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ARC>

베를린에서 선보이는 이상혁 디자이너 개인전

이상혁은 가구의 고정된 기능을 유보하고 사물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집중한다. 건축적 아치에서 영감을 얻은 '호(ARC)' 시리즈는 익숙한 쓰임을 비틀어 사용자에게 생경한 감각을 일깨운다. 형태의 완결성보다 사물 앞에서의 망설임과 움직임 등 관람객의 경험을 통해 비로소 작품을 완성하는 열린 태도를 보여준다.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순간, <ARC>

가구는 대개 완성될 때 말을 멈춘다. 설계도의 마지막 선이 그어지는 순간, 형태는 기능에 충실하기 시작한다. 의자는 앉는 것, 선반은 쌓아두는 것, 조명은 밝게 밝히는 것이라는 명제를 우리는 너무 오래 당연하게 여겨왔다. 그 당연함이 굳어진 나머지, 사물의 기능 바깥에서 어떤 가능성이 열릴 수 있는지 상상하는 일은 좀처럼 드물다. 이상혁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서 다시 시작된다. 완성을 유보하고, 기능의 바깥에 서성이며, 사물이 말을 멈추지 않도록 붙잡아두는 방식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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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혁 디자이너 사진 Clemens Poloczek

형태가 질문하는 방식

전시 제목이자 시리즈명인 ARC, 호(弧)는 기하학적으로 원의 일부다. 시작은 있으되 끝은 열려 있고, 혼자로는 미완이어서 다른 무언가를 향해 뻗어야만 의미를 획득하는 형태. 작가에게 이 시리즈의 시작을 물었을 때, 그는 건축 이야기를 꺼냈다. 도시를 걸을 때 유독 건축이 공간을 다루는 방식에 시선이 머문다고 했다. 아치가 있는 건물 안에서 기둥이 천장과 만나는 방식이나 베를린 알트 바우 특유의 둥글게 처리된 모서리들 말이다. 건축이 직선으로 끝나지 않고 완만한 곡면으로 전환하는 그 지점에서 면과 면이 맞닿으면 공간은 닫히거나 열린 느낌을 준다. 때로는 그 선택 하나로 공간 전체의 성격이 달라지기도 한다. “그런 구조물들을 보면서 머릿속으로 선을 그어봤어요. ‘천장이랑 벽에 이런 선이 있으면 재밌겠네’ 하면서요.” 그는 그 선들을 가구에 적용해 보고 싶었다. 드로잉도, 구체적인 플랜도 없이 작업실부터 먼저 예약했다. 그리고 스튜디오 한편에 오래 놓여 있던 오크 원목을 찾았다. ARC 시리즈는 그렇게, 개념보다 몸이 먼저 움직인 자리에서 시작됐다.

전시장을 둘러보면 그의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선들이 콘솔과 스툴, 의자, 선반 위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내려앉아 있음을 쉽게 알아차린다. 시선이 가장 먼저 닿는 것은 Light . 가느다란 오크 목재가 천장을 향해 활처럼 부드럽게 휘어지며, 바닥 기둥 쪽으로 LED를 향해 내려앉는다. 그 빛은 강렬하게 내리쬐기보다 주변 피스들의 윤곽을 벽 위에 길게 드리우며 그림자를 만든다. 오크 위에 한 번, 그리고 벽 위에 한 번 더 그려진 호는 관람객이 작품 사이를 걸어 다닐 때마다 조금씩 흔들리고, 전시 관람객의 실루엣과 잠시 겹쳤다가 멀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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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ght, oak, LED, 32 x 69 x height variable. 사진 KATERYNAMYROPHOTO, Wohnen Am Tacheles

‘Console’에서 호는 상판 아래를 대각으로 가로지른다. 기능적으로는 보강재이지만 눈에는 허공에 그어진 곡선으로 읽힌다. ‘Bench’에서 하나의 긴 호는 180cm 상판 아래로 바닥에 거의 닿을 듯 늘어진다. 기울어져 곧 바닥에 닿을 것 같은 그 선을 눈으로 따라가다 보면 곧바로 앉기보다 자연스레 그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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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 Chair Typ 03 poster. 사진 Shinichiro Shiraishi

‘Ladder’ 는 수직 구조물 옆으로 크게 휘어져 벽과 사다리 사이 공간을 부드럽게 감싸고, ‘Frame Corner Typ 01’은 계단 벽에 홀로 붙어 아무것도 받치지 않은 채 두 방향을 향해 팔만 벌리고 서 있다. 그중에서 발길을 가장 오래 붙든 작업은 ‘Chair Typ 03’. 등받이 위로 막대 하나가 더 솟아 있고, 좌판 아래로 크게 휜 호가 다리 사이를 가로지른다. 그 안쪽에 생겨난 빈 공간, 살짝 틀어진 좌판, 비대칭 구조가 유머러스하다. 작가는 팔걸이를 하나만 쓰며 한쪽으로 기대어 앉는 자신의 습관에서 이 형태를 고안했다. 누군가의 흐트러진 자세가 오크 목재 안에 조용히 굳어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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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ch, oak, 180 x 31.5 x 42.5 cm. 사진: Shinji Minegis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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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nch, oak, 180 x 31.5 x 42.5 cm. 사진: Shinji Minegishi

가구 너머, 사물과 사람 사이

이상혁은 자신을 가구 디자이너라고 소개하지 않는다. 가구는 그에게 익숙한 여러 매체 중 하나일 뿐이라고 했는데, 이 짧은 문장이 지금껏 그가 해온 작업을 이해하는 단서로 읽혔다. 그의 작업들은 오브제의 완결성이 아니라 사물과 사람 사이에서 ‘무엇이 벌어지는가’에 대한 질문에 가깝다. 그래서 그의 작업 앞에 서면 “이것은 무엇인가”보다 “나는 이것을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전시장에 놓인 의자 하나를 앞에 두고 잠깐 망설이게 되는 순간, 그 머뭇거림 자체가 이미 작업의 일부가 되는 것이다. 앉아도 되는지, 기대어도 되는지, 그저 바라봐야 하는 것인지 판단이 유예되는 그 찰나에, 사물은 비로소 다시 보이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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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sten to Your Hands, 2011. 사진 Jaeuk Lee

이 태도는 초기작 ‘Listen to Your Hands'(2011)에서도 예고되었다. 서랍 하나를 밀면 다른 서랍이 열리는 구조는 사용자의 습관을 살짝 비틀어 놓는다. 익숙한 행동이 뜻밖의 결과를 낳는 순간, 손과 몸이 불현듯 의식의 표면으로 올라온다. “우리가 문을 열 때 손잡이를 의식하지 않잖아요. 그냥 문을 열뿐이죠. 그러다 어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내가 지금 몇 개의 손가락으로 문고리를 잡았지, 얼마나 힘을 줬지 하는 감각이 불쑥 올라올 때가 있어요.” 이상혁의 작업은 너무 익숙해진 나머지 무의식 속으로 가라앉아 버린 감각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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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ere the Light Touches, 2022. 사진 Texture on Texture

가구를 만들 때마다 그는 작품이 놓일 공간을 먼저 그렸다. 형태나 마감보다 앞서, 사물이 어떤 자리에서 누구의 손과 만날 것인지를 상상했다는 뜻이다. 보는 사람도 자신의 공간을 그려보길 바랐다고 했다. 영상 작업을 시도한 건 그 상상을 물리적으로 밀어붙인 결과였다. 스테이지 프로덕션 디자인을 통해 머릿속에서만 맴돌던 공간을 실제로 세울 수 있다는 걸 알게 됐을 때, “오브제의 연장이라는 관점에서 흥미롭게 시작했다”라고 했다. 석사 과정 이후 몰두했던 필름 시리즈 <The>는 그 방법론을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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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ir> 스틸컷, 6’47”. 기획: 이상혁, 연출: Ewan Wadde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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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Chair> 스틸컷, 6’47”. 기획: 이상혁, 연출: Ewan Waddell

그는 배우들에게 오브제 앞에서 의미 없는 대화를 반복하게 했다. 오브제를 직접 설명하거나 전면에 내세우는 대신, 사람의 말과 움직임 속에 슬며시 놓아두는 방식이었다. 카탈로그 사진처럼 오브제를 전면에 내세우면 보는 사람은 사물의 형태와 마감에만 집중하게 된다. 그러나 대상이 배경으로 물러날 때, 비로소 그것이 일상 안에서 사용자와 어떤 관계로 존재하는지 보이기 시작한다. 손에 쥔 아이폰은 결국 화면만 남고 디자인은 잊힌다는 어느 인터뷰처럼, 그에게 사물의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그 형태가 사람과 맺어온 관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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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oorknob> 포스터, 11’04”. 연출: 이상혁, Ewan Waddell. 포스터 디자인: 한정훈

전시장을 나서면서 한 번 더 조명을 돌아봤다. 누군가 작품 사이를 지나쳤는지, 벽 위의 그림자가 조금 다른 자리에 내려앉아 있었다. 이상혁의 작업이 완성을 유보한다고 했는데, 사실 이 표현은 절반만 맞다. 그것은 완성을 미루는 것이 아니라, 앉은 사람의 무게로, 한 바퀴 둘러보는 발걸음으로, 그리고 그 앞에서 잠시 멈추는 망설임으로 완성의 자리를 관람객에게 열어둔 것이다. 대화 말미에 그는 ARC를 오크가 아닌 다른 재료로, 다른 방식으로 풀어보는 것을 생각 중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으니 이 시리즈가 어딘가를 향해 아직 뻗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닫히지 않은 채로, 다음을 기다리는 그의 선처럼 말이다.

<ARC>
주소 MAJ VAN DER LINDEN, Johannisstraße 14, 10117 Berlin
기간 2026년 2월 26일 – 4월 24일
웹사이트 홈페이지, 인스타그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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