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니스 비엔날레에 입주한 첫 럭셔리 브랜드 불가리

‘브랜드 파빌리온’이라는 새 질서

불가리가 베니스 비엔날레 자르디니에 브랜드 파빌리온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선보였다. 장기 파트너십을 통해 럭셔리 브랜드와 예술 제도의 새로운 관계를 제시한 것.

베니스 비엔날레에 입주한 첫 럭셔리 브랜드 불가리

세공 기술로 4000년을 버텨온 메종이, 여섯 달 안에 스스로 변색되어 사라지는 작품을 골랐다.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기술과 미감, 그것이 이 럭셔리 브랜드가 한 세기 넘게 쌓아온 서사다. 그런데 그 브랜드가 공식 파빌리온에 들인 것은 조명이 켜지는 순간부터 이미 달라지기 시작하는 작품이었다. 역설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가장 정직한 선택일지 모른다. 유산이란 본래 고정된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라는 사실을, 브랜드가 스스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20260729021736 2
불가리 파빌리온, 제61회 베니스 비엔날레, 2026. 사진 Andrea Rossetti.

불가리는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자르디니에 국가관도, 독립 재단도 아닌 브랜드 파빌리온이라는 새로운 범주를 하나 더했다. 한 세기가 넘도록 국가의 이름으로만 채워져 온 이 국제적인 미술 행사에 주얼리 메종이 들어선 일은 단순한 후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60여 개의 국가관들이 즐비한 자르디니 공원 중앙의 열린 공간, 스파치오 에세드라(Spazio Esedra)에 자리한 이 파빌리온은 2026년, 2028년, 2030년 세 차례의 에디션에 걸친 단독 파트너십으로 운영된다. 비엔날레 역사상 럭셔리 브랜드에 이렇게 긴 호흡의 단독 지위가 주어진 것은 처음이며, 단발성 협업이 아니라, 제도와의 관계를 장기적으로 설계하는 방식이라는 점에서 더욱 눈에 띈다.

20260729021755 3
라라 파바레토, Momentary Monument – The Library (순간의 기념비 – 도서관) 사진 T-Space.
올해 베니스 비엔날레 공식 부대 행사로 폰다치오네 불가리(Fondazione Bvlgari)가 산 마르코 광장의 국립 마르치아나 도서관(Biblioteca Nazionale Marciana)에서 라라 파바레토(Lara Favaretto)와 모니아 벤 하무다(Monia Ben Hamouda)의 장소특정형 설치 작업을 선보였다.

지금까지 럭셔리 하우스가 비엔날레에 참여하는 방식은 크게 세 가지였다. 케링(Kering)의 팔라초 그라시(Palazzo Grassi)나 폰다치오네 프라다(Fondazione Prada)처럼 비엔날레 인근에 독립 공간을 운영하거나, 발렌티노(Valentino)나 제냐(Zegna)처럼 특정 국가관을 에디션 단위로 후원하거나, 재단을 통해 작가상을 운영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들 관계는 대부분 한 에디션이 끝나면 일단락된다. 반면 불가리의 선택은 한 번의 노출보다 기관과의 지속적인 결속을 더 중시한다는 점에서 결이 다르다. 브랜드의 이러한 후원 방식은 이미 여러 장면에서 예고돼 왔다.

팔라초 두칼레(Palazzo Ducale)의 스칼라 도로(Scala d’Oro) 복원을 시작으로, 스페인 계단(Scalinata di Trinità dei Monti), 카라칼라 욕장(Terme di Caracalla), 토를로니아 컬렉션(Collezione Torlonia) 복원으로 이어졌고, 2017년에는 MAXXI와 파트너십을 맺어 이듬해 MAXXI 불가리 프라이즈(MAXXI Bulgari Prize)를 출범시켰다. 이어 2024년 휘트니 비엔날레(Whitney Biennial) 파트너십과 폰다치오네 불가리(Fondazione Bulgari) 설립까지 연결되며, 불가리의 문화 전략은 점점 더 분명한 윤곽을 갖추게 됐다.

20260729021813 4
모니마 벤 하무다, Fragments of Fire Worship(불의 신앙의 파편) 사진 T-Space.

일련의 지난 행보에서 읽히는 것은 일회성 노출이 아니라, 기관과의 장기 관계를 브랜드의 핵심 자산으로 삼는 태도다. 불가리 부 CEO 로라 부르데세(Laura Burdese)의 발언 역시 이 방향을 뒷받침한다. 그는 비엔날레의 파빌리온 참여를 단순한 스폰서십이 아니라, 불가리의 후원 개념이 진화한 결과로 설명하며, 살아 있는 작가와 자유로운 표현을 지원하는 일은 기념물을 복원하는 일만큼 필수적이라고 말한다. 이번 비엔날레 파빌리온 또한 기관과 함께, 오래 지속될 무언가를 만드는 것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20260729021901 5
불가리 파빌리온, 베니스 비엔날레 2026. 제공: 작가, 불가리(Bvlgari), 커먼웰스 앤드 카운슬(Commonwealth and Council), 프란츠 카카(Franz Kaka), 국제갤러리(Kukje Gallery), 에스더 쉬퍼(Esther Schipper, 베를린·파리·서울). 사진 Andrea Rossetti.
20260729021906 6
불가리 파빌리온, 베니스 비엔날레 2026. 제공: 작가, 불가리(Bvlgari), 커먼웰스 앤드 카운슬(Commonwealth and Council), 프란츠 카카(Franz Kaka), 국제갤러리(Kukje Gallery), 에스더 쉬퍼(Esther Schipper, 베를린·파리·서울). 사진 T-Space.

파빌리온의 첫 전시는 한국계 캐나다인 작가 로터스 L. 강(Lotus L. Kang)의 신작 커미션〈The Face of Desire Is Loss〉로 구성됐다. 작가는 서울 국제갤러리(Kukje Gallery)와 베를린·파리·서울의 에스터 쉬퍼(Esther Schipper)의 소속 작가이며, 구겐하임 펠로십 수상자이자 2024년 휘트니 비엔날레 참여로 국제적인 주목을 받았다. 그의 작업을 관통하는 재료는 미정착 감광 필름이다. 빛과 습도에 반응해 스스로 변색되도록 내버려두는 이 필름은, 보존과 훼손이 하나의 동작 안에 공존하는 물질이다.

20260729022024 9
불가리 파빌리온, 베니스 비엔날레 2026. 제공: 작가, 불가리(Bvlgari), 커먼웰스 앤드 카운슬(Commonwealth and Council), 프란츠 카카(Franz Kaka), 국제갤러리(Kukje Gallery), 에스더 쉬퍼(Esther Schipper, 베를린·파리·서울). 사진 Andrea Rossetti.

이번 전시에서도 작가는 한국 갯벌에서 촬영한 35밀리 셀룰로이드 필름으로 파빌리온의 세 면 유리창을 덮었다. 내부에는 연꽃 뿌리의 형태를 본뜬 천공 강철 수퍼조이스트(superjoist)에서 대형 미정착 필름 시트, 작가가 ‘스킨(skin)’이라 부르는 것들이 드리워져 있다. 조명이 켜지는 순간부터 스킨은 이미 다른 것이 되어가기 시작하고, 비엔날레가 열리는 여섯 달 동안 그 변화는 멈추지 않는다. 바닥에는 우는 새끼 새를 석고로 주조한 조각들과 불교에서 영혼이 죽음과 환생 사이에 머무는 날수를 상징하는 49개의 술병이 놓여 있다. 삶과 죽음, 보존과 소멸, 도착과 이탈이 하나의 공간 안에서 동시에 진행되는 이 작업은 무엇이 유산으로 남는가라는 질문을 관람객에게 조용히 던진다.

20260729022041 10
베니스 비엔날레 자르디니 중앙 전시장 외관. 사진 Andrea Avezzù.

한편 이번 파트너십을 후원이 아니라 편입으로 읽는 시선도 있다. 기업 자본이 복원 사업과 작가상, 그리고 파빌리온을 거치며 비엔날레의 공식 구조 안에 서서히 새겨질 때, 후원과 제도의 경계가 흐려질 수 있다는 우려다. 이 지적은 물론 타당하다. 다만 그 경계가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앞으로 이 파빌리온에서 선보일 전시들이 차례로 보고 평가해도 늦지 않다. 올해 전시는 대대로 물려온 세공 기술을 정체성으로 내세워 온 메종이, 오히려 유산의 불안정성을 물질로 드러내는 작업을 택했다는 점에서 그 자체로 하나의 답이었다. 다음 에디션들이 이 긴장을 유지할 수 있는지, 그것이 이 파트너십의 진짜 시험대가 될 것이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