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크로니클 ②] 1990~2000년대

월간 〈디자인〉이 어느덧 200번의 계절을 지나왔다. ‘디자인’보다 ‘미장’이라는 표현이 익숙하던 시절, 디자이너를 간판장이로 부르던 시대에 태어나 디자인이라는 낯선 개념을 알리고 그 저변을 넓혀왔다. 50년 동안 지면에 쌓인 수많은 이름과 사건은 곧 이 사회에서 디자인이 하나의 산업과 문화로 자리 잡아온 과정이기도 하다.

[디자인 크로니클 ②] 1990~2000년대

1990’s

1990년대에 접어들면서 충격적이고 도발적인 포스트모던 디자인의 열기는 차츰 잦아들었다. 과도한 장식과 파격적인 형태에 대한 피로감이 쌓이고 사용성과 지속성이 다시 중요해지면서 미니멀리즘이 부상했다. 한편 소비문화가 팽창하면서 대중적 명성을 얻고 여러 브랜드와 협업하는 ‘스타 디자이너’가 등장했고, 건축에서도 강렬한 조형의 랜드마크가 도시의 이미지를 바꾸는 수단으로 주목받았다. 급속도로 발전한 컴퓨터 기술은 건축의 조형적 가능성을 넓히는 동시에 데스크톱 퍼블리싱(DTP)의 정착을 이끌며 그래픽 디자인의 제작 환경도 크게 바꾸었다. 1990년대 중반 월드 와이드 웹이 확산되면서 디자인의 무대는 인쇄물과 물리적 제품을 넘어 디지털 공간으로 옮겨가기 시작했다. 한국에서도 제조업과 내수 소비 시장이 성장하고 기업 간 제품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인하우스 디자인 조직뿐 아니라 외부 디자인 전문 회사도 성장했다. 1997년 외환 위기가 이러한 성장에 제동을 걸기도 했지만,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가는 길목에서 한국 산업 디자인은 빠르게 변하는 기술과 시장에 대응하며 오늘날의 기반을 다졌다.

1990년|매거진 〈인터뷰〉, 미국
강렬한 흑백 인물 사진에 커다란 붉은색 로고와 최소한의 텍스트를 결합해 잡지 표지를 포스터처럼 구성했다. 사진 중심의 미니멀한 아트 디렉션과 유명인의 도발적인 이미지가 어우러져 1990년대 패션·문화 잡지의 새로운 시각적 방향을 예시했다.

1992년|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 ‘코비’,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목양견을 마스코트로 선정한 뒤 자유로운 필체로 그렸다. 자와 컴퍼스로 정교한 기하학적 형태를 구축하던 기존 모더니즘 디자인에서 완전히 벗어났다. 올림픽 아이덴티티 디자인의 변화를 알린 전환점이 된 마스코트다.

1995년|‘퍼블릭 시어터’ 포스터, 미국
19세기 미국의 목활자와 거리 타이포그래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해 크기와 굵기, 방향이 다른 거대한 문자와 인물 사진을 충돌하듯 배치했다. 로고가 아닌 일관된 시각 언어를 통해 문화 기관의 정체성을 구축하는 새로운 브랜딩 방식을 제시했다.

1997년|톰백 체어, 스위스
파도처럼 휘어진 연속 셸 구조를 통해 조각적이고 유기적인 형태를 대량생산 방식으로 구현했다. 본래 이 의자는 〈도무스〉의 의뢰로 제작한 설치 작품 ‘Totem’을 위해 처음 고안한 것인데 비트라와 협업 과정에서 형태는 거의 그대로 유지하되 진공 성형한 알루미늄판을 폴리프로필렌으로 바꿔 대량생산에 적합한 구조로 발전시켰다. 원오프와 실험적 가구로 이름을 알린 론 아라드의 조형 언어가 산업 생산의 영역으로 확장된 대표작이다.

20260930021444 1998 Nokia 5110
노키아 5110. 디자인 노키아 디자인팀

1998년|노키아 5110, 핀란드
교체형 컬러 커버를 도입해 사용자가 휴대전화의 색과 외관을 취향에 따라 바꿀 수 있도록 했다. 휴대전화를 단순한 통신 기기에서 패션과 개성, 라이프스타일을 표현하는 제품으로 확장하며 개인화를 모바일 디자인의 중요한 가치로 정착시켰다.


2000’s

어느덧 일상 깊숙이 자리 잡은 월드 와이드 웹은 미디어와 소비 환경을 빠르게 바꾸었다. 애플은 아이팟과 아이튠즈를 통해 하드웨어와 콘텐츠, 디지털 상거래를 하나의 생태계로 통합했고, 2007년 출시된 아이폰은 이러한 변화를 한층 가속화했다. 컴퓨터와 전화, 카메라, 음악과 영상, 인터넷이 손안의 기기 하나로 통합되면서 라이프스타일은 물론 미디어와 산업의 지형도 크게 달라졌다. 디지털 산업의 성장은 한국 기업에도 기회가 되어 삼성전자와 LG전자는 디지털 전환에 빠르게 대응하며 세계시장에서 존재감을 키웠다. 스마트폰이 일상의 사물로 자리 잡으면서 미니멀한 조형 언어는 생활가전 전반으로 확산되었다. 한편 한국 사회에서는 디자인 경영과 공공 디자인이 화두로 떠오르며 디자인이 상품의 외형을 넘어 산업과 도시의 문제를 해결하는 수단으로 주목받기 시작했다. 동시에 그래픽 디자인을 중심으로 소규모 스튜디오들이 등장해 문화예술계와 손잡고 독자적인 영역을 만들어갔다. 당시에는 주변부에 가까웠던 이들의 활동은 이후 한국 그래픽 디자인 신의 지형을 바꾸는 한 축으로 성장했다.

20260930021739 2000 Tate Modern
테이트 모던. 디자인 헤어초크 드 뫼롱

2000년|테이트 모던, 영국
산업 시대의 발전소를 철거하지 않고 현대미술관으로 재생함으로써 산업 유산의 보존과 도시 재생을 결합한 적응적 재사용의 대표 사례다. 빌바오 구겐하임이 ‘새로운 랜드마크를 통한 도시 재생’의 모델이라면, 테이트 모던은 ‘도시 유산의 재해석을 통한 도시 재생’의 모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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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버 MP3 플레이어. 디자인 이노디자인(김영세) 제조 레인콤

2002년|아이리버 MP3 플레이어, 한국
MP3 플레이어를 목에 착용하는 패션 액세서리로 재해석함으로써 디지털 기기의 휴대성을 착용성으로 확장하고 일찍이 웨어러블 디지털 제품의 가능성을 보여준 한국 산업 디자인의 대표적인 사례다.

2007년|애플 아이폰, 미국
숫자 키패드와 물리적 키보드가 휴대전화의 형태를 결정하던 시대에 이를 대부분 없애고 전면을 하나의 큰 멀티터치 디스플레이로 만들었다. 필요한 버튼을 소프트웨어가 화면에 만들어내는 방식으로 휴대전화와 음악, 인터넷 등 다양한 기능을 하나의 기기에 통합하며 스마트폰의 형태와 사용 방식을 새롭게 정의했다.

2008년|버락 오바마 ‘Hope’ 포스터, 미국
21세기 정치 디자인의 대표작. 정치인의 초상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대신 강렬한 색면과 한 단어의 메시지로 아이콘화했다.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제한 이 이미지는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확산됐고 전통적인 선거 포스터를 ‘바이럴 정치 그래픽’으로 전환시켰다.

20260930022504 2009 High Line Park
더 하이 라인. 디자인 제임스 코너 필드 오퍼레이션, 딜러 스코피디오 + 렌프로 조경 피트 아우돌프

2009년|더 하이 라인, 미국
뉴욕의 버려진 고가 철도를 철거하지 않고 레일과 산업 유산, 그 위에 자연적으로 형성된 야생 생태를 새로운 공공 공간으로 재해석했다. 이로써 낡은 도시 인프라의 기억을 보존하면서 새로운 도시 생활을 만드는 도시 재생의 세계적인 모델을 제시했다.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80호(2026.10)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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