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동길 신아기념관의 특별한 입주민들
1930년대 건물에 자리한 다섯 브랜드
정동길에 자리한 한국 근대 건축물 신아기념관. 오래된 건물에 특별한 입주민들이 모였다. 1층부터 3층까지, 다섯 브랜드의 입점 배경과 이곳에서 전하고자 한 경험을 들었다.

정동길은 느린 속도를 품은 길이다. 1999년 서울시는 정동길을 ‘걷고 싶은 거리’ 1호로 지정했다. 당시 2차선이던 도로를 1차선으로 줄이고, 차가 속도를 내기 어렵도록 길을 구불구불하게 만들었다. 가을이면 산책하는 이들이 계절을 누릴 수 있도록 거리에 쌓인 은행잎과 낙엽을 그대로 둔다. 빠르게 변하는 도심 속에서도 정동길은 걷는 사람의 속도에 맞춰 천천히 이어진다.

그 길 한가운데 붉은 벽돌 건물이 있다. 정동1번지 신아기념관이다. 1930년대 지어져 미국 싱거미싱회사의 한국지부로 쓰였던 건물로, 이후 신아일보 별관 등을 거치며 오랜 시간을 견뎌왔다. 외국인 고문관의 숙소로 쓰이던 시절에는 ‘졸리 하우스(Jolly House)’, 즐거운 집이라는 애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2008년 국가등록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이곳에는 현재 기념관과 사무실, 상업 공간이 함께 자리한다.
최근 몇 년 사이 이곳에 브랜드들이 하나둘 들어섰다. 빈티지 테이블웨어와 공예품을 다루는 ‘라파르마’, 도자 브랜드 ‘소일베이커’, 문구 브랜드 ‘트롤스페이퍼’, 홈웨어 브랜드 ‘조스라운지’, 의류 브랜드 ‘가정식패브릭’. 다섯 브랜드가 다루는 물건은 저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이들이 신아기념관을 선택한 이유와 지향을 들여다보면 닮은 점이 있다.

입고창신(入古創新)
입점 기준이라도 따로 있는 걸까. 신아기념관 관리실에 입점 과정에 대해 물었다. 하지만 정해진 심사 절차도, 입주자 인터뷰도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입점을 원하는 이들이 명함이나 연락처를 남겨두면 공실이 생겼을 때 공간의 조건에 맞춰 연락하는 방식이다. 대신 건물이 공유하는 철학이 있다. ‘입고창신(入古創新)’. 옛것으로 들어가 새로운 것을 만들어낸다는 뜻이다.
관리실은 이를 신아기념관의 ‘브랜드’라고 표현한다. 리노베이션부터 건물 관리까지 모든 판단의 기준이 입고창신에서 비롯한다. 과거의 흔적을 간직한 건축물 안에서 새로운 쓰임과 가치를 만드는 것. 그 가치에 공감하는 브랜드들이 자연스럽게 모였다. 한 번 들어온 브랜드는 좀처럼 나가지 않는다. 4층의 한 에이전시는 20년 가까이 이곳을 지키고 있다.

1층부터 3층까지, 신아기념관에 자리한 다섯 브랜드에게 이곳에 들어오게 된 계기와 공간에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물었다.
107호 라파르마

신아기념관 1층에 자리한 라파르마(@lapalma__)는 빈티지 테이블웨어와 국내 공예 작가와 협업한 제품, 여러 나라의 수공예품을 소개한다. 여행과 일상,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도자기와 작은 공예품도 국내 공방과 협업해 선보인다.

1930년대의 흔적과 디테일을 간직한 신아기념관 건물의 모습은 여러 시대와 사람의 손을 거쳐온 물건을 다루는 라파르마와 닮아 있었다. 라파르마가 이곳을 눈여겨본 이유다. 온라인으로만 숍을 운영하며 공간에 대한 아쉬움을 느끼던 차에 건물에 직접 연락했고, 마침 일주일 전 공실이 생겼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다른 곳은 알아보지도 않고 바로 계약했다고.

100여 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다정하고 포근한 인상을 주는 신아기념관. 라파르마는 사진으로만 소개하기 아쉬웠던 제품을 이곳에서 직접 선보이며, 오래된 물건이 지닌 이야기와 쓰임을 전하고자 한다. 빠르게 변하는 서울에서 오래 자리를 지키며, 계절마다 찾아오는 이들에게 선물 같은 기억을 건네고자 한다.
202호 소일베이커

‘흙을 굽는 사람’이라는 뜻을 품은 소일베이커(@soilbaker). 뉴욕에서 산업 디자인과 요리를 전공한 양혜린 대표가 만든 테이블웨어 브랜드다. 요리의 정성과 먹는 즐거움을 담은 실용적이고 감각적인 식기를 제안한다. 소일베이커는 다섯 브랜드 중 가장 먼저 신아기념관에 들어왔다. 처음 공간을 보는 순간 이곳에 놓인 소일베이커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그려졌다.


단순한 상업시설이 아니라 문화가 축적되는 공간이 되고 싶다는 신아기념관의 방향에 공감했다. 역사와 일상이 공존하는 정동의 분위기도 마음에 들었다. 유행에 따라 시시각각 변하는 상권보다 시간이 쌓이며 브랜드의 이야기를 만들어갈 수 있는 환경은 소일베이커의 지향점과도 맞닿아 있다.



소일베이커가 이곳에서 전하고 싶은 것은 제품만이 아니다. 물건에 담긴 시간과 만들어지는 과정까지 천천히 바라볼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다. 신아기념관이 여러 브랜드와 작가를 소개하듯, 소일베이커 역시 협업과 전시를 통해 새로운 만남을 만들어간다. 여행을 다녀온 뒤 장소만이 아니라 그날의 날씨와 공기, 함께한 사람과 머물렀던 공간까지 기억에 남듯, 정동을 걷고 신아기념관을 둘러보는 하루 속에 소일베이커가 자연스럽게 남기를 바란다.
203호 트롤스페이퍼



2018년 그래픽 디자이너와 공간 디자이너가 함께 만든 스테이셔너리 브랜드 트롤스페이퍼(@trollspaper). 종이를 매개로 창작의 도구를 만들며, 종이 본연의 촉감과 질감을 깊이 있게 다룬다. 다섯 브랜드 중 가장 최근 문을 연 곳이자 첫 오프라인 쇼룸이다. 두 대표는 오래전부터 정동길과 신아기념관을 좋아했다. 서울에서 드물게 시간이 흘러도 고유한 정취를 간직한 장소였다. 오래된 건물 안에 각자의 색으로 자리한 브랜드 공간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신아기념관과의 인연은 전시에서 시작됐다. 2024년부터 2025년까지 3층 가정식패브릭에서 두 차례에 걸쳐 〈미색종이전〉을 열었다. 전시를 이어가며 신아기념관과 자연스럽게 관계를 쌓았고, 서로 이야기를 나눌 기회도 늘었다.



2025년 12월, 2층 갤러리 모순이 이전하면서 신아기념관 측에서 먼저 입점을 제안했다. 문화적인 공간을 만들어가려는 신아기념관의 방향과 트롤스페이퍼가 잘 맞을 것 같다는 이유에서였다. 트롤스페이퍼 역시 특별한 기회라고 생각해 망설임 없이 입점을 결정했다. 2월 공사를 시작해 2026년 3월 중순 쇼룸의 문을 열었다. 이제 이곳에서 트롤스페이퍼만의 이야기를 차근차근 쌓아갈 예정이다.
205호 조스라운지



조스라운지(@joslounge)는 2016년 디자이너 조명기(이하 JO)가 만든 서울 기반의 홈웨어·라이프스타일 브랜드다. 편안한 실내 생활을 위한 파자마와 라운지웨어, 패브릭 소품을 선보인다. 조스라운지 정동은 안국에 이은 두 번째 매장이다. 창업자 JO에게 정동길은 학창 시절 친구들과 분식을 먹던 기억이 남아 있는 길이다. 지금의 서울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속도와 풍경을 품고 있는 점도 이곳에 끌린 이유였다. 신아기념관과의 만남은 우연에 가까웠다. 지인의 소개로 건물을 둘러본 뒤 공간이 마음에 들어 명함 뒤에 짧은 편지를 적어 관리인에게 건넸고, 이를 좋게 봐준 덕분에 입점하게 됐다고.


조스라운지 정동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예상치 못한 발견’이다. 안국이 익숙한 조스라운지를 만나는 곳이라면, 정동은 아직 소개하지 않은 제품이나 한 벌뿐인 파자마처럼 이곳에서만 만날 수 있는 것을 선보이는 공간이다. 화면으로는 전하기 어려운 원단의 촉감도 직접 경험할 수 있다. 공간 역시 새것을 덧대기보다 건물이 가진 것을 최대한 남겼다. 실내복과 침구류를 만드는 브랜드가 ‘집’을 이야기할 때, 새것의 매끈함보다 오래 쓴 것의 편안함이 더 어울린다고 생각했기 때문. 오래된 집처럼 편안한 공간에서 조스라운지의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자 한다.
302호 가정식패브릭



가정식패브릭(@gajungsic_fabric)은 2016년부터 코튼, 리넨, 울 등 천연 소재를 바탕으로 몸이 편안한 느슨한 핏의 의류를 만들고 소개해왔다. 김우정 대표는 정동길을 지날 때마다 신아기념관에 자연스럽게 눈길이 갔다. 2022년 건물 안에 상업 공간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어 문을 두드렸다. 반 년의 기다림 끝에 2023년 서촌 작업실을 이곳 3층으로 옮겼다.


이전에는 작업실과 쇼룸을 한 공간에서 운영했다. 2023년 신아기념관으로 옮긴 뒤로는 건물과 공간이 지닌 아름다움을 더 많은 사람과 나누고 싶다는 마음을 담아 공간을 새로 꾸렸다. 계절마다 다양한 작가의 공예와 미술 작품을 소개하며, 옷과 작품이 한 공간에서 어우러지는 풍경을 만든다. 작가 전시는 ‘갤러리,에서(@gallery_eseo)’라는 이름으로 이어가고 있다.



3층 창밖으로는 중명전과 커다란 은행나무가 보인다. 계절의 변화가 선명하게 드러나는 이 풍경은 공간의 일부이자 작업과도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창밖의 풍경이 달라지는 동안 옷과 전시도 함께 달라진다. 오래된 건물이 품은 시간과 오늘의 손길이 만나 또 다른 시간을 쌓아가는 곳. 가정식패브릭은 이곳에서 계절마다 다른 감각과 시간을 전하고자 한다.

다시, 입고창신
다섯 브랜드가 다루는 물건은 제각각이다. 그럼에도 이들이 신아기념관을 선택한 이유와 지향을 들여다보면 닮은 점이 있다. 오래 곁에 두고 쓸 물건을 만들고, 빠르게 변하기보다 시간이 쌓이는 가치를 바라본다. 신아기념관이 말하는 ‘입고창신’도 브랜드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유서 깊은 건물의 가치를 지키면서 지금의 쓰임을 더하고, 세상의 변화에 맞춰 각자의 방식으로 새로운 도전을 이어가는 철학이다.

이 정신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다. 100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켜온 건물에 브랜드가 들어오고, 그 브랜드가 다시 다른 브랜드를 불러들이며 서로의 자리에서 전시와 만남을 이어가는 일. 공간과 사람의 인연이 쌓이며 건물의 시간에 새로운 이야기가 더해진다. 정동길을 걷다 붉은 벽돌 건물에 들어서면, 그렇게 이어진 시간의 한 자락을 만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