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디자인이 삶의 언어로 ‘다시’ 쓰일 때

2026년 세계디자인수도 프랑크푸르트 라인마인

2026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프랑크푸르트 라인마인은 ‘민주주의를 위한 디자인’을 도시 곳곳에서 실험하고 있다. 광장을 뒤덮은 설치 작품부터 시민이 직접 만드는 공원과 이동형 프로그램까지, 디자인을 전문가의 영역에서 시민의 일상으로 확장한다. 2028년 세계디자인수도를 앞둔 부산이 프랑크푸르트의 실험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무엇일까?

도시 디자인이 삶의 언어로 ‘다시’ 쓰일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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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et Echelman, A Sky Full of Hope, 2026.

프랑크푸르트 구시가지 한복판에 그물이 떴다. 붉고 푸른 다발이 바람 방향에 따라 출렁이고, 그 아래서 마켓이 열리고 있다. 채소 좌판 위를 지나고, 서두르는 사람들 머리 위를 스치고, 광장 가장자리에 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사람들 위로 그림자가 내려온다. 자넷 에켈만(Janet Echelman)의 <A Sky Full of Hope>는 지난달 프랑크푸르트 도심 한복판에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아직 점등되지 않은 설치 작품이었지만, 불이 들어오기 전부터 이미 광장의 풍경을 바꾸고 있었다. 제목이 말하는 바가 이런 장면이 아닐까. 하늘을 가득 채운 그물, 그리고 그 아래서 바쁜 걸음을 멈추고 하늘을 올려다보게 된 사람들의 모습 말이다.

세계디자인기구(WDO)가 2년마다 선정하는 세계디자인수도(WDC) 타이틀을 올해는 독일어권 도시로서는 처음으로 프랑크푸르트가 가져갔다. 2008년 토리노(Torino)를 시작으로 서울, 헬싱키, 케이프타운, 타이베이, 멕시코시티 등을 거쳐 이 타이틀이 독일에 처음 주어진 것인데, 흥미로운 것은 프랑크푸르트 라인마인(Frankfurt RheinMain)이 스스로에게 던진 화두다. ‘민주주의를 위한 디자인. 더 나은 삶을 위한 환경(Design for Democracy. Atmospheres for a Better Life)’이라는 슬로건은 디자인을 도시 미화의 언어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방법론으로, 그리고 그 민주주의를 환경과 감각의 문제로 정의하겠다는 선언으로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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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y Visual of WDC Frankfurt RheinMain 2026.

이번 행사의 규모는 프랑크푸르트 도심만이 아니라 주변 도시인 다름슈타트, 비스바덴, 오펜바흐, 그리고 하나우까지 라인마인 광역권 전체로 확장되며, 연중내내 450개 프로젝트와 2,000개 이벤트가 진행될 예정이다. 슈탄 헤마(Stan Hema)가 설계한 이번 행사의 비주얼 아이덴티티 시스템도 이 방대한 프로그램을 하나의 브랜드 우산 아래 묶기 위해 고안됐다. 대형 시그니처 이벤트부터 동네 단위 시민 참여 프로젝트까지 각자의 문법과 스타일을 허용하되, 최소한의 공통 언어로 식별 가능하게 만드는 구조다. 브랜드가 규범이 아니라 도구가 된다는 선언을 시스템 설계 자체로 실천한 것인데, 실제로 그 선언이 작동하는지는 프로그램 목록을 훑어보면 어느 정도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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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idenpavilion in Senefelder Park. 예술 집단 ‘하다(hada — Werkstatt für Gemeinwohl)’가 오펜바흐 시민들과 함께 제네펠더 파크(Senefelder Park)에 버드나무 그늘 파빌리온을 조성했다. 녹지가 없어 한여름에도 이용이 어려웠던 공원 구역에 그늘과 냉각 효과를 더해 누구나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바꾸는 프로젝트다.

학생들이 인스턴트 카메라와 워크북을 들고 동네를 탐사하며 공공 공간의 개선안을 만들어보는 프로젝트와 지하철역 빈 쇼윈도를 청소년 창작 플랫폼으로 전환하는 도메네 에스(Domäne S), 퀴어 흑인 퍼포머와 뮤지션이 참여하는 부티 바운스(Booty Bounce) 등이 모두 같은 슬로건 아래 놓이는 것을 보면 더욱 수긍이 간다. 민주주의를 위한 디자인이란 결국 누가 이 도시의 공간을 소유하고 있는가를 묻는 일이라는 것을 이 프로그램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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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After School Club, Module Festival, 2026.
페스티벌 장소에 차린 임시 그래픽 스튜디오에서 참여자들이 사흘간 협업 서체를 디자인하고, 그 결과물을 대형 빌보드로 관람객과 실시간 공유한다.

2024년부터 광역권 전역을 순회해온 WDC 워크숍 트럭도 현재 계속 이동 중이다. 마찬가지로 모듈형 플랫폼인 WDC 파빌리온은 바트 홈부르크와 오펜바흐, 비스바덴, 다름슈타트를 차례로 순회하며 각 도시에서 현장 워크숍과 참여형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전시장에 가야 디자인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디자인이 시민이 사는 곳으로 찾아오는 구조다. 오펜바흐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시민들이 직접 이동형 정원 화단을 만들고 디자인하며, 그 결과물이 도심 전역에 녹지 네트워크로 쌓여가는 프로그램이 진행됐다. 전문 디자이너의 빈틈없는 기획이 아니라 시민이 도시의 경관을 직접 구성하는 것. 완성도보다 참여의 밀도를 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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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 After School Club, Module Festival, 2026.
페스티벌 장소에 차린 임시 그래픽 스튜디오에서 참여자들이 사흘간 협업 서체를 디자인하고, 그 결과물을 대형 빌보드로 관람객과 실시간 공유한다.

‘연대하는 키오스크(Kiosk of Solidarity)’는 프랑크푸르트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으로 손꼽히는 중앙역 인근에 자리한다. 약물 사용, 노숙, 사회적 배제 등 도시가 오랫동안 외면해온 문제들이 응축된 곳이기도 하다. 이 공간이 디자인에 요구하는 것은 완벽한 해결책이 아니다. 그보다 누구나 들어올 수 있는 장소, 편견 없이 머물 수 있는 자리를 만들기 위해 공간을 재구성하는 것만으로도 디자인은 누가 이 도시에 속하는가라는 질문에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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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osk of Solidarity. Foto: Monika Keiler

프랑크푸르트 버전의 WDC 2026은 도시 디자인이 정책이 아닌 생활의 언어로 다시 쓰고 있다. 이는 2028년 세계디자인수도로 선정된 부산이 주의깊게 봐야할 지점이기도 하다. 부산이 내건 슬로건 ‘포용적인 도시, 참여하는 디자인(Inclusive City, Engaged Design)’은 ‘시민이 도시 디자인의 수혜자가 아니라 제작자가 될 수 있는가’라는 프랑크푸르트의 슬로건과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역대 WDC 도시들을 보면 이 질문에 성공적으로 답한 경우보다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다. 헬싱키는 시민 90%가 WDC로 지정된 사실을 인식하고 인구의 3분의 2가 행사에 참여했으며, 이후 2년짜리 레거시 프로그램으로 이어갔지만, 더 큰 예산을 쓰고도 지속적인 구조를 만들지 못한 도시들도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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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osk of Solidarity. Foto: Monika Keiler

물론 올해 프랑크푸르트가 선택한 방식이 내년에도 유효할지 아직 판단하기 이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에도 광장 위의 그물이, 오펜바흐 공원의 화단이, 중앙역의 키오스크가 남기는 것은 물리적 설치물만이 아니다. 도시 디자인이 전문가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 자신의 것이기도 하다는 감각을 한 번이라도 경험한 시민은 이전과 다른 일상을 향유하게 될 것이다. 그렇기에 2028년이 끝난 이후의 부산을 상상해보는 시간이 지금부터 필요하다. 연중 프로그램이 끝난 뒤 부산 시민이 가지고 돌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폐막 후에도 도시 디자인을 자신의 언어로 경험하는 감각이 어떻게 유지될 수 있을지 고심하는 과정이 없다면, 포용적인 도시를 선언하는 행사 슬로건은 팸플릿 위에만 머물다 사라질 것이다.

해외통신원 박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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