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박시영: 알고리즘 시대 속 창작자의 셀링 포인트를 말하다

박시영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스튜디오 빛나는 대표

디자인 베테랑 그리고 인생 선배. 박시영 디자이너는 2006년부터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Bitnaneun)을 운영하며, 상업 영화부터 독립 영화까지 가리지 않고 폭넓게 활동 중이다. 3년 전부터는 전남 고흥에 내려가 새로운 라이프스타일도 가꾸고 있다. 삶과 일의 궤도를 독창적으로 개척하는 디자이너, 그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Creator+]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박시영: 알고리즘 시대 속 창작자의 셀링 포인트를 말하다

editor’s note

박시영 디자이너는 9년 만에 돌아온 영화 <베테랑 2> 포스터 디자인을 만든 주인공입니다. 이 외에도 그는 <노량>, <남산의 부장들>,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동주>, <관상>, <곡성>, <꿈의 제인>, <우리들>, <벌새>, <거인> 등 한국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를 아우르며 업계에서는 잔뼈가 굵은 인물이죠. 우리는 이런 경력을 지닌 사람을 이렇게도 부릅니다. 베테랑(Veteran). 흥미로운 건 베테랑이라고 불리는 그는 정작 디자인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는 사실인데요. 더 이상 전공을 따라 직업을 갖는 시대가 아니지만, 그가 디자이너를 결심했을 때만 해도 사회 분위기는 그렇지 않았다고 해요. 빽은 없어도 내가 가진 경험의 힘을 믿는 그가 걸어온 지난 여정이 궁금해졌습니다. 최근 전남 고흥에 터를 마련해 지내고 있는 박시영 디자이너를 서울에서 만났습니다. 베테랑이 말하는 창작론을 지금 만나보시죠.

3년 전부터는 전남 고흥에서 생활 중인 박시영 디자이너

PLUS 1. 포스터 디자인, 그가 가장 빛나는 순간

지난 9월 13일 개봉한 영화 〈베테랑 2〉 포스터 디자인을 맡았어요. 포스터에 영화 내용을 압축한 상징적인 이미지를 심어두기로 유명하시잖아요. 베테랑 2 포스터 디자인 작업에서는 어떤 포인트를 강조하셨는지 궁금해요.

바나나 우유랑 칸쵸 같은 영화처럼 보이도록 만들자. 이게 목표였어요. 누가 보더라도 부담스럽지 않아야 하고, 잘난 척하는 영화가 아니라 저녁에 술 한잔하면서 곁들이기 좋은 영화임을 강조해야 했죠.

대중적으로 만드는 게 가장 어렵잖아요. 게다가 앞서 〈베테랑 1〉이 큰 성공을 거뒀으니 여러모로 부담되지 않았을까 싶네요.

솔직히 디자이너라면 속편 영화의 포스터 디자인을 반기진 않죠. 앞서 잡아둔 디자인 문법을 그대로 따라갈 수밖에 없으니까요. 무언가 새롭게 할 수 있는 여백이 적어요. 저는 폰트를 늘 새로 만드는데 프랜차이즈 영화의 성격을 가져가는 게 중요하니 지난 폰트를 그대로 썼어요. 무엇보다 지금 ‘베테랑’이라는 영화가 산업군에서 가진 영향과 의미를 볼 때 폰트는 지엽적인 문제일 수 있겠다고 납득이 되더군요.

또, 류승완 감독과는 〈짝패〉(2006),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2008)를 함께 작업하면서 쌓인 신뢰감이 있었죠. 포스터 디자인 작업은 촬영 이전 그러니까 프리 프로덕션 시점에서부터 시작하거든요. 촬영물을 보는 게 아니라 시나리오를 보면서 어느 정도의 상상력을 발휘해야 하는데 시나리오가 잘 읽혔어요. 나중에 보니 촬영도 기가 막혔고요. 적어도 7백만은 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인터뷰가 나올 즈음이면 어느 정도 결과가 나왔을 수도 있겠네요.

영화 포스터를 이야기하면 늘 나오는 이야기지만 국내 배급용과 수출용 포스터가 달라요. 〈베테랑 2〉도 마찬가지로 국내와 해외용 디자인을 달리했어요.

선보이는 대상이 달라요. 국내 배급용은 대중 관객을 대상으로 해요. 이들은 여전히 티켓 파워가 있는 배우나 감독 등 네임 밸류에 대한 선호도가 높죠. 그러다 보니 디자인에서도 이들을 전면으로 내세우거나 강조할 수밖에 없고요. 반대로 해외 시장은 장르를 소비한다는 점에서 다르게 접근할 필요가 있어요. 해외 포스터는 관객보다는 배급권을 구매하는 바이어(Buyer)들이 주 소비자층이거든요. 그래서 스릴러, 누아르, 액션, 공포, 멜로 등 영화마다 대표되는 장르가 디자인에 드러나도록 해요. 〈베테랑 2〉도 마찬가지. 형사 액션 장르물로 어두운 분위기와 수갑을 들고 있거나 채우는 모습에 하이라이트를 주는 거죠.

주로 해외 바이어(Buyer)를 타깃하는 수출용 포스터는 장르성을 드러내는 것이 가장 우선시된다. 영화 <베테랑 2>의 경우 범죄 누아르, 형사물이라는 장르가 드러날 수 있도록 수갑을 전면 이미지에 부각했다.

일반적으로 포스터 디자인 제작에 있어서 ‘예술성’과 ‘대중성’의 균형은 어떻게 잡으세요?

이건 향수 뿌리는 것과 같아요. 베이스 노트에는 신선함이 필수죠. 완성도가 높은 작품은 들여다봐야 알 수 있지만, 신선함은 무심코 지나가다가 ‘뭐였지?’라고 돌아보게 만들거든요. 영화 포스터는 짧은 시간 내 즉각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매체니까요.

“포스터 디자인의 황금 비율은 신선함이 30, 뉘앙스가 40, 그리고 완성도가 20의 비율로 겹겹이 쌓일 때 완결에 가까워지는 거죠”

미들 노트는 영화가 가진 뉘앙스. 특히 한국 사람들은 자기가 속았다는 느낌을 받는 걸 싫어하거든요. 관객이 작품을 관람한 뒤 느끼는 감상과 일맥상통한 뉘앙스를 신선함 위에 얹는 거죠. 마지막으로는 조형적 완성도. 하나의 완제품으로서의 완결성이 있어야 해요. 매력과 관심을 지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 요소죠.

배우 송혜교, 전여빈 캐스팅으로 기대를 모으는 〈검은 수녀들〉도 작업하고 계신다고 들었어요. 강동원, 김윤석 배우가 주연한 〈검은 사제들〉을 잇는 속편이잖아요. 조건은 〈베테랑 2〉와도 다르지 않아 보이는데, 디자인 접근 방식에 대한 고민은 어떻게 달라졌는지도 궁금해요.

비슷한 구조의 두 작품이지만 디자이너로서의 고민은 확연히 다르죠. 베테랑은 전작의 후광을 디자인에서도 충실히 따르고자 했고, 영화의 연속성과 오락성을 가장 우선순위로 뒀고요. 반면, 〈검은 수녀들〉은 〈파묘〉, 〈사바하〉 등 한국형 오컬트의 장르적 성공 이후 선보이는 영화인만큼 그에 견줄 힘을 어떻게 보여줄 수 있을지가 고민이에요. 특히 국내 대중에게는 아직 오컬트 장르에서 여배우 투 톱 구조는 낯설거든요. 이질감을 친절하게 풀어줄 것인가 혹은 더욱 증폭시켜 새로운 충격을 줄 것인가. 이질감은 나쁜 게 아니에요. 다른 것과 구별되는 지점인 만큼 하나의 자산이죠. 마무리 작업 중인데 결과물을 기대하셔도 좋을 것 같아요.

PLUS 2. 박시영이 말하는 창작자가 살아남는 법

인터뷰 중인 박시영 디자이너

최근에는 디자이너 후배들에게 ‘개성’을 갖추는 걸 강조하신다면서요.

시각적으로 너무 많은 것들이 생산되고 있고, 사람들의 애정과 관심은 초 단위로 바뀌고 있어요. 과거에는 개성이 선택 사항이었을지 몰라도 지금은 달라요. 명확한 나만의 컬러가 있지 않으면 레이더에서 걸리지도 않거든요. 시작 자체가 안된다는 거죠.

“현시대의 창작자는 설득해야 하는 대상이 변했어요. 오늘의 소비자는 과거의 이들과 달라요. 무언가를 찾아보고, 비교해 보고, 선택하는 과정이 없어졌어요. 알고리즘이 이미 제공을 다 해주니까요. 그러니까 더더욱 소비자의 눈에 즉각적으로 걸릴 수 있어야 해요”

진짜 문제는 그 개성이 값비싸다는 거예요. 개성을 갖기 위해서는 실패도 해보고, 성공도 해보고, 여러 가지 데이터가 쌓여야 하거든요. 그러기 위해서는 그만큼 자본을 투자해야 하는 거예요. 가까운 예시를 하나 생각해 보자고요. 평범한 우리가 아파트를 선호하는 이유가 개성과 취향이 없어서? 아니요. 가성비가 좋아서예요. 그만큼 개성은 쉽게 가질 수 있는 건 또 아니에요.

투자 없이 개성을 가질 방법은 없어요?

돈 안 들이고 개성을 찾을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이 무작정 환경을 바꾸는 거예요. 이왕이면 가장 낯설고 싫어하는 환경에 나를 집어 던지면 좋죠. 당장 개성을 얻을 순 없어도 마냥 싫다고 방치하지 않는다면 적어도 싫어하는 이유는 알 수 있잖아요. 그게 곧 데이터고요.

개성을 갖춰도 계속 소모되다 보면 결국 밑천이 드러나는 법이잖아요.

창작자의 개성은 다른 말로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에요. 특히 디자인은 클라이언트에게 선택받아야 하는 일이잖아요. 과거 바우하우스처럼 하나의 스타일과 원칙만을 고집하기에는 시대가 달라졌어요. 지금, 이 시점에서 내가 무엇을 팔 수 있을지, 나를 둘러싼 조건을 살피며 자기 객관화를 통해 고민해야죠. 내가 가진 자산은 없어지지 않아요. 다만 바뀔 뿐이죠. 예를 들어 과거의 저는 비전공 디자이너라는 셀링 포인트가 있었다면, 지금은 레거시가 쌓인 20년 경력의 중견 디자이너가 바뀐 포인트인 거죠. 지금 나이와 경력에 비전공 디자이너라는 걸 지금 내세워봤자, ‘아, 고생하셨겠네요~’라는 반응만 돌아올 뿐이거든요. 사람들이 원하는 셀링 포인트를 갖추면 자연스레 과거의 스토리가 더해져요. 그러면 시장에서 유일한 창작자가 되는 거죠.

앞으로 어떤 창작자가 되고 싶으세요?

확실한 건 1막은 끝났어요. 전과 다른 여건과 상황, 그리고 소비자가 눈앞에 놓였어요. 마냥 오더메이드(order-made)만 할 수 있진 않을 것 같고요. 원숙한 창작자에게 중요한 건 흥행과 상관없는 오리지널리티(originality)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오는 기회는 점차 줄어들 테고, 그러면 자기 주도적인 일을 해야 하는데 클라이언트 프로젝트 할 때처럼 합리적인 결과물을 내놓을 순 없죠. 팔릴 만한 개성을 듬뿍 담은 결과물을 생산해야 하는 시점이 왔다고 봐요.

PLUS 3. 시영 선배의 새로운 도전

전남 고흥에서 지낸 지 3년 차인 박시영 디자이너는 서울과 고흥을 오가며 새로운 라이프스타일을 구축 중이다.

최근에는 전남 고흥에서 줌(zoom)으로도 일하신다고 들었는데, 서울에 와서 해야 하는 일과 서로 성격이 다른가 봐요.

아이디어를 던지는 기획 회의는 가능한 서울에서 대면으로 진행해요. 반면 디자인 실행 단계에 들어서면 줌으로 커뮤니케이션하고요. 쓸데없는 시간 낭비 없이 필요한 이야기만 집약적으로 할 수 있으니 합리적이죠. 서로 나눌 이야기를 미리 정리하고 들어오니까 언어가 더 명확한 것도 좋아요. 특히 디자인할 때는 구체적인 언어로 커뮤니케이션하는 게 디자이너 입장에서는 일하기 수월하거든요.

2006년부터 스튜디오 빛나는(Bitnaneun)을 운영하고 계시잖아요. 고흥으로 떠나면서 조직 구조나 업무 방식에 대해서도 고민이 많으셨겠어요.

최근에는 인턴을 뽑아볼지 고민 중이에요. 과거에는 정규직만 뽑았거든요. 인턴이라는 게 고용주 입장에서나 좋지, 솔직히 일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로죠. 일은 오래 하는데 돈은 적게 벌잖아요. 뽑아먹겠다는 느낌이 강해서 일부러라도 안 뽑았어요. 그런데 고흥에서 지내면서 생각이 바뀌더라고요. 지역에서 대학 나와서 이제 막 디자이너로 활동을 시작하는 친구들을 보면 클라이언트 잡을 해 볼 수 있는 기회가 너무 적어요. 접점이 없으니까요. 차라리 우리 스튜디오에서 인턴으로 일하면 훨씬 도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거죠. 또, 앞으로 내가 영화 포스터 디자인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를 생각해 보면 이제는 노하우를 나눠야 할 때라고도 판단했고요.

박시영 디자이너가 디자인한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의 영화 <희생>의 포스터. 상업 영화가 아닌 작품 중에서는 최대한 예술 영화 장르에 가까운 작품을 선택한다. 후배 디자이너들이 작업할 파이를 건드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스튜디오 빛나는)

‘시영 선배’라는 말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네요. (웃음) 과거와 달리 일의 영역도 달라졌다면서요.

맞아요. 블록버스터 규모의 상업 영화 아니면 독립 영화 안에서도 매니악 한 작품으로 양극화되어 있어요. 그 가운데에 있는 작품들은 독립한 디자이너들의 파이니까 건드리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과거에는 일의 80%가 상업 영화였죠. 한 달에 한 번씩 개봉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팬데믹 여파와 OTT 성장으로 영화 산업의 파이가 전체적으로 줄어들었어요. 하지만 꼭 팬데믹이나 OTT 두 요소 때문은 아니라고 봐요. 이들은 촉매제일 뿐이죠. 사실 영화라는 매체 자체가 오래된 것이라 빠르게 변하는 대중의 관심과 짧은 콘텐츠를 선호하는 소비자 니즈에 적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게 근본적인 문제겠죠.

박시영 디자이너가 준비 중인 스튜디오 빛나는 산하의 ‘띠프 프로덕션’ 로고 이미지 (사진 제공. 스튜디오 빛나는)

그래서인지 영화 포스터 디자인 이외의 행보도 눈길을 끌어요. 스튜디오 빛나는 산하 ‘띠프(THHIEF) 프로덕션’이 대표적이겠죠. 어떤 곳이에요?

스튜디오 빛나는(Bitnaneun)이 외부 클라이언트 일을 하는 곳이라면, 띠프(THHIEF) 프로덕션은 제가 클라이언트가 되어 프로젝트를 의뢰하는 곳이에요. 그만큼 주제와 매체 그리고 인공지능 기술 사용 등 자유도가 높죠. 리빙 제품부터 영화, 광고, 콘틴, 웹툰 그리고 애니메이션까지 상품성을 갖춘 작품과 제품을 제작해요. 이제 시작 단계라 구체적인 결과물이 나온 건 아니지만 곧 볼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PLUS 4. 고흥으로 이탈한 디자이너

SNS에 서울에서 전남 고흥으로 떠난 일을 두고 ‘이탈’이라고 표현하신 게 눈길이 가더라고요. 그래도 서울을 완전히 벗어난 것은 아니라는 말처럼도 들리는데, 맞나요?

직업이 디자이너니까요. 아무래도 실질적인 업무는 서울에 몰려 있을 수밖에 없어요. 대신 40대 중반에 들어서면서 나의 생활근거지를 서울에 두는 것이 맞는 결정이냐고 물었을 때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서울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말이죠. 솔직히 서울에 살려면 집이 제일 중요해요. 그간 월세와 전세로만 살아서 이제는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때 수중에 20억이 있었거든요. 하지만 내가 원하는 조건에 부합하는 곳이 없더라고요.

그 정도 돈이면 원하는 곳 쉽게 찾을 수 있지 않아요?

이 이야기하면 제일 많이 들었던 이야기가 용산 자이 아파트 50평대에요. 정작 저는 아파트는 생각도 안 하고 있지만요. (웃음) 개인마다 생각의 편차가 있겠지만, 적어도 저한테는 최악의 가성비가 아파트예요. 벽을 다른 사람과 공유하고, 퇴근하고 들어 온 집에서마저 타인의 존재를 의식해야 하는 생활은 견딜 수 없겠더라고요. 그렇다고 단독주택을 사자니 제가 원하는 동네가 아니고. 차라리 집을 지을까? 싶었죠. 대신 서울이 아닌 곳에 집을 짓는 거죠.

고흥으로 떠난 직접적인 이유겠네요.

디자이너로 일하니까 하루 중 대부분의 시간은 작업실과 집에서 보낼 수밖에 없고, 다른 감각보다는 시각이 민감하니까 아름다운 환경이 갖춰진 곳에서 살고 싶었어요. 고흥을 중심으로 생활하고, 서울은 일할 때만 시간을 쓰겠다. 그런 의미에서 ‘이탈’이라는 단어가 적합한 것 같았죠.

인터뷰 중인 박시영 디자이너

왜 고흥이에요? 다른 선택지는 어떤 곳이었을지 궁금해지던데요.

사실 고흥보다 먼저 알아본 게 포르투갈이에요. (웃음) 바닷가에서 살고 싶었어요. 서울을 떠나서 이민을 준비했는데 시민권이며 세금이며 만만치 않더라고요. 이민은 못 갔지만 바닷가에 살겠다는 꿈은 포기하지 않았어요. 국내로 눈을 돌렸죠. 동해는 추워서 탈락. 따뜻한 남해가 좋겠다고 생각해 부산 기장부터 전남 신안까지 해안가를 따라 차를 타고 10일간 다녔어요. 통영도 참 좋았는데… 그래도 전라도로 가면 음식이 맛있으니까 한번 넘어가 보자 해서 갔는데 고흥에서 발이 안 떨어진 거죠. 독특한 반도 지형에, 인구 밀도도 낮고, 자연환경은 말할 것도 없이 마음에 쏙 들었어요.

아, 그러면 고흥에 집은 다 지으신 거예요?

10월 말에 완공 예정이에요. 그간 클라이언트를 상대만 해 봤지 직접 클라이언트가 되어 본 건 또 처음이라 새로운 경험이었죠. 맞춤 양복을 입는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요. 편의성뿐만 아니라 나의 판타지도 함께 뒤섞여 있으니까, 한편으로는 온전히 나의 정신세계를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어요. 고흥 집은 한마디로 표현하면 ‘베벌리힐스에 있는 초가집’. 딱 그렇게 생겼어요. (웃음) SoA 건축사사무소에서 고생 많이 하셨어요.

고흥에 내려간 지 벌써 3년이라고요.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여전히 고흥이 마음에 드세요?

제 눈에는 여전히 그렇죠. 한적한 깡촌이지만 미려해요. 꽃을 많이 심거든요. 나름의 감성이 있죠. 그래서일까 고흥은 낯선 곳이에요. 이국적인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하고. 어릴 적 구미에서 서울로 왔을 때, 그리고 서울에서 지내면서 추구한 이상향과 스타일과는 확연히 다르니까요. 주말에는 아침에 일어나 밭에 가서 농사짓고, 주중에는 12시부터 오후 5시까지 디자인하고, 일주일에 세 번은 바다 나가서 선장님 밑에서 뱃일 배우면서 지내요. 그렇게 계속 있다 보면 언젠가 지겨워질지도 모르죠. 그게 아니면 오히려 익숙해져서 더 좋아질 수도 있고요.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되죠.

PLUS LIST

박시영 디자이너에게 영감을 주는 고흥 음식 3

  • 장어

박시영 디자이너는 고흥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이유로 자연환경을 꼽았다. 고흥에는 바다도 있고, 산도 있고, 펄도 있다. 덕분에 육해공 먹거리도 풍부하다. 펄과 바다가 있는 덕분에 바닷장어와 갯장어 요리도 유명하다. 고흥 9 미(味)에 포함되는 지역 특산물이니 두말하면 잔소리다. 그는 디자인만큼이나 음식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음식은 저에게 세 번째 열정이에요”.

  • 월남쌈

당황스럽지만 정작 고흥에서 그가 좋아하는 음식은 월남쌈이다. 월남쌈으로 용호상박을 겨루는 음식점 두 곳을 알려줬다. 그중에서 눈길이 가는 곳은 호주로 이민을 떠났다가 돌아온 주인장이 하는 식당이다. 가게 이름도 ‘시드니 월남쌈’이다. 호주식으로 변형된 월남쌈을 맛볼 수 있다고. 월남쌈을 주문하면 쌀국수가 나오는데 그 안에 있는 고기를 싸서 먹는 방식이다. 박시영 디자이너가 강조한 건 ‘육포를 다진 소스’. 고흥이 이국적이라는 그의 말이 비단 풍경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창작자에게 무엇이건 새로운 경험은 소중하다고 강조하는 것에는 식(食)경험도 포함된다.

  • 냉면

장흥의 또 다른 특산물은 한우다. 소고기가 유명하니 이를 육수 삼는 냉면도 남다르다고 그는 말했다. 서울에서 먹는 물냉면과 비빔냉면의 중간 느낌. 묘한 매력이 있다고 한다. 지역의 고유성을 담은 음식은 그가 말한 원숙한 창작자에게 필요한 자세와도 묘하게 닮았다. 생각해 보면 음식도 다르지 않다. 셀링 포인트(selling point)가 필요하고, 그것이 유일무이해야지만 소비자가 계속 찾는다.

TIPPING POINT

박시영 디자이너가 자수성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바로 책임감이다. 그는 직업은 진지하게 나를 책임지는 일이라고 말한다. 경북 구미에서 혈혈단신으로 상경해 서울역 쪽방촌과 버스터미널을 오가는 생활을 할 때도 그는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다했다. 포기하지 않고 살아남았고, 정규 교육 없이 ‘한글97’로 디자인으로 독학하면서 디자이너의 길을 걸었다. 맨땅에 헤딩하던 청년은 시간이 흘러 20년 이상의 경력을 갖춘 디자이너가 되었다. 스스로를 책임질 줄 알면서 동시에 남을 책임지는 일에 주저함이 없는 어른이 되고 싶다는 박시영 디자이너. 1막이 끝난 지금, 그의 2막은 과연 어떤 모습일지 벌써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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