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리티지의 실험가들] 기억과 신체로 지은 세계, 연진영

월간 〈디자인〉 Vol.579 | Special Feature

버려진 원단, 팔리지 않은 옷, 자동차의 낡은 부품… 언뜻 쓸모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작가 연진영에게는 예술 작업의 재료다. 작품에 관한 한 어떤 한계도 두지 않는 그의 재료가 다채로운 건 자연스럽다. 다만 연진영이 모든 작업에 공통으로 사용하는 단 하나의 재료가 있다면 그것은 작가 자신이다. 그는 오래된 기억, 혹은 몸에 새겨진 시간으로 인해 감각하게 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헤리티지의 실험가들] 기억과 신체로 지은 세계, 연진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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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접 다룰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재료 삼아 작업하는 작가. 설치와 조각 등 넓은 영역을 오가는 그는 보이는 것과 그 이면의 것 중 무엇이 본질에 가까운지를 고민한다. 창고에 쌓여 있는 재고처럼 과잉된 것, 또한 흔히 죽어 있다고 여겨지는 대상에서 생명력을 느낀다. 리움미술관, 국립현대미술관, 일민미술관 등에서 작품을 선보였고 2021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를 시작으로 국제 무대에서도 활발히 활동 중이다. @hang_jin_

버려진 원단, 팔리지 않은 옷, 자동차의 낡은 부품… 언뜻 쓸모를 잃은 것처럼 보이는 이 모든 것이 작가 연진영에게는 예술 작업의 재료다. 작품에 관한 한 어떤 한계도 두지 않는 그의 재료가 다채로운 건 자연스럽다. 다만 연진영이 모든 작업에 공통으로 사용하는 단 하나의 재료가 있다면 그것은 작가 자신이다. 그는 오래된 기억, 혹은 몸에 새겨진 시간으로 인해 감각하게 되는 것에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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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받은 배기구Blessed Vent’(2025). 공업용 덕트 위에 패션 브랜드 크롬하츠의 상징적인 문양을 접목한 작품이다. 예상치 못한 산업 재료와 패션의 결합에서 기이한 위트가 느껴진다.

9월 13일까지 갤러리 느와에서 열리는 개인전 〈이불집Ibuljip: Blanket Fort〉에서도 이러한 면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작가의 어머니가 이불 가게를 운영했기에 그는 쌓여 있는 이불 속에서 자랐다. “의도했든 아니든, 이불에서 비롯한 경험이 내게 영감의 뿌리가 된다고 생각했다.” 개인적이고 구체적인 기억을 섬세하게 더듬으며 연진영은 친숙한 대상인 이불을 생경한 감상을 불러일으키는 작품으로 탄생시킨다. 작가의 기억 속 이불은 열기와 습기에 취약했고, 그 때문에 느꼈던 불안하고 복잡한 감정을 ‘꿉꿉한 눅눅한 축축한’이라는 작품에 녹여낸 것이 대표적 예다. 이번 전시에 국한하지 않더라도, ‘스킨 넷Skin Net’, ‘패딩 기둥Padded Column’ 등 여러 작품이 독특한 형태와 질감으로 보는 이를 압도한다. “화려하고 강렬한 작업을 하는 이유는 복합적이겠지만 원초적인 원인은 과거에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던 예민한 시절을 이불 가게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패턴과 컬러, 하나의 사물을 다양하게 보는 눈을 그 안에서 키웠다는 사실을 절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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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링의 사원’(2026). 폐의류를 해체하고 재조합해 일상의 소비재인 키링을 거대한 구조물로 확장한 설치 작업이다. 익숙한 사물에 축적된 생산과 소비의 흔적을 되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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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과 빗물 사이의 몽타주’(2026). 패션 브랜드 송지오의 재고 원단을 활용한 대규모 설치 작품. ‘이불’에 관한 작가의 어린 시절 기억에서 출발했다.

연진영에게 기억이 재료라면 몸은 도구다. 작가는 날것의 재료를 수공예에 가까운 방식으로 매만진다. 리사이클 패브릭, 나일론, 폐원단 등을 직접 일일이 가공한 뒤 꿰매거나 엮는 것이다. 지금 작가가 생각하는 좋은 작품이란 창작자가 작업에서 온전하게 느껴지는 것이므로, 자신의 신체를 거친 작품을 만들고자 한다. 연진영은 이러한 작업 방식이 자신에게 마땅할 뿐 특별하다고 여기지 않는다. “스스로 보편적이고 전형적인 삶을 살아왔으며 또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일상적인 이야기도 영화 속에서는 각별하게 보인다. 내 작품에서 공감할 만한 요소를 찾는다면 그래서이지 않을까?” 그의 표현을 빌리면 ‘평범한 한국인’으로 살아온 연진영의 작품은 의도와 상관없이 종종 한국적으로 읽힌다. 2021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패션 하우스 디올과 협업해 제작한 ‘메달리온 체어’에서 전통 자개를, 원형의 패딩을 엮어 만든 ‘키링의 사원’에서 말린 꽈리 묶음을 연상하는 이들이 있는 것이다. 연진영은 자신의 작품을 보는 이들이 저마다 해석해 내는 한국성을 오히려 흥미롭게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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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킨 넷’(2025). 알루미늄, 나일론, 구스 다운재킷, 리사이클 패브릭 등 다양한 재료를 엮었다. 서로 다른 속성을 지닌 외피들을 연결해 제작한 작품은 마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보인다.

예술과 상업, 대형 설치와 조각처럼 분야도 영역도 자유로이 오가며 활동하는 연진영에게 가장 의미 있는 작품은 언제나 ‘지금 만들고 있는 작품’이다. 현재 지닌 최선의 것으로 자신에게 필요한 이야기를 하는 일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지금 몰두하는 일은 DMZ라는 장소와 ‘맨즈 뷰티’를 주제로 하는 장소 특정적 작업이다. 과거의 건물과 생태계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채 음악 페스티벌이 열리는 등 새로운 에너지가 유입되는 지역에 강한 흥미를 느낀다는 그가 보여줄 새 작업을 기대해 보자. 또한 10월 2일까지 PS 센터에서는 사진가 구본창과 연진영이 함께하는 2인전 〈본연〉이 열린다. 변화가 남긴 흔적, 허무와 영원성을 주제로 한 사진과 조각이 어떻게 맞물리는지 확인할 기회다.

김유영 객원 기자
인물 사진 박순애(스튜디오 수달)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9호(2026.09)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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