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을 일구는 건축
지역 건축을 논하는 일은 여전히 난제다. 수도권으로 집중되는 인구와 자본의 흐름은 지역 건축 생태계의 기반을 약화시켰다. 획일화된 수요와 축소된 기회 속에서 건축가는 어떤 실천을 모색할 수 있을까? 거대한 중심의 속도 밖에서 꿋꿋이 지역을 일궈가는 건축가들의 작업에서 그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지 모른다.

강릉의 정서를 담은 스테이, 세틀러



스테이는 지역에 어떤 가치를 창출할 수 있을까? 동시에 스테이를 짓는 건축가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 강릉 소돌해변 인근에 ‘정착한다’는 의미를 담아 지은 세틀러는 스테이 건축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한다. 지역과의 연결 고리에 큰 비중을 두기보단 공간의 완성도를 높이는 데 집중했던 기존의 스테이와 달리 세틀러는 지역과의 연계에 초점을 맞췄다. 단순히 주변 풍광을 건축적으로 해석하는 식의 접근을 넘어 지역 로스터리와 공방, 디자이너 및 로컬 브랜드와의 협업으로 공간을 채운 것이다. 다채로운 색을 지닌 로컬 브랜드가 스테이 곳곳에 녹아들며 강릉만의 매력을 보여준다. 패브릭 브랜드 지구리워크가 맞춤 제작한 티 코스터와 습기 가림막, 즈므로스터리의 드립백 등 객실에 놓인 다양한 기물은 지역의 라이프스타일을 자연스럽게 경험하도록 이끈다. 집처럼 편안한 느낌을 주는 객실은 미닫이문으로 분리하거나 연결할 수 있는 구조로, 필요에 따라 유연하게 사용할 수 있다. 검소하고 실용적인 외관은 주변 맥락에 차분하게 스며드는데, 스킵 플로어 구조와 타일, 스테인리스 기둥이 조화를 이루며 세틀러만의 개성을 표현한다. 지속 가능한 운영을 위해 건축가는 건축주와 긴밀히 협업해 세틀러의 정체성을 만드는 데 힘쓰고 있다. 건축의 역할이 건물을 짓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지역에 온전히 자리 잡기까지의 여정을 함께한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강릉을 안내하는 가이드를 자처하는 세틀러는 지역을 경험할 수 있는 다양한 정보를 온·오프라인으로 전달한다. 크고 작은 창작자가 모여 흥미로운 지형을 만들어가는 강릉의 현재가 궁금하다면 세틀러에 주목해보자.
클라이언트 세틀러
건축 건축사사무소 폼아키텍츠
시공 상지건설
주소 강원도 강릉시 주문진읍 신영길 18-2
사진 김용수
골목의 맥락을 잇는 사옥, 노클레임 전포



부산은 산과 바다의 도시다. 산이 많아 평지가 적고 경사지에는 주거가 밀집해 있다. 카페 거리로 알려진 서면 전포동의 도시 맥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형을 먼저 읽어야 한다. 평지인 서면을 중심으로 형성됐던 상권이 주택가이던 전포동으로 점차 확장하면서 주거지의 정취를 간직한 독특한 풍경이 만들어졌다. 부산을 기반으로 성장한 패션 브랜드 노클레임의 사옥도 여기에 있다. 의류 생산부터 유통, 자체 브랜드와 타 브랜드 편집숍 운영에 이르기까지 패션 산업의 전반을 아우르는 노클레임은 전포동 일대에 분산된 사무실과 창고, 매장을 한곳에 통합하기 위해 사옥을 마련했다. 부지는 전포동 골목 끝자락의 경사지. 건축가는 대형 쇼핑몰과 확연히 다른 골목의 정서를 사옥에 담고자 했다. 화려한 외관보다 기둥과 보, 바닥과 벽의 비례, 노출 콘크리트의 질감을 강조한 입면은 변화무쌍한 주변 건물 사이에서 묵묵히 배경으로 존재한다. 외관에서 시선을 사로잡는 건 정면의 계단실이다. 2개 층 높이의 반투명한 계단실은 안과 밖에서 사람의 움직임을 투영하며 골목의 분위기에 스며든다. 내부에는 엘리베이터를 구석이 아닌 중심에 배치해 제품을 진열할 수 있는 벽을 만들고, 순환하며 쇼핑하는 동선을 계획했다. 마치 골목의 여러 가게에 들르는 듯한 경험을 의도한 것이다. 대지의 높이 차를 활용한 반지하 공간도 흥미롭다. 서울과 달리 부산에는 반지하를 이용한 상업 공간이 드문데, 건물 앞을 지나는 이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F&B 공간을 조성했다. 반지하 덕분에 도로보다 높아진 1층은 브랜드의 정체성을 드러내기에도 효과적이다.
클라이언트 노클레임
건축 건축사사무소 엠오씨
인테리어 ahch
건축 시공 엔원종합건설
인테리어 시공 BLDG
주소 부산시 부산진구 전포동 303-1
사진 텍스처온텍스처
자연을 위한 건축, 베케


제주도 서귀포시에 나직이 자리한 베케는 조경가의 사무실과 정원, 카페가 어우러진 공간이다. 조경가는 식물이 편안히 살 터전을 마련하고 사람들에게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해 제주에서 오랫동안 정원을 가꿨다. 첫 번째 베케를 완성한 지 수년이 지난 후 자연과 더 적극적으로 소통하는 정원 중심의 공간을 만들기 위해 건축을 의뢰했다. 건축가는 초기 단계부터 자연과 건축의 만남에 집중했다. 건축 어휘를 최대한 절제하고 자연의 배경이 되는 단순한 조형, 마음 편히 걷는 회랑, 건물로 둘러싸인 따뜻한 마당을 주제로 자연과 건축이 만나는 방법을 고민했다. 너른 부정형의 땅에 건물을 펼치고 둘러 제주의 거센 바람에 대응하고, 기능에 따라 나뉜 건물을 회랑으로 이어 어디서나 정원의 수풀과 마주하게 했다. 식재 단계에서는 나무의 수형과 건축, 자연의 조화를 염두에 두었다. 수평적 건물과 어울리는 가늘고 긴 수형의 나무를 빽빽하게 심어 숲을 조성하고, 평평한 땅을 움푹 파서 만든 부분에는 제주의 자연에 자생하는 풀과 꽃을 평생 연구한 조경가가 음지의 굼부리 정원을 계획했다. 단단한 돌과 부드러운 지형, 켜켜이 심은 나무와 여린 화초의 배경으로 자리하는 베케의 건축은 무덤덤하지만 서정적인 제주의 공간과 닮았다. 무심히 놓인 세 채의 건물과 그것을 연결하는 회랑은 공간과 공간 사이의 관계, 열림과 닫힘의 비례, 빛과 그림자를 고려해 섬세하게 매만진 결과물이다. 기분 좋은 어두움으로 자연을 감싸안는 베케는 제주의 풍경 속에 유유히 스며든다.
클라이언트 베케
건축 에이루트 건축사사무소
시공 더룩종합건설
인테리어 에이루트 건축사사무소, 선흘공방, 나무놀이터
조경 더가든
주소 제주도 서귀포시 효돈로 48
사진 박영채
도시와 삶의 균형을 찾는, 사이집



전주시의 택지개발지구는 담장을 허용하지 않거나, 허용하더라도 반드시 투시형으로 계획해야 한다는 지구단위지침이 있다. 이는 주민 간 커뮤니티를 활성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전주뿐 아니라 대부분의 택지개발지구에 공통적으로 규정된 사항이다. 하지만 진정한 관계의 시작은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된 상태에서 비롯되는 법. 사이집은 이러한 고민에서 출발한 중정형 주택이다. 건축주는 30대 중후반 부부로, 두 아들과 함께 살 2층 주택을 원했다. 주변 주택 대부분이 3층인 것과 대비되는 형상이었지만, 6m 길이로 떠 있는 2층 캔틸레버 구조를 통해 형태적 긴장감과 매스감을 효과적으로 표현했다. 설계의 핵심은 공간의 연결과 분리다. 대지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이어지는 긴 진입 동선과 마당, 중정을 지나는 과정은 일종의 완충 공간으로 외부에서의 긴장을 풀고 내부로 들어오는 감정의 변화를 부드럽게 유도한다. 1층에는 주방과 다이닝, 중정과 후정이 맞닿은 공간이 있는데, 모든 설비 요소를 시야에서 감춰 미니멀한 인테리어를 완성했다. 가족만의 프라이빗 영역인 2층에는 가족실과 침실, 아이 방, 서재, 놀이방 등이 자리한다. 중정의 산딸나무를 담아내는 통창은 이 공간의 백미다. 캔틸레버 구조는 하중을 견디도록 2층 슬래브와 창 하부 사이에 약 1.5m 높이의 역보를 설치했다. 시공자의 높은 숙련도 덕분에 정밀하게 구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지역의 규제 안에서 프라이버시와 개방성, 구조적 안정성과 미적 긴장감 사이의 균형을 이룬 사이집은 도시적 맥락 속에서 개인의
삶을 온전히 담아내고자 한 건축적 시도를 보여준다.
건축 일상건축사사무소
시공 토미종합건설
조경 조경상회
사진 노경
미술관 정체성 재구성하기, 부산현대미술관 옥상 전망 공간 및 로비 리노베이션



2017년 부산비엔날레의 주요 전시 및 운영 거점으로 개관한 부산현대미술관은 지역 현대미술의 중요한 플랫폼으로 자리 잡았다. 개관 이후 실험적 전시와 다양한 예술 프로그램을 통해 동시대 미술의 흐름을 확장해왔지만, 관람 환경과 편의 시설 측면에서는 여전히 개선할 부분이 남아 있었다. 2022년 미술관은 정체성 재정립을 목표로 공간 전반의 개선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2024년에는 로비와 옥상 전망 공간의 개선 작업을 마쳤고, 2025년 현재는 옥상 레스토랑 증축이 진행 중이다. 일련의 프로젝트는 단순한 시설 보완을 넘어 미술관 전체 공간 경험의 연속성과 장소적 확장을 모색하는 실험적 과정이다. 로비는 단지 방문객을 위한 편의 시설이 아니라, 미술관 경험이 시작되는 첫 장면이자 미술관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이에 따라 건축가는 로비를 연속된 공간 경험의 중심으로 재구성했다. 빛과 불가면不加面의 재료적 질감을 통해 관람객이 전시를 보기 전부터 자연스럽게 미술관의 분위기에 스며들도록 유도한 것이다. 새로 설치한 계단은 관람객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위로 이끌며 전시장과 옥상을 연결하는 감각적 통로이자 경험의 연속선으로 기능한다. 을숙도의 자연을 가까이에서 마주할 수 있도록 낮고 열린 형태로 계획한 옥상 공간의 붉고 긴 벽은 낙동강의 수평선을 따라 관람객의 움직임을 이끈다. 레스토랑은 옥상 가장자리에서 한 발 물러난 배치로 모든 방문객이 전망 공간을 공유할 수 있다. 전망 공간을 돌아 경사를 오르면 그 끝에 자리한 레스토랑에 이른다. 방문객은 잠시 전시를 잊고 레스토랑에서 머문 뒤, 다시 미술관의 긴 여정으로 돌아간다. 미술관의 전시는 끊임없이 교체되지만, 변함없는 로비와 옥상 공간은 부산현대미술관의 정체성을 드러내며 관람객의 기억 속에 하나의 장소로 자리 잡을 것이다.
클라이언트 부산현대미술관
건축 이소우건축사사무소
시공 새하종합건설
주소 부산시 사하구 낙동남로 1191
사진 박영채
절제한 재생, 동인동 골목 재생 프로젝트



지역 경제가 살아야 건축도 살아난다. 대구는 수도권 집중의 여파로 서서히 빈 도시가 되고 있다. 그럼에도 유의미한 움직임이 일어나고 있다. 최근 지역 건축가와 로컬 브랜드 빌더가 손잡고 침체된 골목을 활성화하는 프로젝트를 시작한 것이다. 대구 중구 동인동의 한적한 골목을 대상지로 진행한 이 프로젝트는 비어 있는 상점과 창고, 소규모 건물을 리모델링해 자생적인 골목 상권을 형성하려는 시도다. 1980년대에 지은 평범한 근린생활시설을 대상으로 한정된 예산 안에서 골목의 이미지를 정비하는 것이 과제였다. 건축가는 ‘정리된 스탠더드’를 키워드로 삼았다. 파사드의 통일된 톤앤매너, 절제된 간판과 사인 등 디자인을 의도적으로 절제했는데, 이는 다음 건축주를 위한 배려이자 골목 전체의 균형을 위한 장치다. 각 브랜드의 개성은 외부에서는 은근하게 드러내되, 내부에서 적극적으로 표현하도록 했다. 현재 레스토랑, 카페, 빈티지 숍, 패션 숍, 플라워 숍, 숙박업소 등 다양한 업종이 입점하며 골목이 서서히 활기를 되찾고 있다. 프로젝트는 아직 40%가량 진행된 단계지만, 단순한 공간 재생을 넘어 로컬 브랜드를 중심으로 한 ‘골목 산업’의 가능성을 입증한 셈이다. 건축가와 브랜드 빌더가 함께 상권을 만들고, 그 상권이 다시 도시의 생명력을 회복시키는 이 순환 구조는 지역 도시가 자생력을 회복하는 방식을 제시한다.
건축 제네럴 아키텍츠
주소 대구시 중구 동인동 일대
사진 김민욱
남해의 지형을 닮은, 화전어린이도서관



남해 고유의 자연경관인 ‘다랑논’을 모티브로 한 어린이 도서관이다. 다랑논은 농토를 한 뼘이라도 더 넓히기 위해 산비탈을 깎아 만든 좁고 긴 계단식 논이다. 건축가는 높낮이가 다른 대지를 연결할 때 비탈진 논이 층층이 이어지는 형태에 착안해 어린이가 자유롭게 뛰어노는 공간을 조성했다. 도서관이 자리한 터는 군청과 초등학교 등 공공시설이 인접해 있어 원도심의 골목을 대지 안으로 연계하는 것이 주요 과제였다. 이에 대지 형태에 따라 다양한 외부 공간을 마련해 누구나 편하게 드나들 수 있도록 했다. 내부는 변화하는 도서관의 기능과 역할을 반영해 구성했다. 편안히 앉아 책을 읽을 수 있는 의자가 듬성듬성 놓여 있고, 시끌벅적하면서도 독서하기 좋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명랑한 분위기의 도서관을 지향했다. 흥미로운 점은 로비가 작고 단출하다는 것이다. 대신 열람실은 1층과 2층을 연결해 층고를 높이고 자연광이 깊숙이 들어오도록 했다. 각 기능이 칸막이로 분리된 실의 개념이 아니라, 높낮이를 달리하며 유기적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흐름으로 설계했다. 그 결과 도서관 곳곳에서 양육자와 함께 편안히 몸을 기댄 채 책을 읽는 아이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화전어린이도서관은 지역사회에 뿌리내린 어린이 문화 공간이자, 세대가 함께 소통하고 어울리는 열린 커뮤니티 공간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클라이언트 남해군청
건축 아에아건축사사무소
시공 중앙토건
주소 경남 남해군 남해읍 아산리 357-6
사진 노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