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이 태어난 자리 되짚기,〈인타임 도서관〉전
인쇄소 인타임이 잠시 잠깐 도서관이 되었다. 지난 15년간 인쇄소에서 제작한 2400여 종의 책을 추적했고 그중 절반가량이 책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왔다. 전시는 완성된 책에서 출발해 그 뒤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로 귀결된다. 책이 태어난 시간과 자리를 되짚는 일은 동시대 그래픽 디자인이 무엇을 딛고 서 있는지 되묻는 일이기도 하다.


인쇄소 인타임은 어떻게 임시 도서관이 되었나?
김종민 작년에 작업 공간을 하나 더 마련했다. 모처럼 빈 공간이 생겼으니 벽에 책장을 두고 인타임이 만든 책을 모아두면 좋겠다 싶던 차였다. 그 생각을 전시로 구체화해 보자고 이민규 디자이너가 제안했다. 지난 작업을 한자리에서 되짚어 보는 일이 제작자에게 좀처럼 오지 않는 기회라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이민규 충무로·을지로 일대 인쇄소는 매년 7월 말에서 8월 초까지 일제히 여름 휴가에 들어간다. 이 기간에는 작업 공간이 비어서 그곳을 전시장으로 활용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책이 실제로 만들어지는 현장으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싶었다. 책을 완결된 결과물로만 보지 않고, 그것이 만들어진 시간과 장소 속에서 바라보게 하는 기회를 만들고자 했다.
많은 인쇄소 중 왜 인타임이어야 했나?
이민규 인타임은 지난 15년간 문화예술 분야를 폭넓게 오가며 책을 만들어왔다. 이곳에서 만든 책을 한자리에 모으면 인쇄소의 역사와 실천을 보여주는 동시에, 2010년대 이후 한국 그래픽 디자인과 출판 문화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또 하나 흥미로웠던 것은 인타임이 ‘인쇄기 없는 인쇄소’라는 점이다. 인타임은 을지로, 충무로, 일산 장항동, 파주출판단지까지 이어지는 여러 업체와의 협력 네트워크 속에서 작동한다. 따라서 인타임이 만든 책을 살피다 보면 완성된 결과물뿐 아니라 그 이면에서 작동하는 생산 구조와 협업의 관계망까지 드러난다. 동시대 그래픽 디자인의 결과물과 이를 가능하게 하는 하부 구조를 동시에 들여다볼 수 있다는 점에서 작지만 유효한 렌즈라고 판단했다.


인타임은 왜 인쇄기 없이 일하나?
유성운 처음에는 당연히 인쇄기를 갖추고 시작하고 싶었다. 나 역시 기계를 다루던 사람이니까. 그런데 인쇄기는 값이 비싸고 종류도 다양해 필요한 장비를 모두 갖추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결국 내가 가진 기계 한 대에 맞춰 일의 범주를 좁힐 수밖에 없다. 그때 “사방에 널려 있는 게 다 네 기계”라는 한 선배의 조언을 듣고 인쇄기 없이 인쇄소를 시작했다. 기계가 없으니 오히려 일의 성격에 적합한 인쇄소와 제본소를 자유롭게 선택하고, 주변의 다양한 설비를 우리 것처럼 활용할 수 있었다. 자연스럽게 여러 업체와의 협력 관계도 끈끈해졌다. ‘인쇄기 없는 인쇄소’는 당시에는 피치 못할 선택이었지만, 돌이켜 보면 오히려 그 선택이 지금의 인타임을 만든 토대가 되었다.
그렇게 만든 책이 2400여 종에 이른다고.
이민규 인쇄소 서버 데이터를 바탕으로 지난 15년간 제작한 책의 목록을 만들어보니 2400여 종에 이르렀다. 그러나 목록에 있던 책 대부분은 인타임이 실물로 보관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인타임과 긴밀히 협업해 온 디자이너들에게 연락해 책을 빌렸다. 대부분 흔쾌히 책을 내주었고, 오랫동안 함께해 온 인타임에 대한 감사와 각자의 기억을 전해오기도 했다.
유성운 전시 기간 동안 1282권의 책이 다시 인타임으로 돌아왔다. 그 과정에 힘을 보태준 디자이너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크다. 생각보다 많은 사람이 전시를 찾아와 내심 놀랐는데, 디자이너들이 알게 모르게 입소문을 내준 모양이더라. 돌이켜 보면 인타임의 영업사원은 언제나 디자이너였다.
전시를 준비하며 가장 공을 들인 부분은 무엇이었나?
이민규 인타임의 제작 도서 데이터베이스를 만들고, 이를 토대로 ‘주석’을 구성하는 일이었다. 먼저 서버에 남아 있던 디지털 자료를 작업 의뢰서와 대조해 지난 작업을 정리했다. 분야·판형·면수·부수·종이·발행처 등 제작 사양과 서지 정보를 체계화했다. 이후에는 데이터를 시각화해 개별 책에서는 드러나지 않는 분포와 빈도, 경향을 살폈다. 실물 책이 ‘본문’이라면 그 이면의 생산 과정과 협업 관계, 책을 만든 사람들의 이야기는 ‘주석’이라고 보았다. 한 권의 책에서 출발해 그 바깥의 제작 환경까지 시선을 확장하는 장치인 셈이다.


디자인 신에서 인쇄인에 대한 조명은 여전히 부족하다. 현장에서는 젊은 세대의 유입도 쉽지 않다고 들었다.
유성운 인쇄 설비 대부분이 전자식으로 전환되면서 작업 환경은 과거보다 크게 개선됐지만, 인쇄업을 여전히 낡고 지저분한 일로 바라보는 인식은 좀처럼 바뀌지 않는다. 현재 현장에서 일하는 인쇄인의 절반 이상이 60~70대일 만큼 고령화도 심각하다. 기술과 경험을 이어받을 다음 세대가 유입되지 않으면서 대를 잇지 못하고 사라지는 업체도 점점 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인쇄소는 디자이너에게 어떤 배움의 장소가 될 수 있을까? 그 배움을 다음 세대로 이어가기 위해서는 어떤 고민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나?
김종민 우리와 함께 일하는 디자이너 중에는 대학에서 학생을 가르치는 사람도 있다. 이들이 가끔 학생들을 데리고 인타임을 찾아온다. 그런 경우 우리도 인쇄부터 제본까지 전 과정을 가능한 한 빠짐없이 보여주려 한다. 인쇄소에 직접 와보는 건 디자이너에게 좋은 공부가 된다. 제작 과정을 미리 고려할 줄 알아야 더 완성도 높은 디자인을 할 수 있으니까. 학교마다 인쇄와 제본의 현장을 직접 경험하는 수업이 더 많아졌으면 한다. 학생들이 인쇄소를 어렵거나 낯선 곳으로 여기지 않고, 궁금한 것이 생기면 직접 찾아오면 좋겠다. 그런 현장 실습이 필요하다면 인타임이 얼마든지 함께하고 싶다.
이민규 인타임은 나에게 인쇄와 제작을 가르쳐준 선생님이다. 그동안 받은 배움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으로 도서관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인타임과 좋은 협업 관계를 유지하는 한편, 현장에서 발견한 질문을 연구로 이어가고 싶다. 과거에 대한 회고와 역사적 축적 없이 현재에서만 부유하는 듯한 그래픽 디자인계에서, 우리가 어디에 서 있고 무엇을 딛고 작업하는지 살피는 일은 결국 우리가 선 지반을 단단하게 만든다고 믿는다.


기획·연구·디자인 이민규
협력 인타임(대표 김종민)
데이터 시각화 백단하
웹 개발 이헌(조민재)
공간 디자인 홍승은
진행 도움 장서영
인스타그램 @intime_libra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