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모더니즘의 아이콘이 지금 재조명 받는 이유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가 꿈꿨던 유토피아

AI와 로봇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첨단 기술 속에서 효율과 자동화가 일상화되면서 정작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간 중심 설계와 더불어 감정, 자유 의지, 휴머니즘을 담아내는 디자인에 시선이 향하고 있다. 그 덕분에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의 작업과 철학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아이콘이 지금 재조명 받는 이유

AI와 로봇 기술의 눈부신 발전은 역설적으로 ‘인간다움’이 무엇인지 되돌아보게 한다. 첨단 기술 속에서 효율과 자동화가 일상화되면서 정작 인간에게 중요한 요소들을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의식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이런 흐름 속에서 인간 중심 설계와 더불어 감정, 자유 의지, 휴머니즘을 담아내는 디자인에 시선이 향하고 있다. 그 덕분에 ‘에토레 소트사스(Ettore Sottsas)’의 작업과 철학이 다시금 주목받고 있는 중이다.

에토레 소트사스가 디자인계에 남긴 행적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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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멤피스 홈페이지

1917년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Innsbruck)에서 태어나 2007년 밀라노에서 생을 마감한 에토레 소트사스는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산업 디자이너자 건축가로, 모더니즘 디자인에 대한 강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흐름을 제시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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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그는 색채, 기호, 유머, 감정과 같은 요소를 적극적으로 디자인에 끌어들여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의 토대를 마련했다. 밝고 대담한 색감, 유리와 세라믹을 활용한 실험적인 소재 사용이 특징인 그의 대표작으로는 올리베티(Olivetti) 사의 타자기 ‘발렌틴(Valentine)’이 있다. 이를 통해 그는 일상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무용 기기를 개인 일상의 감정과 스타일을 드러내는 오브제로 전환시켰다. 이어 최고의 디자이너에게 수여하는 ‘황금 콤퍼스상(Compasso d’Oro)’을 수상하며 우수성을 인정받는다.

그의 이름을 더욱 널리 알린 것은 포스트모더니즘 디자인을 상징하는 그룹 ‘멤피스(Memphis)’에서의 주도적인 역할이었다. 1980년 12월 11일, 밀라노에 있는 소트사스의 집 거실에서 동료 디자이너와 건축가들이 모여 기존 질서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며 새로운 표현 방식을 논의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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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멤피스 홈페이지

‘멤피스’라는 이름은 미국 로큰롤의 제왕으로 불렸던 엘비스 프레슬리가 살았던 테네시 주의 도시이자 신의 가호를 받는 신성한 고대 이집트의 수도라는 중의적인 의미에서 차용된 것으로, 기존의 형식과 규범을 벗어나고자 했던 이들의 태도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후 1981년 밀라노 가구 박람회에서 가구, 조명, 도자기 등을 포함한 55점의 작품이 전시되며 세계적인 반향을 일으켰다. 이러한 사조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소트사스가 디자인한 ‘칼턴(Carlton) 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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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위키피디아

에토레 소트사스의 철학은 모더니즘의 상징적 구호인 ‘간결한 것이 더 낫다(Less is more)’에 대한 도전에서 출발한다. 이에 반하는 ‘간결함은 부족하다(Less is less)’라는 선언을 통해, 기능 중심의 단순함만으로는 인간의 삶을 충분히 담아낼 수 없음을 표현했다. 그에게 있어 디자인이란 그야말로 일상 속에서의 삶과 행복을 주는 존재, 자유의지와 밀접한 연결 관계를 맺는 예술이자 인간 중심의 탐구 과정이었다. 이런 정신이 녹아든 그의 유산은 오늘날 패션, 인테리어, 그래픽, 건축 등 다양한 분야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며 하나의 디자인 언어로 자리 잡고 있다.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세계, ‘축제로서의 행성’

모든 분야에서 인간의 감정과 유머를 중심에 두었던 그는 건축에서도 이러한 태도를 일관되게 드러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72년부터 1973년까지 진행된 연작 〈축제로서의 행성(Il Pianeta come Festival)〉이다. 이 프로젝트는 전통적인 건축과 도시 계획의 전제를 해체하고 도시 자체를 인간 활동이 끊임없이 펼쳐지는 ‘축제’로 바라보는 급진적인 상상력을 담고 있다. 인간의 경험과 감각, 그리고 삶의 즐거움을 중심에 둔 새로운 세계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가 다시금 고민하고 있는 ‘인간 중심 디자인’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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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에토레 소트사스 홈페이지

건축 잡지 카사벨라(Casabella)에 연재되었던 이 작품은 아이러니하게도 디자이너의 성공과 맞닿아 있다. 올리베티와 협업과 화려한 수상 경력으로 명성을 쌓아가던 소트사스는 1970년대 초반부터 이미 이탈리아 디자인계에서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성공은 그가 품어온 회의감을 더욱 깊게 만들었다. 그는 디자인이 점점 삶을 풍요롭게 하기보다 소비를 가속화하는 시스템의 일부로 기능하고 있다고 여겼다. 겉보기에 도시는 풍요로운 물자와 견고한 사회 기반 시설을 바탕으로 확장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정작 인간의 삶의 질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1960-70년대 이탈리아 디자인계 전반에서 공유되던 흐름이었다. 모더니즘에 기반한 도시계획과 경직되어 있는 소비사회의 구조에 대한 비판이 거세게 일던 이 시기에 ‘슈퍼스튜디오(Superstudio)’와 ‘아키줌 아소치아티(Archizoom Associati)’와 같은 급진적인 그룹들은 기존 시스템을 과장하고 극단화함으로써 그 모순을 드러내는 전략을 취했다. 특히 슈퍼스튜디오는 ‘연속적 기념비(The Continuous Monument)’라는 개념을 바탕으로 끊임없이 이어지는 격자 구조와 무한히 확장되는 도시 풍경을 제시하며 시스템의 숨 막히는 획일성을 역설적으로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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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에토레 소트사스 홈페이지

같은 지점에서 출발했지만 소트사스는 전혀 다른 방향을 택했다. 그는 영속성을 중심으로 구축되어 온 전통적인 건축 패러다임 자체를 해체하고 나아가 시스템을 제거하는 급진적인 상상을 시도했다. 사회가 더 이상 노동, 생산, 효율성을 중심으로 조직되지 않는다면 건축 역시 통제와 최적화를 위한 도구로 존재할 필요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건축은 최소한의 구조만을 남긴 채 인간의 상호작용을 유도하고 지지하는 배경으로 물러나게 된다. 공간을 미리 규정하는 대신 상황과 관계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되도록 여지를 남기는 ‘열린 장치’로 전환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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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에토레 소트사스 홈페이지

이러한 사유의 배경에는 인도 여행에서의 경험이 깊이 자리 잡고 있었다. 인도에서는 공간이 물리적인 구조보다는 의례, 시간, 그리고 집단적 의미에 의해 형성된다. 계절에 따른 모임, 일시적인 정착지, 축제 중심의 점유 방식은 기념비적인 형상에 의존하지 않고도 공간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을 만들어 낸다. ‘사용이 형태에 앞서고 일시성이 반복을 통해 연속성을 획득하는’ 공간의 논리는 서구 건축이 전제해온 고정성과 영속성을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것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소트사스는 건축이 구조가 아닌 삶의 경험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새로운 비전을 구상했고, 이를 행성적 스케일로 확장해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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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에토레 소트사스 홈페이지

그가 상상한 미래에서 재화는 자유롭고 풍족하게 생산되어 전 세계로 순환한다. 은행, 슈퍼마켓, 지하철과 같은 기존의 시스템에서 벗어난 인간은 자신의 몸과 정신, 그리고 관계를 통해 살아있음을 자각하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기술은 자아 인식을 고양하는 데 사용될 수 있으며, 삶은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전개된다. 이러한 세계에서 건축은 고정된 구조물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생성되고 해체되는 유동적인 오브제로 존재한다. 열린 상태로 유지되는 공간은 적응력을 기반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끊임없이 재해석된다.

새롭게 재해석되고 있는 소트사스의 미래 도시 개념

‘미리 설계된 세계가 아니라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세계’라는 아이디어는 당시로서는 매우 급진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이후 멤피스의 강렬한 시각적 언어와 상업적 영향력이 부각되면서 이러한 개념은 상대적으로 오랫동안 주목받지 못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현재에 와서야 이 개념이 다시금 화제가 되고 있다.

그 이유는 우리의 생활 방식이 점차 시간성을 중심으로 재편되고 있기 때문이다. 팝업 스토어를 비롯하여 페스티벌, 비엔날레 등과 같은 일시적 이벤트들은 도시의 풍경을 단기적으로 재구성하며 고정된 공간 개념을 유연하게 흔들고 있다. 동시에 환경 오염과 기후 변화는 주거의 영속적인 가능성을 위협하며 이동성과 가변성을 중요한 가치로 부상시키고 있다. 그와 더불어 디지털 환경의 진화는 물리적 장소에 얽매이지 않는 분산형 생활을 가능하게 하고 있다. 사람들은 더 이상 하나의 장소에 머무르기보다는 목적에 따라 이동하고 연결되며 새로운 관계를 형성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경량성, 적응성, 해체 가능성과 같은 요소들은 더 이상 실험적 개념이 아니라 현실적인 설계 조건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이처럼 1970년대에는 다소 도발적으로 여겨졌던 아이디어는 오늘날 새로운 시대를 마주하며 재해석되고 있다. 이는 모든 것이 정교하게 설계되고 최적화되는 기술 중심의 환경 속에서 오히려 덜 설계된 상태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개념이 현실로 완전히 구현되기에는 여전히 한계가 존재한다. 지속성과 돌봄이 필요한 공간이나 사회적 인프라와 같은 영역은 단순히 생성과 소멸을 반복하는 방식만으로는 유지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건축과 도시 계획이 전제해온 질서에 질문을 던지고, 다른 방향을 상상할 수 있는 여지를 열어주었다는 점에서 이 프로젝트는 충분한 가치가 있다. 수십 년 전에 제시된 사유가 오늘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하나의 답처럼 조명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에토레 소트사스의 통찰이 얼마나 선구적이었는지를 다시금 실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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