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밖에서 만나는 해외 거장들의 전시
장 미셸 오토니엘, 시오타 치하루, A.A.무라카미가 펼치는 감각의 세계
부산·대전·인천에서 해외 거장들의 개인전이 잇따라 열리고 있다. 장 미셸 오토니엘은 유리 조각으로 사랑과 치유를, 시오타 치하루는 붉은 실과 오브제로 기억과 부재를, 그리고 A.A.무라카미는 비눗방울·안개·기술을 결합해 자연의 생성과 소멸을 이야기한다.

이번 가을, 국내 곳곳에서 해외 거장들의 개인전이 나란히 개막한다. 부산 F1963에서는 유리 조각가 장 미셸 오토니엘(Jean-Michel Othoniel)이 부산 첫 개인전을 연다. 대전으로 눈을 돌리면 헤레디움에서 붉은 실의 설치미술가 시오타 치하루(Chiharu Shiota)가 신작을 최초 공개하고, 인천의 파라다이스시티는 프리즈 서울 시즌에 맞춰 4년째 이어온 대형 기획전으로 아티스트 듀오 A.A.무라카미의 한국 첫 개인전을 선보인다. 서로 다른 장소에서 펼쳐지는 감도 높은 세 전시를 지금 만나보자.
사랑은 고통을 감싸안는 힘, 장 미셸 오토니엘 개인전 〈사랑 안의 미로〉
기간 2026년 8월 28일 ~ 12월 31일
장소 F1963 석천홀 및 달빛가든 (부산)

프랑스를 대표하는 현대미술가 장 미셸 오토니엘의 부산 첫 개인전 〈사랑 안의 미로(In the Labyrinth of Love)〉가 F1963에서 열린다. 이번 전시는 문화재단 1963이 주최하고 2028 세계디자인수도(WDC) 부산의 공식 협력 전시로 추진된다. 2025년 프랑스 아비뇽 교황청 등 10개 장소에서 개최한 대규모 회고전 〈오토니 엘 코스모스 혹은 사랑의 유령(OTHONIEL COSMOS or the Ghosts of Love)〉을 바탕으로 F1963 공간에 맞춰 새롭게 구성했으며, 최근 2년간 제작한 대표작 100여 점을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달빛가든에 설치된 ‘황금 연꽃(Gold Lotus)'(2023)에서 시작해 석천홀로 이어진다. 공중에 매달린 ‘매달린 연인(Amant Suspendu)’과 ‘목걸이(Collier)’ 연작, 약 2,000개의 유리벽돌로 강의 흐름을 형상화한 ‘푸른 강(Rivière Bleue)'(2026)이 화려한 빛으로 공간을 채운다.

오토니엘에게 유리는 액체에서 고체로 굳는 과정에서 기포와 흠집을 그대로 품는, 상처와 아름다움이 공존하는 재료다. 1993년부터 이탈리아 무라노의 유리 장인들과 협업해 온 그는 이 과정을 상처를 보듬고 회복하는 행위로 여긴다. 전시 후반부는 지름 4미터 크기의 ‘코스모스(Cosmos)’와 열두 별자리를 형상화한 ‘황도 십이궁(Zodiac)’ 연작으로 이어지며 사랑과 치유라는 개인의 서사를 우주의 질서로 확장한다.

전시의 마지막은 유리 벽돌이 모듈로 기능하는 ‘원더 블록(Wonder Block)’, ‘프레셔스 스톤월(Precious Stonewall)’, ‘오라클(Oracle)’ 연작이 장식한다. 오토니엘은 2010년 인도의 소도시 피로자바드를 여행하던 중 언젠가 자신의 집을 짓기 위해 흙벽돌을 하나씩 쌓아둔 현지 사람들을 마주했다. 이 경험은 그에게 벽돌을 단순한 건축 재료가 아니라 삶과 미래를 향한 희망의 기본 단위로 바라보게 했고, 이는 유리벽돌을 작업의 핵심 모듈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된다.

전시가 열리는 F1963은 1963년 고려제강의 와이어 공장으로 출발해 반세기 넘게 산업 생산의 현장이었던 곳으로, 오늘날 그 흔적을 간직한 채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하고 있다. 과거를 지우기보다 그대로 보존하며 시간을 켜켜이 축적해 온 이 장소성은 상처를 지우는 대신 빛의 감각으로 아름답게 보듬는 오토니엘의 작업과 자연스럽게 공명한다. 그에게 사랑은 고통을 지우는 감정이 아니라 그것을 감싸안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힘이다.
붉은 실이 엮어낸 인연의 궤적, 시오타 치하루 개인전 〈기억의 빛 속으로〉
기간 2026년 8월 30일 ~ 2027년 2월 21일
장소 헤레디움·아트사이트 소제 (대전)

베를린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일본 작가 시오타 치하루는 오랫동안 사물에 깃든 이미지의 흔적, ‘부재 속의 존재감(Presence in Absence)’을 탐구해 온 작가다. 프랑스 철학자 가스통 바슐라르가 사물과 장소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잊힌 시간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 잠들어 있던 기억을 현재로 불러온다고 썼듯, 그의 작업은 이러한 이미지의 힘을 오랜 화두로 삼아 왔다.

시오타 치하루의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전시 〈기억의 빛 속으로〉가 대전 헤레디움과 아트사이트 소제 두 공간에서 열린다.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일본관 대표 작가로 선정된 이후 세계 주요 미술관과 도시를 무대로 활동해 온 작가는 붉은 실과 검은 실로 의자·침대·신발·열쇠 같은 일상 오브제를 얽어 기억과 부재, 삶과 죽음을 시각화하는 대규모 설치로 알려져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설치 3점, 평면 14점, 입체 오브제 10점, 영상 1점 등 총 28점을 선보이며, 소제동과 인동 등 대전 원도심이 품은 역사와 기억을 따라 이어지는 대형 설치 신작을 세계 최초로 공개한다.

작가는 신체에 닿았던 옷을 ‘제2의 피부’, 인간을 감싸는 집과 문, 창문을 ‘제3의 피부’로 정의한다. 이 사물과 공간들은 비어 있는 구조물이 아니라, 한때 그곳에 머물렀던 사람들의 숨결과 온기, 스쳐 지나간 감정의 궤적이 쌓여 있는 감각의 매개체다. 대전에서 수집한 버려진 문들로 구성한 대형 설치 ‘In the Light of Memory'(2026)는 서로 다른 시간과 기억을 품은 하나의 공간으로 관람객을 이끈다.

2층에서는 시어머니를 향한 개인적 기억을 담은 영상 신작 ‘Memories Resurface'(2026)도 함께 공개된다. 작가는 이 작품의 노트에서 “지금을 살아가는 것. 건강한 것. 오늘 먹을 것이 있다는 것. 그리고 소중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챙겨주는 것. 그것만으로도 사람은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나는 할머니에게서 배웠다”라고 말한다.

한편, 전시가 열리는 헤레디움은 1922년 지어진 옛 동양척식주식회사 대전지점을 복원한 공간이다. 2004년 문화재로 등록된 이 건물은 고증 자료와 분석을 바탕으로 원형을 살린 복원 작업을 거쳐 2022년 12월 준공, 2023년 9월 공식 개관했다. 헤레디움에는 ‘유산으로 물려받은 토지’라는 뜻이 담겨 있다. 그 이름처럼 근대문화유산이자 현대 예술과 지역 예술가가 공존하는 플랫폼으로 기능한다. 지운 자리에 새로 짓는 대신 흔적을 그대로 끌어안은 채 새 쓰임을 얻은 이 공간은 오브제에 남은 이들의 흔적을 지우지 않고 실로 엮어내는 시오타의 방식과 자연스럽게 조우한다.
기술로 다시 설계한 자연, A.A.무라카미 개인전 〈New Nature〉
기간 2026년 9월 1일 ~ 2027년 2월 10일
장소 파라다이스시티 아트스페이스 (인천)

파라다이스시티는 아즈사 무라카미(Azusa Murakami, b. 1984)와 알렉산더 그로브스(Alexander Groves, b. 1983)로 구성된 아티스트 듀오 A.A.무라카미의 한국 첫 개인전 〈New Nature〉를 개최한다. 이들은 비눗방울과 안개처럼 형태가 고정되지 않고 사라지는 물질에 첨단 기술을 결합하는 작업을 ‘에페머럴 테크(Ephemeral Tech)’라 명명해 왔다.

아트스페이스 1층에서는 높이 6.4미터의 나무 형상 구조물 ‘뉴 스프링(New Spring)'(2026)이 24개 가지 끝에서 비눗방울을 꽃처럼 피워냈다가 떨어뜨린다. 관람객은 눈앞에서 태어나고 사라지는 비눗방울을 바라보며 다시 반복되지 않는 자연의 한순간을 마주하게 된다. 안개구름과 빛으로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비욘드 더 호라이즌(Beyond the Horizon)'(2026)도 함께 전시된다. 기계 장치는 매번 같은 움직임을 되풀이하지만, 안개와 공기의 흐름에 따라 구름의 모양과 빛은 한 번도 같은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2층에서 세계 최초로 공개되는 신작 ‘머드 페인팅: 천 겹의 위장 시리즈(Mud Paintings From ‘A Thousand Layers of Stomach’ Series)'(2026)는 두 작가가 도쿄에서 된장국을 먹다 발견한 바지락 조개껍질에서 출발한다. 조개가 껍질을 한 겹씩 성장시키는 원리를 생물학적 알고리즘으로 해석해 코드로 변환하고, 전시장 중앙의 자율형 머신이 이 코드에 따라 화폭 위에 패턴을 쌓아 올린다. 순간적으로 사라지는 자연 현상에서 출발한 이들의 작업이 물성을 지닌 형태로 확장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작업이다.

이처럼 A.A.무라카미의 에페머럴 테크 작업은 순간적으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자연 현상을 실제 공간에 만들어내되,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예측 불가능한 변화까지 작품의 일부로 끌어들인다. ‘자연 이후의 자연(Nature after Nature)’이라는 주제 아래, 기술이 자연을 모방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연조차 갖지 못한 통제 불가능성을 스스로 발생시키는 두 작가의 작업 세계가 이번 전시를 통해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