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로 연결된 두 나라의 디자인 언어, 파리 디자인 위크 특별전 〈한지마니아〉

한불수교 140주년 기념, 한국과 프랑스 디자이너들의 특별한 협업

지난달 열린 파리 디자인 위크에서 특별한 전시가 열렸다. 한불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한국의 전통 종이 '한지'를 주제로 한 특별전 〈한지마니아〉가 개최된 것.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6팀과 한국 작가들이 협업해 한지를 현대적인 조형 언어로 재해석한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였다.

한지로 연결된 두 나라의 디자인 언어, 파리 디자인 위크 특별전 〈한지마니아〉

지난 2026년 9월 8일부터 10월 4일까지 진행된 파리 디자인 위크(Paris Design Week)에서 경북의 대표 전통문화 자산인 한지를 주제로 한 특별전 〈한지마니아(HANJIMANIA)〉가 열렸다. 한불수교 140주년을 기념해 경상북도와 프랑스 국립문화유산센터의 주최로 기획된 전시로 프랑스 국가 유산 시설인 오텔 드 라 마린(Hôtel de la Marine)에서 개막했다. 한지의 전통성과 현대적 디자인 가치를 세계 문화 예술계에 소개하는 국제 문화 교류 행사의 공식 프로그램으로 초청되어 의미가 남달랐다. 개막에 앞서 대한민국 김혜경 여사와 프랑스 브리지트 마크롱 여사가 전시장을 함께 특별 전시를 관람해 이목을 끌기도 했다. 특히 이번 특별전은 2026년 말 추진 중인 한지의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를 앞두고 국제 사회의 관심과 공감대를 확대하기 위한 문화외교의 장으로 더욱 뜻깊었다.

18세기 프랑스 궁정에 펼쳐진 한지의 변주

특별전 〈한지마니아(HANJIMANIA)〉에는 문경과 안동의 전통 한지원지를 주 매개체로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6명과 한국 작가 10명이 협업한 공예디자인 작품 17점을 선보였다. 작품들을 살펴보면 몇 가지 공통점이 드러난다. 오랜 시간 이어져 온 전통에 대한 존중과 이를 미래로 연결하려는 시도, 한지라는 소재를 매개로 인간의 섬세한 내면과 정서적 교감을 표현했다는 점이다. 특히 한지 특유의 질감과 섬유의 결, 겹겹이 쌓인 깊이를 빛으로 드러낸 조명 작품을 중심으로 책장과 선반, 병풍, 오브제, 명상 공간까지 다양한 형태의 조형미를 선보였다.

이는 전시 기획 의도와도 상통한다. 전시를 기획한 디렉터 안강은과 카트린 뤼로(Catherine Lurault)는 양국의 수준 높은 공예 기술과 디자인을 한자리에 모아 전통 한지의 아름다움을 새로운 시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한지라는 전통 소재를 현대적인 조형 언어로 풀어낸 셈.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창작 방식이 만나는 과정에서 전통은 단순히 보존해야 할 유산을 넘어 오늘날에도 새로운 형태로 확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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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텔 드 라 마린에 전시된 정창기의 ‘토템(Totem)’과 유이화의 ‘Layered Silence, A Room of contemplation in Hanji’. ⓒ Arthur Minot, Hôtel de la Marine

전시가 오텔 드 라 마린(Hôtel de la Marine)에서 열렸다는 점도 의미 깊다. 파리 콩코르드 광장에 자리한 이곳은 18세기 말 프랑스 왕실의 가구와 직물, 장식품 등을 관리하던 왕실 가구 보관소(Garde-Meuble de la Couronne)이다. 프랑스 장식 예술의 정수를 간직한 역사적 공간이자 전통 장인 정신, 현대 창작이 공존하는 문화유산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번 전시를 통해 이 상징적인 장소는 프랑스와 한국의 문화가 만나 새로운 영감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호기심의 방(Cabinet de curiosités)’으로 변모했다.

전시는 화려한 장식이 돋보이는 의전실과 18세기 생활 공간을 재현한 관리인 아파트, 로지아 등 건물의 역사적인 공간 곳곳에서 펼쳐졌다. 관람 동선을 따라 디자이너들의 한지 작품을 만날 수 있었는데, 프랑스 역사가 깃든 공간에 한국의 전통 소재가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작품을 배치함으로써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 공예 기술이 공존하는 장면을 연출했다.

프랑스 디자이너와 한국 공예가의 창의적인 만남

전시에 참여한 디자이너 역시 주목할 만하다. 이번 전시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디자이너 6팀이 한지로 구현할 작품을 구상하고 한국 작가 또는 장인과 협력해 작품을 완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공기의 흐름에 따라 움직이는 펜던트 조명 ‘베르티고(Vertigo)’로 잘 알려진 콘스탄스 기세(Constance Guisset), 조각적인 형태의 ‘베어 체어(Bear Chair)’ 시리즈로 주목받은 피에르 요바노비치(Pierre Yovanovitch), 모로코 마라케시의 이브 생 로랑 박물관을 설계한 건축 스튜디오 KO(Studio KO)가 참여했다.

여기에 파리 호텔 드 크리용과 에펠탑 레스토랑 르 쥘 베른의 인테리어를 작업한 알린 알린 아스마 다만(Aline Asmar d’Amman), 기존 사물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트랜스포미즘(Transformism)’을 제시한 해리 누리에브(Harry Nuriev), 2025년 오텔 드 라 마린에서 신화적인 미로를 구현한 설치 전시 ‘르 라비랭트(Le Labyrinthe)’를 선보인 제레미 프라디에 쥬노(Jérémy Pradier-Jeauneau)가 함께했다.

‘Bloom’, 콘스탄스 기세 x 이선

콘스탄스 기세와 이선이 협업한 ‘Bloom’은 나무 구조물을 따라 여러 겹의 한지가 말리며 꽃처럼 피어나는 조명 작품이다. 자연스럽게 드리워지는 종이의 곡선을 통해 한지 특유의 섬세한 물성과 유연성을 표현했다. 작품에는 한지를 물에 적시고 반복적으로 두드려 밀도와 유연성을 높이는 전통적인 줌치 기법1을 적용했다. 이를 통해 한지가 지닌 연약함과 견고함, 평면성과 입체성 등 상반된 특성을 하나의 조형물에 담아냈다.

‘Lili’, 피에르 요바노비치 x 고소미

피에르 요바노비치와 고소미는 ‘Lili’를 통해 한지의 섬세함과 서로 다른 소재의 조형적 대비를 보여준다. 고소미는 닥나무 섬유를 섬세하게 엮어 자연스러운 질감과 입체적인 볼륨을 구현했으며 한지 갓을 통과한 빛은 공간에 은은한 온기를 더했다. 여기에 부드러운 곡선의 목재 받침과 깊은 블루 컬러의 래커 마감 금속 기둥을 결합해 유기적인 질감과 단단한 물성이 조화를 이루도록 했다.

‘Aube’, Studio KO x 김원천

스튜디오 KO와 김원천이 선보인 ‘Aube’는 문화와 시대를 넘어서는 오브제를 지향한 작품이다. 이들은 시간을 초월하는 형태로 ‘활’이라는 형상을 떠올렸고 팽팽히 당겨진 활과 그 끝에서 날아갈 화살을 빛으로 풀어냈다. 한지는 나비의 날개처럼 섬세하고 연약한 존재로 다뤄진다. 두 장의 한지를 네 개의 날개처럼 펼쳐 활의 구조에 결합해 팽팽한 활의 긴장감과 한지의 섬세하고 가벼운 특성을 대비시켰다.

‘사라지는 책장’, 알린 아스마 다만 x 심지선

알린 아스마르 다만과 심지선이 선보인 ‘사라지는 책장’은 한지의 상징성과 전통적 특성에서 영감을 얻어 완성한 작품이다. 밀푀유처럼 여러 겹의 한지를 포개고 파스텔 색상의 실로 바느질해 선반의 구조를 만들었다. 기둥에는 하늘을 향해 피어나는 꽃을 장식했으며, 선반에서 흘러내리듯 펼쳐진 얇은 한지에는 한국어와 프랑스어로 시조를 새겼다.

‘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 해리 누리에브 x 국립 경국대학교

해리 누리예프와 국립경국대학교가 선보인 ‘베리 공작의 아주 호화로운 기도서(Les Très Riches Heures du Duc de Berry)’는 중세의 달력을 미래의 풍경으로 재해석한 작품이다. 시간과 계절, 노동, 자연을 담은 원작의 이미지 위에 로봇과 드론, 태양광 패널, 미래적 기계를 더해 역사와 기술, 기억과 미래가 공존하는 장면을 구현했다.

‘Artemis’, 제레미 프라디에 쥬노 x STUDIO FOH, 유은정

제레미 프라디에 쥬노와 유은정이 선보인 ‘Artemis’는 암체어와 사슴뿔 조명, 스툴로 구성된 작품이다. 미노타우로스와 디아나의 상징에서 출발해 인간의 본능적이고 야생적인 면, 자유로운 여성성을 조형적으로 풀어냈다. 유은정은 한지를 염색하고 주름 잡아 형태를 만드는 공예 기법으로 참여해 작품에 유기적인 생명감을 더했다.

한국 작가 11인이 풀어낸 한지의 조형 언어

이 밖에도 한국 작가 11명의 개별 작품을 통해 한지의 다양한 조형적 가능성을 조명했다. 이선은 오텔 드 라 마린의 장식 문양을 한지로 재해석한 ‘Ornament in Translation’, 유이화는 겹겹이 쌓인 한지와 빛을 활용해 사색의 공간을 조성한 ‘Layered Silence, A Room of contemplation in Hanji’를 선보였다. 유은정의 ‘미선: 은은하게 퍼지는 선한 기운’은 한지와 주석을 결합해 전통 부채의 형태를 조명으로 구현했으며, 고소미는 한지사를 꼬고 엮어 생명의 태동과 관계를 표현한 ‘온실의 숨구멍: 세상을 깨우는 틈’을 공개했다.

김용호는 한국의 은은하고 깊은 미감을 병풍에 담은 ‘유현, Yuhyun-Subtle profoundity’, 심지선은 한지발에서 착안한 선반 위에 꽃을 피워낸 ‘나만의 정원 -뿌리없는 꽃 프로젝트’을 선보였다. 양지윤의 ‘In between’은 물에서 떠낸 한지 모듈을 반복적으로 배열해 생명의 순환을 표현했으며, 진효승의 ‘온결(On-gyeol)’은 정교하게 접은 한지로 빛을 감싼 조명이다. 김원천은 목재 골격과 한지를 결합한 항아리 형태의 조명 ‘종이의 집 2 — 빛이 사는 곳’, 김희원은 덕수궁 함녕전의 창을 한지 병풍에 담은 ‘Someone’s Window 함녕전’을 선보였다. 마지막으로 정창기는 다양한 한지 조형 요소를 수직으로 쌓아 올린 ‘토템(Totem)’을 통해 종이의 질감과 형태를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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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디자인위크 특별전 〈한지마니아〉 전시 전경. ⓒ Arthur Minot, Hôtel de la Marine

현지에서는 작품 전시와 함께 국가유산청이 제작한 홍보영상 〈천년을 견디는 종이, 한지〉를 상영하고 글로벌 향료기업 IFF(International Flavors & Fragrances)가 개발한 한지 향을 직접 경험할 수 있는 시향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시각과 후각을 아우르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한지의 문화적·감성적 가치를 더욱 입체적으로 전달했다. 전시 〈한지마니아〉는 오랜 시간 이어져 온 공예의 유산이 동시대 창작의 중요한 자원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줬다. 특히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과 작업 방식을 지닌 창작자들의 만남은 익숙한 소재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1. 한지를 물에 적신 뒤 반복적으로 주무르고 두드려 질기고 유연하게 만드는 한국의 전통 한지 가공 기법. ↩︎

2026 파리디자인위크 특별전〈한지마니아(HANJIMANIA)〉

기간 2026년 9월 8일 – 10월 4일
장소 오텔 드 라 마린(Hôtel de la Marine)
주최 프랑스 국립문화유산센터, 오텔 드 라 마린, 파리디자인위크, 경상북도
주관 경북문화재단 콘텐츠진흥원
전시 감독 안강은, 카트린 뤼로
공간 연출 Supercazzola Studio, 제레미 프라디에 쥬노
한지 제작·공급 문경한지, 안동한지, 전주한지
참여 디자이너 콘스탄스 기세, 피에르 요바노비치, Studio KO, 알린 아스마 다만, 해리 누리에브, 제레미 프라디에 쥬노, 김용호, 정창기, 진효승, 김원천, 김희원, 유이화, 고소미, 심지선, 스튜디오 포-유은정, 이선, 양지윤, GKNU
조향 도미티유 미샬롱(Domitille Michal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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