이는 신진 작가전이다. 이 같은 부담에도 새로운 무대를 택한 것은 기관 프로그램이 지닌 제도적 관습에서 벗어나 전시의 가능성을 실험하려는 시도로 읽힌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 현대미술 기관 팔레 드 도쿄(Palais de Tokyo)와 공동 기획했다. 장르를 넘나드는 예술적 실험을 적극적으로 지원해 온 팔레 드 도쿄의 태도는 아트스펙트럼에서도 그대로 묻어난다. 아시아의 신진 작가를 조명한다는 큰 틀 아래 회화, 조각, 영화, 건축, 디자인, 패션, 출판에 이르기까지 각기 다른 영역의 창작자를 한자리에 모았다. 하나의 주제와 방향으로 수렴하기보다 각자의 실천이 교차하고 충돌하는 지점에 주목하는 것이 이번 전시의 의도다. 이를 은유한 개념이 전시 제목에 등장하는 ‘주파수’다. 여러 주파수가 한 공간에서 겹치고 맴돌듯, 저마다의 목소리를 지닌 작품들이 서로의 경계를 넘나들며 예기치 않은 관계를 만들어낸다는 의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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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도시·웨이팅룸, ‘교우’, 2026. 수년간 국경을 넘어 커뮤니티를 형성해 온 두 팀은 이번 전시를 위한 아트숍을 마련했다. 사진 김연제 ©호암미술관

전통적인 미술관에서 좀처럼 접하기 힘든 장르를 다루는 만큼 이를 전시장 안에 어떻게 끌어들일지 고민한 흔적도 곳곳에서 엿보였다. 미술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인포데스크는 한국의 아티스트 컬렉티브 신도시와 대만 편집숍 웨이팅룸의 작품이다. 대만의 그라피티 아티스트를 초청해 벽에 그림을 그리고 아트숍에서 서브컬처 굿즈를 판매하는 일까지 작업의 일부로 삼았다. 패션 브랜드 할로미늄은 전시장 가이드를 위한 새로운 유니폼을 디자인했고, 요코야마 유이치의 작품을 미술관 외벽과 셔틀버스에 래핑해 전시를 이동하는 풍경으로 확장했다. 한편 음악 버스 투어, 요리 워크숍, 토크 프로그램 등 전시의 외연을 넓히는 다양한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지배적인 주파수도, 최종 송신 지점도 없는 이곳에서 관람객은 저마다의 신호를 포착한다. 통제와 예측을 벗어난 다성적 장에서 무엇을 감지할지는 온전히 관객의 몫으로 남는다.


Intervie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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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효경 리움·호암미술관 큐레이터, 위고 비트라니(Hugo Vitrani) 팔레 드 도쿄 큐레이터
아트스펙트럼은 신진 작가를 발굴·지원하는 현대미술 전시다. 이 프로그램이 호암미술관으로 무대를 옮겼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전효경 매번 리움미술관에서 아트스펙트럼을 열다 보니 새로운 환경에서 전시를 선보일 필요가 있다는 내부 논의가 단초가 되었다. 동시에 호암미술관의 전통적 이미지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객을 끌어들일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호암미술관은 실내뿐 아니라 야외까지 폭넓게 활용할 수 있어 매력적이다. 이번 전시에서는 안팎의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어느 때보다 생동감 있는 모습을 보이고자 했다.

팔레 드 도쿄가 이번 전시에 참여하게 된 배경이 궁금하다.

비트라니 팔레 드 도쿄가 개관한 이듬해 아트스펙트럼이 시작됐다. 우리도 실험적인 동시대 미술과 신진 작가를 지원하는 데 관심이 많기 때문에 비슷한 행보를 보이는 아트스펙트럼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팔레 드 도쿄는 아시아 미술계와 활발하게 교류해 왔는데, 작년부터 아트스펙트럼이 한국을 넘어 아시아 전반으로 시야를 넓히면서 자연스럽게 협업할 계기가 마련됐다. 더욱이 올해는 서울을 벗어나 새로운 장소로 옮긴다고 하니, 아트스펙트럼의 제2막을 함께 써내려갈 수 있다는 점에서 흥미로운 도전이 될 것 같았다.

전시의 지리적 범위를 아시아로 설정하는 것 자체가 자칫 아시아를 하나의 정체성으로 환원할 위험이 있다. 이를 어떻게 경계했나?

비트라니 기획의 첫 단추를 끼울 때부터 그 위험을 인지하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아시아 미술을 정의하려는 의도도, 야심도 없었다. 오히려 서로 다른 예술적 실천을 하나로 묶기 위해 인위적인 틀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데 모든 큐레이터가 동의했다. 현장 조사가 필요할 때는 함께 방문하고, 참여 작가도 다 같이 논의해 선정했다. 작품의 의미를 섣불리 규정하지 않도록 전시의 소주제도 구분하지 않았다. 대신 모든 작품이 주파수처럼 공명하도록 했다. 주파수가 겹치고 충돌하며 역학 관계를 만들듯 이번 전시에서는 서로 다른 작품을 한자리에 모아 자연스럽게 관계가 드러나도록 했다.
전효경 이브라힘 메이테 시켈리(Ibrahim Meïté Sikely)의 작업을 이번 전시에 포함시킨 것도 많은 고민 끝에 내린 결정이다. 시켈리는 세네갈계 프랑스 작가지만 서울에서 회화를 공부하면서 아시아와 한국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이처럼 디아스포라적 맥락에서 활동하는 작가를 아우르는 것 역시 이번 전시의 중요한 방향이었다. 서로 다른 문화와 역사가 교차하는 지점을 드러내면서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정치적 지평을 넓히고자 했다.

익숙한 미술사 범주 밖에 있던 매체와 인물을 전시장 안으로 끌어들인 점이 눈에 띈다.

비트라니 미술의 역사에 비하면 미술관 역사는 지극히 짧다. 미술관은 벽과 좌대를 세워 작품을 진열하는 한편, 그 바깥의 것들은 보이지 않게 만들며 주변부로 밀어내기도 했다. 그래서 이번 전시에서는 미술관이 만들어온 범주와 경계를 넘어 다양한 언어와 실천을 연결하는 것이 중요했다. 영화, 퍼포먼스, 음악, 독립 출판, 패션, 건축까지 폭넓게 아우른 이유다.
전효경 시각예술의 범주를 넘어 다양한 매체를 다루기로 하면서 각 장르에서 주목할 만한 동시대 창작자를 함께 연구했다. 이들의 작업을 미술관의 맥락 안에서 어떻게 보여줄지도 중요한 고민이었다. 예컨대 패션 디자인의 경우 옷을 진열하는 대신 전시장 가이드의 유니폼을 바꾸는 방식을 택했다. 국내 브랜드 할로미늄을 초대해 익숙한 유니폼 형식을 낯설게 변주하고, 가이드와 관람객이 서로를 대하는 방식이 어떻게 달라지는지 실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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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코어, ‘타임 게이트’, 2021. 주차장 건물 옥상에서 가장 먼저 관람객을 맞이한다. 사진 강다정 ©호암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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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첼 윤, ‘퍼레이드 파라디’, 2026. 사진 김연제 ©호암미술관
주차장, 건물 외벽, 정원 등 미술관 내 여러 공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전효경 미술관 안팎을 두루 돌아보며 전시 공간으로 활용할 가능성을 살폈다. 최종적으로 작품을 설치한 건물 외벽과 안내 초소 옥상, 정원 등은 안전, 방수, 구조 훼손 가능성 등 해결해야 할 문제가 적지 않았지만, 설치 팀과 충분히 협의한 끝에 무사히 관람객에게 선보일 수 있었다.
비트라니 미술관을 하나의 몸처럼 바라보고자 했다. 주차장에서 공원으로, 건물 외벽에서 입구 홀로 이어지는 모든 동선을 전시의 일부로 삼았다. 새로운 벽을 세우는 일은 최대한 자제했다. 대신 소리와 빛으로 작품 사이의 관계를 만들었다. 실내와 야외, 잔디밭과 아스팔트, 벽과 공기, 무엇보다 작가들 사이에 위계를 두지 않는 게 중요했다. 관람객이 자유롭게 거닐면서 작품의 목소리에 스스로 귀 기울이기를 바랐다. 미술관이 너무 많은 것을 설명하려 든다면 역설적으로 제 역할을 못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번 협업은 팔레 드 도쿄에 어떤 새로운 발견을 안겨주었나?

비트라니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어느 때보다 밀도 높게 협업했다. 한국 큐레이터들과 긴밀하게 의견을 나눈 덕분에 아시아 미술계에 대한 이해를 한층 구체화할 수 있었다. 앞으로 이어질 연구와 협업을 위한 새로운 기반도 마련했다. 100명이 넘는 작가를 만났고 큐레이터, 비평가, 컬렉터 등 다양한 관계자와도 폭넓게 교류했다. 팔레 드 도쿄는 퐁피두 센터, 프랑스 국립조형예술센터와 함께 새로운 전시를 준비하고 있다. 아직 자세한 내용을 밝히기는 어렵지만, 아트스펙트럼을 준비하며 이어온 연구와 만남이 이 전시에도 자연스럽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아트스펙트럼은 하나의 전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연구, 교류, 발견의 계기가 됐다. 여기서 얻은 경험을 바탕으로 팔레 드 도쿄의 프로그램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앞으로 아트스펙트럼을 어떤 방향으로 확장하고자 하나?

전효경 아시아의 동시대 작가를 발굴하고 지원한다는 기조는 유지하겠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정해진 게 없다. 미술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만큼 전시의 역할과 방식도 하나의 틀에 머물러 있을 수 없다. 앞으로도 동시대의 변화와 요구에 응답하며 아트스펙트럼이 무엇이 될 수 있을지 계속 질문해 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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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유이치, ‘플라자’, 2019/2026. 작가의 대표작에서 발췌한 페이지를 확대 프린트해 호암미술관 외벽을 감쌌다. 사진 김연제 ©호암미술관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80호(2026.10)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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