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러피안 디자인 어워드 2026 금메달 수상작 5

시대의 맥락을 만드는 디자인 스튜디오들

유러피안 디자인 어워드 2026에서 금메달을 수상한 5개 디자인 스튜디오의 주요 작품을 소개한다. 이번 어워드는 동시대의 문화적 맥락과 담론적 가치를 반영하는 수작들을 중심으로 선정했다.

유러피안 디자인 어워드 2026 금메달 수상작 5

유럽의 커뮤니케이션 디자인 우수작을 선정하는 연례 어워드인 유러피안 디자인 어워드(European Design Awards)가 올해 20주년을 맞았다. 2007년 출범 이래, 매년 도시를 옮겨가며 열리는 시상식은 올해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6월 11일부터 14일까지 나흘간 진행됐다. 행사 기획은 스튜디오 콤플렉트(Studio Komplekt)와 멜바 재단(Melba Foundation for Design and Visual Culture)이 맡았다.

이 어워드가 다른 디자인 시상식과 구분되는 지점은 심사 방식에 있다. 심사위원단은 현직 디자이너가 아닌 출판인, 저널리스트, 에디터, 학자로 구성된다. 매출이나 성과보다 문화적 맥락과 담론적 가치를 우선하는 이유다. 올해는 역대 가장 폭넓은 자문 과정을 거쳐 심사 카테고리 체계를 전면 개편한 해이기도 하다. 브랜드 아이덴티티, 패키징, 인포그래픽, 공간 디자인 등 세부 분야를 새롭게 정비하면서, 동시대 디자인 실천을 더 정확히 반영하려는 시도를 드러냈다. 올해 금메달 수상작 가운데 동시대적 가치를 뚜렷이 담아낸 다섯 팀을 소개한다.

엘러리 스튜디오, Heat Pumps, Renewables & Other Hot Stuff

독일 | 클라이언트 유럽 기후 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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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방은 유럽 전체 에너지 소비의 절반을 차지하지만 탈탄소화 속도는 전력, 교통 부문에 비해 뚜렷이 뒤처져 있다. 독일에서는 히트펌프 의무화를 둘러싼 정치적 논쟁이 격렬한데, 정작 EU에서는 이 의제 자체가 충분한 관심을 받지 못한다. 유럽기후재단이 엘러리 스튜디오(Ellery studio)에 의뢰한 68페이지 분량의 컬러링 북은 그 간극을 국회의원과 NGO 실무자가 소화할 수 있는 형태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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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개의 주제별 스프레드는 기술적 원리와 정책적 맥락, 기존 통념에 대한 반박과 사례, 미래 비전을 차례로 배치한다. 손으로 그린 캐릭터 ‘펌피(Pumpi)’가 스프레드마다 등장해 추상적 개념을 구체적인 장면으로 옮기고, 열을 가하면 히트펌프의 내부 구조가 드러나는 열 변색 인쇄도 첫 페이지에 적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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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형식은 유희적 장치를 넘어선다. 색을 칠하는 행위는 눈으로 훑는 것보다 느리고, 손을 더 오래 붙잡아 둔다. 각 스프레드가 독립된 프레젠테이션 자료로도 쓰이도록 설계된 점 역시 이 책이 로비 미팅 현장에서 바로 꺼내 쓸 실무 도구를 겸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 작업의 의의는 그림체가 아니라 발주처의 선택과 형식 설계에 있다. 유럽기후재단이라는 클라이언트는 책이 정책 결정권자를 겨냥한 로비 도구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컬러링 북이라는 형식은 그 결정권자의 제한된 주의력을 붙잡아두기 위한 계산된 전략이다. 인포그래픽의 매력보다 누가 이 정보를 읽어야 하는가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사람을 실제로 붙잡아 둘 수 있는가를 먼저 설계했다는 점에서 차별성을 지닌다.

클레버°프랑케, The first living, AI-driven brand identity

네덜란드 | 클라이언트 AD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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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라이언트인 ADC는 암스테르담에 기반한 AI 전환 컨설팅 회사다. 데이터와 알고리즘을 통해 기업이 데이터와 AI를 실질적으로 도입하도록 인프라와 전략을 설계하는 일을 한다. 데이터 시각화로 이력을 쌓아온 디자인 스튜디오 클레버°프랑케(CLEVER°FRANKE)는 ADC를 위해 변형하는 시각 언어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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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작은 기존 아이덴티티를 점검하는 일이었다. 정적이고 조직의 기술적 깊이와 동떨어져 있다는 진단이 나왔고, 이를 바탕으로 스스로 학습하고 적응하는 시스템을 설계하기로 했다. 시스템이 작동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ADC의 업무, 조직문화, 가치관과 관련된 데이터 100개 이상을 시스템에 학습시켰다. 이때 성격이 비슷한 내용은 서로 가깝게, 다른 내용은 멀게 배치해 분류했다.

또한 누군가 새 프로젝트 설명이나 텍스트를 입력하면, 시스템은 그 내용이 어느 구역에 해당하는지 판단해 어울리는 시각 패턴 세 가지를 제안한다. 사용자가 그중 하나를 고르면 그 선택이 다시 시스템에 기록돼 다음 결과물에 반영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시스템은 쓰일 때마다 조금씩 정교해지고, 같은 재무 보고서 표지라도 연중 시점에 따라 다른 결과물이 나온다. ADC 구성원은 누구나 웹에서 이 도구를 쓸 수 있고, 지금까지 생성된 모든 패턴은 ‘콜렉티브 맵(Collective Map)’이라는 화면에 누적돼 조직 전체의 아이덴티티 흐름을 한눈에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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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과 타이포그래피에도 이 논리는 스며 있다. AI 업계를 지배하는 차갑고 기술적인 미감에서 의도적으로 벗어나 바이올렛, 핑크, 틸, 그린, 골드로 구성된 팔레트를 택했고, 서체는 스튜디오 파이센(Studio Feixen)의 ‘이즈(Ease)’를 택했다. 둥글지도 각지지도 않은 이 서체는 구조와 표현 사이, 즉 AI 모델의 잠재 공간처럼 의미가 형태를 갖춰가는 중간 지대를 시각적으로 은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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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방점은 형태보다 모순의 해결에 있었다. 다양한 환경과 목소리, 활용 방식에 따라 스스로 변화하면서도 일관성은 유지해야 했고, 기술적이고 신뢰감 있는 인상과 따뜻하고 인간적인 인상을 동시에 줘야 했다. 이들이 내놓은 답은 ADC의 사람들과 조직문화, 프로젝트를 학습한 커스텀 AI 모델이다. 이 모델은 아이덴티티의 외형 학습을 넘어 패턴이 어떻게 생성되는지, 어떤 상황에 어떤 표현이 적합한지 함께 학습하도록 설계됐다. 리포트 표지부터 스토리텔링 콘텐츠까지 수백 가지 활용 사례를 거치며 시스템 스스로 시각적 판단을 다듬어간다는 설명은, AI가 조직의 판단 기준 자체를 학습하는 도구로 기획됐다는 점을 보여준다.

올슨 바르비에리, Varus 775

노르웨이 | 클라이언트 바루스 유한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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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뤼브베케에 기반을 둔 가족 경영 증류소인 바루스 775(Varus 775)는 서기 9년 로마 장군 바루스가 게르만족에게 패배한 토이토부르크 숲 전투에서 이름을 따왔다. 로마 제국의 확장을 멈춘 이 전투는 유럽의 라틴 문화권과 게르만 문화권을 가르는 분기점이 됐다. 브랜딩을 담당한 곳이 노르웨이의 디자인 스튜디오 올슨 바르비에리(OlssønBarbieri)라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지역의 역사를 다루는 작업에 이미 바깥의 시선이 개입해 있다.

콘셉트는 전투가 아니라 그 이후의 교류에 초점을 맞춘다. 악수하는 두 손과 상업, 협상, 평화를 상징하는 메르쿠리우스의 지팡이가 새겨진 동전 모티프, 고전 라틴어에 U가 없었다는 사실에서 착안한 VARVS 표기, 리필 가능한 한정판 도자기 용기까지 디테일은 정교하다. 서기 9년의 사건을 갈등이 아니라 교역과 문화적 혼종의 서사로 다시 읽어내는 관점은, 지역 역사를 소재로 삼는 흔한 헤리티지 마케팅과 이 브랜드를 구분 짓는다. 패배의 기록을 연결의 상징으로 뒤집어 읽는 해석 자체가 이 프로젝트의 실질적인 성취다.

포스트 스페큘러티브 오피스, Metabolic Home

그리스 | 제19회 베니스 비엔날레 국제건축전 출품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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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주택을 5분의 1 크기로 축소한 포스트 스페큘러티브 오피스(Post–Spectacular Office)의 설치는 주방, 화장실, 정원, 채광정 등 열 개 공간을 순환 시스템으로 엮는다. 주방의 생활하수는 정원의 수경재배로, 세탁실의 습한 공기는 AI 조절을 거쳐 균사체를 재배하는 채광정으로 흘러간다. 주방 가구는 주방 폐기물로 만든 바이오차 벽돌, 발코니의 벽은 채광정에서 수확한 균사체 블록, 차고의 연료는 분해된 음식물 쓰레기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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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의 성취는 순환이라는 개념을 설명하지 않고 보여줬다는 데 있다. 탈탄소 거주를 다루는 대부분의 전시가 그래프와 다이어그램, 미래 렌더링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과 달리, 이 작업은 열 개 공간을 실제로 잇는 물질의 흐름을 눈앞에 세워둔다. 폐기물이 옆 공간의 자원으로 바뀌는 과정을 추상적 원리가 아니라 걸어 들어가 만질 수 있는 구조로 번역해낸 것이다. ‘지능’을 디지털 기술이 아니라 물질 간 상호 연결성으로 재정의하겠다는 선언은, 이 설치 앞에서는 더 이상 선언에 머물지 않는다. 주방과 발코니, 차고와 채광정을 오가는 폐기물의 경로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면, 어느 순간 집이라는 단위 자체가 순환의 도면으로 다시 읽는 경험을 하게 된다.

디자인, ForestWave – Shipping

네덜란드 | 클라이언트 포레스트웨이브(ForestW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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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박 두 척으로 시작해 서른여섯 척 규모로 성장한 네덜란드 흐로닝언에 기반을 둔 해양 물류회사 포레스트웨이브는 2011년부터 독일 파트너사와 이중 브랜드 체제로 운영되며 회사만의 차별성을 잃었다. 브랜딩 에이전시 디자인(Dizain)은 “포레스트웨이브를 움직이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해 그 답을 사람에게서 찾았다. 화물을 맡기는 고객, 그 약속을 지키는 선원이라는 통찰을 “당신의 신뢰가 우리를 움직인다(Your trust moves us)”라는 슬로건으로 압축했고, 선원의 초상 위에 화물과 항구, 선체의 질감을 겹친 이중노출 사진 스타일로 시각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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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랜드 성격을 규정하는 기준은 업계의 관행이 아니라 로테르담 항구라는 구체적인 장소였다. 실용적이고 활기차며 현대적인 항구의 정서를 꾸밈없고 실용적인 네덜란드식 태도와 겹쳐 읽으며 이를 디자인에 반영했다. 형광 그린과 블랙, 장식을 걷어낸 타이포그래피는 기업식 수사와 해운업계의 관행적 클리셰를 피해 가려는 선택의 결과다. 전통적인 해운회사처럼 보이려 하지 않고, 에너지 넘치고 솔직한 포레스트웨이브 그 자체의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겠다는 태도가 이 팔레트 하나에 압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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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덴티티의 무게는 선언에 그치지 않고 실제로 이행됐다는 데 있다. 문구류와 디지털 플랫폼, 사무실 사인, 선원 유니폼을 거쳐 길이 140미터에 달하는 선박의 외장에까지 같은 시각 언어가 그대로 적용됐다. 브랜드가 종이 위의 시스템에 그치지 않고, 세계 항구를 오가는 물리적 크기로 확장된 것. 리브랜딩이 증명하는 것은 결국 하나다. 파편화된 조직도 하나의 시각 언어로 통합될 수 있고, 대규모 물류 산업에서조차 가장 강력한 시스템은 결국 사람 사이의 신뢰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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