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지금, 브랜드들은 과거를 말할까?
시간을 넘나드는 디자인, 브랜드의 미래는 과거 속에 있다
하루가 다르게 기술이 발전하는 시대다. 과거엔 영화 속 이야기로만 여겼던 기술이 어느샌가 우리의 일상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었다. 첨단 기술의 홍수 속에서 살아가는 우리는 과거의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그저 누리기만 하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옛 시절에 매력을 느낀다. 최근 몇 년 새 사람들을 열광시켰던,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열광하고 있는 이 '레트로'의 유행은 어쩌면 청개구리 심보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 이유가 있다.

과거의 향수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만한 충분한 힘을 가지고 있다. 유행의 배경이 되는 시대에 살았던 이들에게는 그리움을, 그 시절을 겪지 못한 세대에게는 신선함을 선사한다. 그렇지만 과거를 기반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트렌드는 과거의 콘텐츠에 현대적인 감각을 더했기에, 완벽하게 ‘복고(復古)’라고 말하기 어렵다. 레트로 유행이 시작되면서 동시에 만들어졌던 ‘뉴트로’라는 신조어의 의미대로, 요즘 시대의 복고 트렌드는 결국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반영하는 콘텐츠라고 할 수 있다. 이런 흐름에 따라 지금의 일상도 미래에 다시 주목받을 수 있기에, 결국 미래까지 바라보는 흐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를 반영하듯, 대기업들이 브랜드를 홍보하는 전시 및 행사에 레트로 감성을 더해 주목을 받고 있다. 레트로 감성이 제대로 효과를 발휘하려면 당연하게도 기업의 역사가 어느 정도 쌓여 있어야 한다. 실제로 현재 큰 관심을 모으고 있는 전시들 대부분이 반세기에 가까운 역사를 지닌 기업들이 기획한 것이다. 이런 전시에서는 대체적으로 장황한 설명 대신 그 시절을 풍미한 아이템들이 전면에 나서서 관람객의 이목을 끌고 있다. 홍보가 넘쳐나는 시대에 이처럼 사람들의 주목을 자연스럽게 이끌어낸다는 점에서, 레트로가 전시의 테마가 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 되었다.
마이크로소프트가 50주년을 기념하는 방법


마이크로소프트는 올해 설립 50주년을 맞이하여 다양한 기념행사와 콘텐츠를 선보였다. 특히 워싱턴주 레드먼드 본사에서 진행된 창립 50주년 기념행사에서는 전·현직 CEO가 모여 큰 화제를 모았다. 그다음으로 뜨거운 반응이 일어났던 곳은 ‘더 오리지널 빌드 The Original Build’였다. 시애틀에서 열린 빌드 개발자 콘퍼런스의 일환으로 선보인 이 공간은 마이크로소프트라는 회사가 탄생했던 차고를 정교하게 복원해낸 것이 특징이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1970년 대로 복귀한 듯한 느낌을 주는 이 공간을 자세히 살펴보면, 단순히 레트로 트렌드를 반영한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섬세하게 복원한 과거의 모습을 통해 기술이 얼마나 비약적으로 발전했는지를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동시에, 초창기 기업의 분위기가 오늘날에도 창의적인 영감을 불어넣을 수 있는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느끼게 한다. 그야말로 ‘초심을 잃지 말자’라는 분위기가 묻어 나오는 전시 체험 공간이라고 할 수 있다.

나무 패널로 마감된 벽, 투박한 CRT 모니터, 다이얼식 전화기, 1975년부터 1980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이크로소프트의 옛 로고와 더불어 세계 최초의 마이크로컴퓨터이자 미니컴퓨터 키트인 알테어 8800 Altair 8800의 복원 모델과 이를 현대적으로 재현한 알테어 두이노 프로 3.0 Altair-Duino Pro 3.0을 기반으로 제작된 맞춤형 PC까지, 모든 것이 예전 모습 그대로이지만 기계 내부에는 인공지능 기능인 코파일럿 Copilot과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인 애저 Azure 등과 같이 마이크로소프트의 최신 기술이 연결되어 있어 놀라움을 선사한다.

어수선했던 차고가 획기적인 발명품을 개발하는 중심지였다는 사실을 알렸던 전시 공간은 기업 초기의 혁신적인 분위기를 기념하는 동시에 과거의 일들이 현재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나아가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지를 조명하는 자리가 되었다. 이처럼 기업의 역사를 기리는 자리를 조명한 전시는 사람들에게 깊은 여운을 선사하며, 기업의 철학을 되새기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레인지로버, 2025 MDW 전시 <퓨처스펙티브: 커넥티드 월드>


럭셔리 SUV의 대명사인 레인지로버는 지난 4월에 진행된 밀라노 디자인위크에서 브랜드의 철학을 엿볼 수 있는 기념비적인 전시, ‘퓨처스펙티브: 커넥티드 월드 Futurespective: Connected Worlds’를 선보였다. 전시 제목 그대로, 이 공간에서는 브랜드의 과거, 미래, 그리고 세계가 연결된 듯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이 특징이다.
이번 프로젝트는 캘리포니아 기반의 혁신적인 디자인 스튜디오 누오바 NUOVA와의 협업으로 탄생했다. 시간 여행을 떠올리게 하는 구성과 미래적인 감성을 기반으로 기획된 전시에서 관람객들은 1970년부터 2025년까지, 두 시대에 걸친 영화적 여정을 따라가며 레인지로버의 디자인 계보와 함께 현대 럭셔리에 대한 브랜드의 지속적인 시선을 엿볼 수 있다. 맞춤형 가구 및 시설과 공간을 채우는 사운드스케이프, 그리고 누오바의 럭셔리 향수 브랜드 에어 Aeir가 레인지로버를 위해 특별한 제작한 향이 어우러진 두 가지 공간은 시각적인 경험을 넘어 오감을 자극하는 몰입형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전시 공간의 분위기를 결정짓는 핵심적인 요소는 역시 브랜드가 생산한 자동차였다. 1970년대 자동차 전시장에 영감을 받아 구성된 첫 번째 공간에서는 레인지로버 최초의 사전 제작 차량인 ‘YVB 151H’가 자리 잡고 있다. 나무 패널로 마감된 벽면, 대리석 소재 테이블, 우아한 버건디 컬러의 소파, 곡선미가 돋보이는 조명 등이 자연스럽게 레트로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공간은 최초의 레인지로버가 탄생했던 시대의 모습을 그대로 느끼게 한다. 따뜻한 조명과 함께, 공간에 어울리도록 특별히 조향된 향은 그 시절의 낭만을 더욱 깊게 느끼게 해주는 인상적인 요소다.


이어 관람객들은 밝은 빛으로 가득한 두 번째 공간을 마주하게 된다. ‘시간의 끈’을 상징하는 세로 거울 기둥이 배치된 공간에서는 YVB 151H 모델과 동일한 올리브 색상의 최신 5세대 레인지로버 ‘오토바이오그래피 Autobiography’가 전시되어 있다. 과거와 현재를 나란히 놓은 이 구성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진화해온 레인지로버의 기술력과 정체성을 직관적으로 보여준다. 시간이라는 개념을 감각적으로 풀어내어 브랜드 철학과 미래 비전을 효과적으로 전달한 탁월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브랜드 전시관이 할 수 있는 정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헤리티지’

두 기업처럼 과거에 대한 감성을 자극하면서도 그 너머에 있는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전시는 이전에도 있었다. 그중 대표적인 예가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에서 작년 9월부터 시작되어 올해 5월 중순까지 이어진 ‘나이키: 형태는 움직임을 따른다 Nike: Form Follows Motion’ 전시라고 할 수 있다. 이 전시에서는 1972년 설립 이후 50여 년간 꾸준히 성장해 온 브랜드의 모든 것을 둘러볼 수 있는 자리가 마련되어 수많은 관람객들의 발길을 이끌었다.


현재 세계 최고의 스포츠 브랜드로 자리매김한 브랜드의 획기적인 제품들과 다양한 협업 결과물들이 주목을 받기는 했지만, 무엇보다도 관람객들의 마음을 오래 붙잡은 것은 오히려 브랜드의 초창기를 떠올리게 하는 것들이었다. 창립 초기에 완성된 로고, 새로운 모델을 위한 초기 스케치, 그리고 아이코닉한 에어 맥스 시리즈의 탄생 비화 같은 이야기들은 기술과 디자인 너머 브랜드의 뿌리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했다. 브랜드가 지금까지 보내온 시간과 경험, 감정이 겹쳐진 하나의 이야기를 경험할 수 있는 자리로서 전 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현대 모터스튜디오 부산의 개관전이었던 ‘리플렉션 인 모션 Reflections in Motion’은 현대자동차의 인간 중심적인 디자인 철학을 다각도로 풀어낸 전시로 입소문을 타면서 부산을 시작으로 서울까지 순회 전시를 이어가며 화제를 모았다. 이는 컬러, 빛, 소재, 감성적 경험 등 자동차 디자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를 통해 현대자동차의 시선을 엿볼 수 있는 동시에 미래를 위한 전기차 디자인까지 함께하며 관람객에게 폭넓은 디자인 세계를 체험할 수 있도록 한 전시였다.

하지만 이 전시에서 가장 화제가 되었던 것은 ‘시간을 초월하는 가치’라는 주제 아래 브랜드 역사를 한눈에 둘러볼 수 있게 한 자리였다. 이를 위해 1975년에 생산된 ‘포니’와 더불어 이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헤리티지 시리즈 포니’가 함께 해 눈길을 끌었다. 역사적인 오리지널 모델과 최첨단 기술을 입은 새로운 모델이 서로를 비추는 듯한 모습 그 자체로 과거와 미래가 조우하는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시대와 유행을 뛰어넘어 현대자동차가 추구하는 디자인 철학을 시각적으로 표현한 전시장의 모습은 시간이 지나도 계속해서 회자될 만큼 멋진 구성으로 기억되고 있다.

‘과거를 알아야 미래가 보인다’라는 말이 있다. 시간의 흐름 속에서 차곡차곡 쌓여온 흔적들은 브랜드의 정체성과 철학을 만들어내는 기반이 된다. 그리고 이 철학은 기업이 만들어내는 제품, 공간, 경험 속에 스며들고, 이어 미래로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이 된다. 이런 모습들을 통해 우리는 브랜드가 어떤 가치를 추구해왔는지를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최근 많은 브랜드들이 앞다투어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는 이런 이유에 기반하는 듯하다.
이는 단지 과거의 성과를 기리는 것이 아니라, 브랜드가 어떤 마음으로 시작되었는지, 무엇을 중요하게 여기는지, 앞으로 어디로 향해 가고 싶은지가 함께 담겨 있다. 그리고 이런 진심 어린 서사는 관람객들, 결국에는 소비자가 될 이들의 마음을 움직이게 된다. 이런 흐름에 따라, 브랜드들이 레트로 트렌드를 반영하는 모습은 단순히 유행을 좇는 것만이 아니다. 사람들의 신뢰를 쌓고, 브랜드의 정체성을 재확인하며, 미래를 위한 비전을 구축하기 위한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