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가을 운경고택에 가야 하는 이유 〈다시 도착한 집〉

낯선 한옥을 만나다

서울 인왕산 자락의 운경고택이 2년 만에 문을 연다. 김동희 개인전 〈다시 도착한 집〉은 땅을 파고 다락을 꺼내며 집에 쌓인 시간을 드러낸다.

올가을 운경고택에 가야 하는 이유 〈다시 도착한 집〉

가을 초입, 사직단 옆 인왕산 자락에 자리한 운경고택이 2년 만에 문을 열었다. 9월 2일 시작하는 김동희 개인전 〈다시 도착한 집〉은 익숙한 한옥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보게 하는 전시다. 작가는 집의 외형을 복제하거나 역사적 이야기를 덧붙이는 대신 땅을 파고, 새로운 길을 만들고, 다락을 바깥으로 꺼내놓는다. 관람객은 오르고 내려가며 고택의 구조를 직접 경험한다. 그 과정에서 평소에는 의식하지 못했던 높낮이와 안팎의 관계, 공간에 쌓인 시간이 모습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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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계단 1’, 2026, 목재에 방수도장.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집이 지나온 자리

1930년대 지어진 이 한옥은 조선시대 도정궁이 있던 터로 알려져 있다. 도정궁은 선조의 아버지 덕흥대원군과 그 사손들이 대대로 살던 집이자, 선조가 왕위에 오르기 전 머물던 잠저(潛邸)다. 1953년 이곳의 한 채를 사들인 사람이 운경 이재형(1914~1992)이다. 선조의 일곱째 아들 인성군의 10대손인 그는 조상이 살던 터로 돌아온다는 뜻에서 이곳을 거처로 삼았다. ‘다시 도착한 집’이라는 이름은 작가가 붙인 은유이기 전에 이 집이 이미 지나온 시간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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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선’,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이재형은 이곳에서 39년을 살았다. 그가 세상을 떠난 이듬해 설립된 운경재단은 이 집을 보존해왔고, 2019년 〈차경, 운경고택을 즐기다〉를 시작으로 전시 기간에만 문을 열고 있다. 2024년 이완 개인전 이후 2년 만에 여는 이번 전시는 네 번째 기획전이다. 기획은 2022년 〈최정화: 당신은 나의 집〉과 이완 개인전을 맡았던 우혜수가 이어서 맡았다. 〈다시 도착한 집〉은 작품을 고택 안에 들여놓는 데 그치지 않고 공간 자체를 들여다본다. 김동희를 전시 작가로 택한 배경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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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넌방 외창’,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김동희(b. 1986)는 공간을 이루는 조건과 구조를 변형해 관람자의 동선과 시선을 다시 조직하는 작업을 이어왔다. 2010년대 초반에는 도시의 틈새와 유휴 공간을 전시장이나 공연장으로 전환했다. 이후 장소를 점유하는 일에서 공간의 구조 자체를 다루는 쪽으로 관심을 옮겼다. 최근에는 이전 작업의 도면과 구조를 다른 장소에 다시 놓으며 형태가 시간과 장소에 따라 어떤 관계를 맺는지 탐구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신작 14점을 포함해 모두 16점이 소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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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분원을 위한 굴토’와 ‘검은 선’,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땅에서 시작하는 동선

운경고택에 들어서면 앞마당의 ‘육분원을 위한 굴토’(2026)를 마주한다. 땅을 부채꼴로 파낸 작업으로, 파낸 흙의 양만 6톤에 이른다. 앞마당의 형태를 고려해 60도의 각으로 만들었다. 여기에 걸터앉으면 시선이 원래 지면보다 낮아진다. 그 위치에서 안채를 올려다보게 된다. 대문에서 안채로 갈수록 높아지는 지형이 그제야 눈에 들어온다.

중문에서 담을 넘어 이어지는 ‘검은 선’(2026)은 그 높이 차이를 시각적으로 강조한다. 이 선을 따라 걸으면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담을 세운 이유와 안채가 더 높은 곳에 자리한 까닭이 보인다. 선을 받치는 붉은 철제 빔은 작품이 아니라 녹을 막기 위해 칠한 구조물이다. 작업을 지탱하는 요소까지 작가는 감추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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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계단 2’,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안채의 댓돌에서 대청마루를 지나 뒷마당까지는 ‘흰 계단 1, 2’(2026)가 이어진다. 한옥에서는 실내에 들어설 때 신발을 벗고, 다시 마당으로 나갈 때 신발을 신는다. 이 계단은 그 경계를 가로지른다. 관람객은 신발을 벗은 채 대청마루를 지나 뒷마당까지 걸어간다. 그 끝, 장독대가 놓인 가장 높은 지점에 서면 마당과 담장, 지붕이 지형 위에 놓인 하나의 구조로 보인다. 도면을 겹쳐 만나는 지점에 부피를 부여한 2017년 작업 ‘3 Volumes’의 방식을 운경고택의 높낮이에 맞춰 계단으로 구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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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연못’,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대청마루에는 ‘뒤집힌 연못’(2026)이 놓였다. 안채 마당의 작은 연못을 3D로 떠서 뒤집은 형태다. 땅에 낮게 자리했던 연못은 대청마루 위로 올라와 앉거나 기댈 수 있는 구조가 됐다. 2022년 리움미술관 〈아트스펙트럼 2022〉에서 선보인 ‘Reverse Mountain’과 같은 방식으로 기존 공간의 형태를 다른 위치에 옮겨놓은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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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병합’,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한 공간에 겹쳐진 시간

작가는 전시를 준비하며 2년 동안 계절마다 운경고택을 찾았다. 집의 구조와 지형을 살피고, 이전 작업의 도면과 형태를 이곳에 맞춰 다시 가져왔다. 그 과정에서 운경고택은 작품을 받아들이는 배경이 아니라 작업의 일부가 됐다. 김동희가 이번 전시를 두고 운경고택과의 ‘2인전’ 같다고 말한 이유다.

운경고택이 지나온 시간은 작품 안에서도 드러난다. 안채의 창과 건넌방 바닥에는 서촌 일대의 옛 지도와 운경고택이 자리한 땅의 지형도가 여러 장 놓인다. 작가는 시대별 지도를 겹치고 연대에 따라 금속의 재질을 달리해 층을 만들었다. 창밖으로는 현재의 풍경이 보이고, 그 위로 과거의 지형이 포개진다. 이 작업은 코팅하지 않은 상태로 설치돼 전시 기간 동안 표면이 서서히 부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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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은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있었지만 주변의 풍경과 역할은 계속 달라졌다. 조선시대 도정궁의 터에서 1930년대의 한옥으로, 운경 이재형의 집에서 역사적 공간으로, 다시 동시대 예술을 위한 전시장으로 운경고택은 여러 시간을 지나왔다. 김동희는 이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지도와 지형, 기존 공간의 형태를 한자리에 놓고 관람객이 그 사이를 오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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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집힌 다락’,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큰마당에 놓인 흰 구조물은 사랑채 다락을 실제 크기 그대로 만들고 좌우를 반전시킨 ‘뒤집힌 다락’(2026)이다. 쉽게 들어갈 수 없던 다락이 집 밖으로 나와 안팎을 내다보는 전망대가 됐다. 마주 보도록 배치한 두 개의 창이 원래 다락의 흔적을 보여준다. 다락 안에는 레코딩 아티스트 김영선이 2024년 이완 개인전 〈랜덤 액세스 메모리 3: 기록과 기억〉에서 선보인 사운드 설치 ‘구름은 해를 가리고 비를 내린다’를 다시 구성해 설치했다. 풀벌레와 천둥, 자전거, 시계, 전화벨 등 다락에서 들릴 법한 소리를 모은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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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선’,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사랑채에는 운경 생전에 정재계 인사들이 드나들었다. 작가는 이 방의 본래 역할에 맞춰 자신의 구작을 들여놓았다. 새로 만든 작업들이 집에 맞춰 들어온 것이라면, 사랑채의 작업들은 손님처럼 들어온 셈이다. 안채 마당에서 사랑채 내부로 이어지는 ‘흰 선’(2026)은 시선과 동선의 어긋남을 보여준다. 선은 사람이 건널 수 없는 연못을 넘어 사랑채 안까지 들어가지만, 관람객의 발은 그 앞에서 멈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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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흰 선’, 2026, 사진 이종근 제공 운경재단

파낸 땅과 꺼낸 다락, 창에 놓인 지도는 전시가 끝나면 모두 걷힌다. 운경고택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달라지는 것은 집이 아니라 그곳을 바라보는 방식이다. 고택을 한 바퀴 돌아 다시 대문 앞에 섰을 때, 처음과는 조금 다른 운경고택에 도착하게 된다. 〈다시 도착한 집〉은 10월 31일까지 열린다.

〈다시 도착한 집〉

주소 서울시 종로구 인왕산로 7, 운경고택
기간 2026년 9월 2일 – 10월 31일
운영 시간 화 – 일 10:00, 11:30, 14:00, 15:30, 17:00
(회차당 80분 관람, 사전 예약제)
참여 작가 김동희
기획 우혜수
후원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협력 운경재단
협찬 래코드
인스타그램 @woonkyung_offici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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