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그릇의 수프에 담긴 디자인, 〈생명으로서의 수프〉
수프 한 그릇이 건네는 감각의 탐구
일본 도쿄 21_21 디자인사이트에서 오는 2026년 8월 9일까지 기획전 〈생명으로서의 수프〉가 열리고 있다. 이 전시는 재료의 가능성, 역사, 신체 감각, 그릇 등이 얽힌 한 그릇의 수프를 통해 외부와 내부 세계가 만나 생활 환경을 형성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평소 의식하지 못한 요소와 물질적 존재감에 주목하며 가열 과정, 주변 환경, 미세한 움직임을 통해 먹는 행위와 기억, 감각을 탐구한다.

수프가 주는 이미지는 든든하고도 부드럽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수프는 늘 그 자리에 있었다. 풍요와 빈곤을 막론하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온기를 건네고 삶을 지탱해 왔다. 일본의 디자이너 나츠미 도야마(Toyama Natsumi)는 이러한 수프의 다층적인 의미에 주목해왔다. 그는 “의복과 주거가 몸을 바깥에서 감싸는 것이라면, 음식은 몸을 안에서 감싸는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출발한 전시 〈생명으로서의 수프(Soup as Life)〉는 수프를 매개로 음식, 의복, 주거의 근원을 다시 사유하도록 이끈다.



한 그릇의 수프 안에는 재료가 지닌 가능성과 열이 만들어내는 변화, 지역의 역사, 먹는 이의 신체 감각, 수프를 담는 그릇과 식사 공간의 분위기까지 층층이 얽혀 있다. 작은 그릇 안에서 외부 세계와 내부 세계가 만나 하나의 생활 환경을 형성하는 것이다. 그는 이를 ‘몸이 감싸여 있는 상태(body being wrapped)’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전시는 물과 소금처럼 평소에는 쉽게 의식하지 못하는 요소들과 채소와 곡물 같은 재료가 지닌 물질적 존재감에 주목한다. 재료가 가열되며 변화하는 과정, 그릇과 주변 환경, 숟가락의 미세한 움직임에 반응하는 방식은 결국 먹는 행위와 기억, 냄새, 신체 감각에 대한 탐구로 이어진다.



열두 개의 동사로 탐색하는 생명의 순환

전시 공간은 열두 개의 동사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감싸다(To Wrap)’, ‘맛보다(To Taste)’, ‘채우다(To Fulfill)’, ‘나누다(To Share)’ 등의 동사는 단순한 행동을 넘어 생명의 순환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의 언어이자 구조로 기능한다. 관람객은 각각의 동사가 부여된 공간을 이동하며 자신의 감각이 어떻게 변화하는지 체험하게 된다.

의식주는 감싸고, 채우고, 연결하고, 나누며 다시 태어나는 생명의 과정으로 번역된다. 이때 수프는 모든 동사가 만나는 접점이자 몸과 환경, 기억과 시간을 연결하는 상징적 매개체로 작동하게 된다. 입구에서는 전시장 지도가 담긴 봉투가 제공되는데, 관람객은 전시장 곳곳에 배치된 수프 레시피를 수집해 봉투에 차곡차곡 담을 수 있다. 마치 편지를 모으듯, 레시피는 전시장 밖으로도 이어진다.
양수에서 시작된 ‘첫 번째 수프’

갤러리 1에 설치된 작품 ‘첫 번째 수프’는 전시의 핵심 개념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작품의 중심에는 염도 0.9%의 식염수가 담긴 용기가 놓여 있는데, 이는 인간의 양수와 동일한 농도다. 용기에서 뻗어 나오는 ‘초사(緒絲)’는 누에가 고치를 만들기 위해 처음 뽑아내는 실을 의미한다. 여기에 사운드 아티스트 오카 도쿠로(Tokuro Oka)의 음향 작업이 더해져 어머니의 심장 박동을 연상시키는 소리가 공간을 채운다. 관람객은 이를 통해 태어나기 전 양수에 둘러싸여 있던 순간, 작가가 말하는 ‘첫 번째 수프’를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된다.


(오른쪽) Tokuro Oka, ‘Omoyu (Rice Water): A Recipe Video’(Partial view), Exit of Gallery 2. 사진 Keizo Kioku

또 다른 공간에는 흙을 섞어 만든 일본 전통 화지인 ‘츠치가미(Tsuchigami)’로 제작된 대형 지붕이 설치된다. 관람객은 그 아래에서 옛 부엌 풍경과 화롯가 조리 장면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들을 마주하며 음식, 의복, 주거와 관련된 인간의 원초적인 활동을 되짚어 볼 수 있다.
수프를 둘러싼 풍경들
전시에 참여한 세 명의 작가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수프의 물질성과 기억에 접근한다. 그릇, 채소, 묽은 쌀죽. 이 세 가지 소재는 서로 다른 손을 거치면서도 하나의 질문으로 수렴한다. 음식은 몸에 닿기 전에 무엇이었는가.


오카모토 노리아키(Noriaki Okamoto)는 도예가인 니카이도 아키히로(Akihiro Nikaido)가 제작한 노야키(noyaki) 기법의 그릇을 활용해 원초적인 식사의 풍경을 재현한다. 가마 없이 야외에서 직접 불을 피워 구워내는 노야키 기법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더욱 직접적으로 드러낸다.


하야시 교타로(Kyotaro Hayashi)는 채소가 수프로 변화하기도 하고 직물로 변형되기도 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음식과 의복이 모두 몸을 감싸는 행위라는 전시의 핵심 개념을 시각화한다. 오카와의 도예가 기무라 하지메(Hajime Kimura)는 몸이 아플 때 먹는 전통 음식인 ‘오모유(重湯)’를 소재로 작업한다. 토기에 담긴 묽은 쌀죽과 사운드는 음식이 지닌 치유와 돌봄의 기억을 환기시킨다.

전시장에는 그림책 작가이자 예술가인 타시마 세이조(Seizo Tashima)의 원화도 함께 소개된다. 타시마의 드로잉은 이번 전시의 포스터와 그래픽 디자인에 활용됐으며, 수프를 주제로 한 작품들이 별도로 전시된다. 또한 요리 연구가 타츠미 요시코(Yoshiko Tatsumi)의 에세이와 우표, 엽서, 전단지 등 전시의 영감이 된 자료들도 함께 공개돼 기획 과정의 흔적을 보여준다.
몸을 감싸는 가장 오래된 방식




양수 속에 잠겨 있던 감각, 가족과 식탁을 공유하는 시간, 아플 때 몸으로 받아들이는 돌봄의 형식. 수프는 이 세 가지를 하나의 그릇 안에 담는다. 서로 다른 경험처럼 보이지만, 몸이 무언가에 의해 감싸인다는 점에서 같은 결을 가진다. 전시는 수프가 작동하고 있는 방식을 읽는다. 재료와 열, 그릇과 공간, 먹는 사람의 몸이 서로 관계를 맺는 그 과정 안에서 디자인적 감수성이 어떻게 오래전부터 존재해왔는지를 조용히 드러낸다. 이는 디자인을 문제 해결의 도구로 보는 시각과는 다른 접근이다. 기능을 최적화하거나 형태를 다듬는 대신, 몸과 환경 사이에서 이미 일어나고 있는 일을 포착하고 번역하는 실천으로서의 디자인. 전시는 그 가능성을 수프라는 가장 오래된 형식 안에서 조용히 길어 올린다.
21_21 DESIGN SIGHT 기획전 〈생명으로서의 수프〉
주소 21_21 DESIGN SIGHT
기간 2026년 3월 27일 ~ 8월 9일 (매주 화요일 휴관)
관람시간 10:00~19:00 (입장 마감 18:30)
주최 21_21 DESIGN SIGHT, THE MIYAKE ISSEY FOUNDATION
후원 Agency for Cultural Affairs, Ministry of Economy, Trade and Industry, MINATO CITY BOARD OF EDUCATION
특별 협찬 Mitsui Fudosan Co., Ltd.
협찬 MIYAKE DESIGN STUDIO, ISSEY MIYAKE INC.
전시 디렉터 토야마 나츠미(Natsumi Toyama)
아트 디렉터 타나카 요시히사(Yoshihisa Tanaka)
그래픽 디자인 센터 Inc.(centre Inc.)
공간 디자인 츠네야마 미오 + 노우사쿠 후미노리(Mio Tsuneyama + Fuminori Nousaku)
사운드 디자인 오카 토쿠로(Tokuro Oka)
텍스트 야스다 소노카(Sonoka Yasuda)
기획 협력 코이케 카즈코(Kazuko Koik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