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년 역사를 지닌 뮤지엄의 새 이정표, V&A 이스트 뮤지엄
지난 4월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에 들어선 V&A 이스트 뮤지엄은 V&A 개관 프로젝트의 마지막 퍼즐이다.

빅토리아 & 앨버트 뮤지엄(이하 V&A)이 개관 프로젝트의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다. 지난 4월 런던의 퀸 엘리자베스 올림픽 파크에 들어선 V&A 이스트 뮤지엄(V&A East Museum)은 사우스켄싱턴 본관과 영(Young) V&A, 그리고 지난해 문을 연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의 뒤를 잇는 새로운 공간이다. 이번 개관은 런던시가 오랜 시간 공들인 이스트 뱅크(East Bank) 프로젝트의 마침표이기도 하다. 쓰임을 다한 올림픽 경기장을 문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낙후된 동부 지역을 되살리는 게 이 프로젝트의 핵심인데, V&A 이스트 뮤지엄 개관으로 그 대장정을 마무리하게 된 것이다.


뮤지엄 설계를 맡은 건축 회사 오도넬 앤드 투미(O’Donnell and Tuomey)는 건물 전역에 흩어진 소장품을 매개로 관람객의 경험을 연결시키는 공간을 떠올렸다. 최초의 아이디어는 요하네스 페르메이르의 명작 ‘편지를 쓰는 여인과 하녀’에서 착안했다. 그림 속 인물의 신체와 옷 사이 공간으로부터 건축적 전환의 가능성을 엿봤고, 닉 비시(Nick Veasey)의 발렌시아가 드레스를 참고하며 그 가능성을 구체화해 나갔다. 그렇게 완성한 공간 곳곳에서 드레스의 구조적 모티프가 드러난다. 건물 외벽을 뒤덮은 479개의 콘크리트 패널은 드레스의 구겨진 자국을 떠올리게 하고, 치마 안쪽의 빈 공간은 건축 구조체와 파사드로 형상화했다.

기하학적 형태의 출입구는 자연스럽게 관객의 시선을 이끌며 뮤지엄을 호기심과 환대의 공간으로 확장한다. 건물 외벽과 일체화된 벤치 역시 관람객과 건축물 간 친밀도를 높이는 장치다. 이는 V&A 이스트 뮤지엄이 지향하는 근본 가치와 맞닿아 있다. 젊은 세대의 창조적 역량 강화를 돕는 기관으로 거듭나기 위해 뮤지엄의 문턱을 낮춘 것. 청소년과 청년의 창작 활동을 지원하는 열린 플랫폼을 지향한다고 볼 수 있다. 동시에 V&A 이스트 뮤지엄은 지역사회와 긴밀히 호흡하는 문화적 거점으로 거듭나고자 한다. V&A 이스트 뮤지엄의 디렉터 거스 케이슬리헤이퍼드(Gus Casely-Hayford)는 알렉산더 맥퀸, 데이비드 베일리, 몰리 고다드 등이 모두 이스트런던 출신인 점을 들며 “새로운 실험과 변주를 시도하는 것이 이스트런던의 힘”이라고 말했다. V&A 이스트 뮤지엄은 동시대 문화와 사회적 담론을 아우르는 전시와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선보일 예정이며, 현재는 영국 흑인음악의 풍요로움과 다양성을 조명하는 개관전이 열리고 있다.
Interview 1

거스 케이슬리헤이퍼드(Gus Casely-Hayford) V&A 이스트 뮤지엄 디렉터
10년간의 여정 끝에 V&A 이스트 뮤지엄이 개관했다.
처음 디렉터로 부임했을 때만 해도 이스트 뱅크에는 변변한 건물조차 없었다. 팬데믹 기간이었기 때문에 비대면으로 팀을 꾸리고 기관의 비전을 만들어갔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자연스럽게 ‘사람과의 연결’을 가장 중요한 가치를 삼게 됐다. 팬데믹 이후에는 인근 학교를 방문하는 등 지역 커뮤니티와 깊이 교류하기 시작했다. 공동 창작은 우리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철학이다. 뮤지엄 설립 과정의 주요 의사 결정은 모두 지역 주민들과의 협의를 거쳐 이루어졌다. 그 과정이 쉽지만은 않지만 분명한 보람을 느낀다. 지난해에 개관한 V&A 이스트 스토어하우스가 65만 명의 방문객을 기록하며 좋은 스타트를 끊어주었다. 이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고민해야 할 시점이다.
V&A 이스트 뮤지엄만의 차별점이 있다면?
이곳은 중고등학생부터 이제 막 사회에 발을 내딛은 청년 관람객을 주요 타깃으로 한다. 청소년과 청년들은 단순히 작품을 관람하는 공간이 아니라 일상에 직접적인 영감을 주는 ‘유용한 공간’을 원한다. 그래서 소장품 컬렉션을 ‘만들기와 창의성’이라는 주제로 재편했다. 지역, 시대와 같은 전통적 분류 체계에 따라 작품을 나누지 않고 지속 가능성, 젠더, 재현과 같은 동시대적 이슈 아래 체계화했다. 이 같은 분류 체계 안에서는 작품을 둘러싼 시대 배경이나 기법에 가려지기 쉬운 작가의 의도와 태도가 한층 선명하게 드러난다.
개관전의 주제로 영국 흑인음악을 선택한 이유가 있나?
V&A 아프리카·디아스포라 퍼포먼스 부서의 큐레이터인 재클린 스프링어(Jacqueline Springer)가 제안했다. 영국 흑인음악은 노예 제도, 식민주의, 이주 역사를 관통하는 만큼 그 어떤 예술보다도 강한 연대의 힘을 지닌다. 세계의 분열이 깊어진 지금이야말로 사람들을 이어주는 문화의 힘을 이야기할 때라고 생각했다.



Interview 2

제이든 알리(Jayden Ali) JA 프로젝트 디렉터 겸 V&A 이스트 뮤지엄 상설관 디자이너
상설관 ‘Why We Make’는 이스트 뱅크의 풍경을 적극적으로 차용한 듯하다. 전시 디자인 콘셉트가 궁금하다.
주 관람객인 청소년과 청년층의 니즈를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특히 그들이 번화가와 공원에서 편안함을 느낀다는 점에 주목해 공간 설계에 앞서 이스트 뱅크 내 번화가와 공원을 면밀히 살펴봤다. 간판, 네온사인 등 거리 풍경에서 착안해 각 섹션을 디자인하고, 작품 라벨은 슈퍼마켓에서 흔히 보이는 표기 방식에서 영감을 받았다. 전시대도 마찬가지다. 동네 마트에서는 종종 플라스틱 상자 위에 합판을 얹고, 그 위에 천을 덮어 좌대로 쓰곤 한다. 플라스틱 상자를 목재 스택으로 바꾸고, 천 대신 금속 상판을 얹어 전시대를 만들었다. 공원에서 느낄 수 있는 개방감을 갤러리 입구에서 보여 주고자 했다. 실제로 뮤지엄이 위치한 올림픽 파크와 시각적 연결을 고려해 설계하기도 했다.
모듈성과 적응성을 공간 설계의 핵심 원칙으로 삼았다.
번화가와 공원이 그렇듯 이 갤러리가 살아 있는 공간이기를 바랐다. 그러려면 전시물을 쉽게 교체할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재조립보다 재구성을 염두에 두고 모듈형 공간을 설계했다. 1월에 갤러리를 찾은 사람이 3월에 재방문했을 때 분명한 변화가 느껴지게 하는 것이 우리의 목표였다.
V&A 이스트 유스 컬렉티브가 기획 초기부터 함께했다고 들었다.
V&A 이스트 유스 컬렉티브는 16~24세의 이스트런던 거주자로 구성된 그룹이다. 이들과 장장 4년에 걸쳐 협업을 이어왔다. 그 과정에서 최종 결과물보다는 청소년들과 함께 공간을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고자 했다. ‘누구를 위해 디자인하는가’보다 ‘누구와 함께 디자인하는가’에 초점을 맞췄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그들은 공간 디자이너 선정부터 뮤지엄 운영 방식, 심지어 갤러리 내 레스토랑 메뉴에도 관여했다. 초기 기획 단계부터 호흡을 맞춰 온 덕분에 큰 어려움은 없었다. 다만 예상 밖이었던 점도 있었다. 청소년들이 디지털 아트에 더 관심을 보일 줄 알았는데, 막상 이야기 나눠보니 아름다운 오브제에 대한 갈망이 훨씬 컸다. 특히 이스트런던 지역과 관련된 오브제에 큰 관심을 보여 흥미로웠다.

래리 아치암퐁(Larry Achiampong), 어 프랙티스 오브 에브리데이 라이프(A Practice for Everyday Life)와의 협업 과정도 궁금하다.
협업 작가를 선정하는 기준은 분명했다. 일과 삶의 터전으로서 이스트런던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을 것. 래리 아치암퐁은 이스트런던의 베스널그린 출신이다. 갤러리가 오브제를 보여 주는 공간이기만 해서는 안 된다는 그의 의견에 따라 상설관 내에 여유 공간을 마련했다. 공간에는 비용이 따르기 마련인데, 빈 공간을 만들자고 제안하고 설득하는 데까지 성공했으니 이번 프로젝트에서 큰 역할을 한 셈이다. 여성 듀오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어 프랙티스 오브 에브리데이 라이프’는 V&A 이스트 유스 컬렉티브와 협업해 도시의 밤에서 영감을 받은 모듈형 서체 갤러리 타이틀을 제작했다. 만드는 행위와 감각을 서체를 통해 전달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전체 건축을 맡은 오도넬 앤드 투미와의 호흡은 어땠나?
춤을 추는 것에 비교할 수 있다. 상대방의 의견을 따라야 할 때도 있었고, 주도권을 잡고 이끌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오도넬 앤드 투미는 갤러리 디자인에 직접 관여하기보다 뮤지엄 전반의 건축적 특징, 이를테면 창문과 입구의 위치 같은 필수 정보를 알려 주었다. V&A 이스트 뮤지엄의 건축은 안과 밖이 유기적으로 흐르는 게 특징인데 상설관 역시 그 연장선에서 디자인하고자 했다. 그래서 뮤지엄 입구에서 몇 발자국만 떼면 갤러리 안이 들여다보이도록 설계하고, 그 위치에 벤치를 설치하자고 제안했다.
청소년 외에 이 뮤지엄을 경험해 보길 바라는 관객층이 있다면?
V&A 이스트 뮤지엄은 전례 없는 공간이다. 전통적인 갤러리의 형식을 따르면서도 관람객 스스로 작품 사이에서 뛰놀 수 있는 해석의 여지를 열어두었다. 젊은 사람의 시선에서 출발한 뮤지엄이지만 나이 든 관객을 배제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상설관의 첫 섹션인 ‘Our Place in the World’는 자신을 둘러싼 것들과 어떤 관계를 맺고 싶은지 묻는 공간이다. 이 질문에는 결코 나이 제한이 없다.

V&A 이스트 뮤지엄
건축 설계 오도넬 앤드 투미
상설관 디자인 JA 프로젝트, 어 프랙티스 오브 에브리데이 라이프, 래리 아치암퐁
숍 디자인 Studio Mutt
웨이파인딩 디자인 Fieldwork Facility
주소 107 Carpenters Rd, Stratford Cross, London E20 2AR, UK
인스타그램 @vam_eas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