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계 이단아, 가에타노 페셰의 가구와 공간

공간에서 기능보다 스타일이 우선일 때

파격적인 개성으로 이탈리아 디자인의 지평을 넓힌 인물로 평가받는 가에타노 페셰. 그의 가구와 공간 디자인을 마주할 수 있는 전시가 파리에서 열리고 있다.

디자인계 이단아, 가에타노 페셰의 가구와 공간

전 세계가 하나의 트렌드로 동기화되는 오늘날에도, 나라와 지역마다 고유한 분위기는 여전히 뚜렷하게 드러난다. 디자인이라는 분야 또한 마찬가지다. 대륙과 국가에 따라 서로 다른 감각과 미학이 축적되며, 각기 다른 결의 결과물이 탄생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독창적인 개성을 지닌 디자이너를 꾸준히 배출해온 나라를 꼽으라면 단연 ‘이탈리아’라고 할 수 있다. 아르마니와 베르사체로 대표되는 패션 디자인은 물론이고 알렉산드로 멘디니, 에토레 소트사스, 브루노 무나리와 같은 디자이너들이 산업 전반에 걸쳐 자신만의 언어를 구축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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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가에타노 페셰 인스타그램

그런 쟁쟁한 디자이너들 중에서 ‘가에타노 페셰(Gaetano Pesce)’는 파격적인 개성으로 이탈리아 디자인의 지평을 넓힌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규칙을 해체하는 자유로운 형태와 표현을 위해서라면 과감함을 주저하지 않는 강렬한 색채, 그리고 예상을 뒤엎는 소재 선택을 통해 디자인의 가능성을 끊임없이 확장해왔다. 나아가 동일한 형태의 반복 생산을 전제로 하는 산업디자인의 관습에 문제를 제기하며, 획일성에 대한 비판적 시선을 드러냈다.

그의 작업은 디자인과 순수 미술 사이를 넘나들며 경계를 흐릿하게 만드는 동시에 의도적인 충돌에서 비롯되는 긴장과 대비를 통해 독특한 미적 경험을 만들어냈다. 산업디자이너로서의 활동에 머무르지 않고 건축과 예술 전반으로 영역을 확장해온 그의 태도는 기존의 범주로는 쉽게 정의되지 않는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그는 종종 ‘디자인계의 이단아’로 불렸지만, 동시에 시대를 앞서 나간 실험가로서 오늘날까지 새로운 시각적 충격과 영감을 선사하는 존재로 인정받고 있다.

기묘한 아름다움을 만드는 가에타노 페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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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가에타노 페셰 인스타그램

1939년 이탈리아의 라 스페치아(La Spezia)에서 태어난 가에타노 페셰는 1958년부터 1963년까지 베네치아 대학교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그의 작업이 디자인에 머무르지 않고 건축까지 자연스럽게 확장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이러한 학문적 기반이 자리한다. 이후 베네치아를 비롯해 런던, 헬싱키, 파리 등 유럽 주요 도시를 오가며 활동하던 그는 1980년 뉴욕에 정착했고, 이를 계기로 활동 무대를 전 세계로 넓혔다. 이후 미국과 유럽은 물론 라틴아메리카와 아시아 전역에서 건축, 도시계획, 인테리어, 전시, 산업디자인에 연관된 다양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며 영역을 가로지르는 작업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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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가에타노 페셰 인스타그램

그는 실무뿐 아니라 교육 분야에서도 오랜 시간 영향력을 발휘했다. 카네기멜론 대학교와 도무스 아카데미 등과 같은 세계적인 대학에서 약 28년간 건축을 가르치며 후학을 양성했다. 또한 그의 작품은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비트라 디자인 뮤지엄, 런던 V&A 등 세계 유수의 박물관에 영구 소장되어 있다. 2020년대에는 이탈리아 브랜드 보테가 베네타와 협업해 패션쇼 공간과 가방 디자인을 선보이며 노년의 나이에도 여전히 실험적인 창작 활동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2024년 4월 4일, 84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며 한 시대를 이끌었던 그의 디자인 여정은 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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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비앤비 이탈리아 홈페이지

6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예술과 디자인, 건축 전반에 걸쳐 새로운 가능성을 탐구해온 그에게 있어 가장 상징적인 작품은 이탈리아 가구 브랜드 ‘비앤비 이탈리아(B&B Italia)’와 협업한 ‘업(UP)’ 소파 시리즈라고 할 수 있다. 둥근 형태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이 소파는 시각적으로는 부드럽고 포근한 인상을 주며, 실제로도 인체를 감싸는 구조를 통해 기능적 완성도를 높인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독창적인 조형 언어는 이후로도 쉼 없이 확장되었다. 천을 겹겹이 쌓아 올려 만든 ‘래그 체어(Rag chair)’, 곡선의 유려함을 극대화한 ‘달리알 체어(Dalial chair)’, 뉴욕의 스카이라인을 가구로 재해석한 ‘트라몬토 아 뉴욕(Tramonto a New York)’, 사용자의 취향에 따라 형태를 바꿀 수 있는 ‘아이 펠트리 체어(I Feltri Chair)’에 이르기까지, 그는 매번 파격적인 시도로 세계적인 명성을 공고히 했다.

디자인계의 이단아가 만든 사무실의 모습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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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다양한 분야에서 영향력을 미쳤던 가에타노 페셰의 흔적을 파리에 있는 ‘펄프 갤러리(Pulp Galerie)’에서 다시금 조명하고 있다. 갤러리가 3월 26일부터 5월 30일까지 진행하는 이번 전시는 뉴욕의 광고대행사 ‘치아트/데이(CHIAT/DAY)’를 위해 그가 설계한 가구와 공간 디자인을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점은 이 작품들이 모두 1994년에 제작되었다는 사실이다. 수십 년의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마주해도 여전히 낯설고 신선하게 다가오는 이 작업들은 획일적인 디자인을 거부하고자 했던 그의 철학을 선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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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프로젝트는 그의 작업 세계를 관통하는 혁신적인 업적 중 하나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로서의 경험에 베네치아 대학의 건축 교육과 모더니즘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더해 독자적인 건축 세계를 구축했다. 그 결과 탄생한 이 공간은 전형적인 사무 공간의 문법을 과감히 탈피하고 있다. 엄격한 위계질서가 없는 개방적이고 유동적인 공간은 표준화된 업무 환경에서 벗어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한다. 여기에 공간을 채운 요소들은 가구를 넘어선 하나의 예술적 오브제라고 할 수 있다. 금방이라도 물감이 흘러내릴 듯한 테이블, 강렬한 색채에 투명함을 더한 경쾌한 감성의 의자, 한 폭의 회화 같은 패널은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감각적인 활력을 불어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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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펄프 갤러리 홈페이지

뉴욕 어퍼 이스트사이드의 고층 빌딩 38층에 자리했던 이 공간은 1998년 철거되면서 한때 사라질 위기에 놓였다. 펄프 갤러리는 이를 보존하는데 노력을 기울였으며, 이어 전시를 통해 당시의 공기와 감각까지 다시 구현해 놓았다. 전시된 요소 하나하나에는 1990년대 뉴욕을 대표하는 광고 대행사의 크리에이티브 팀원들의 일상이 담겨 있으며 관람자는 그 시대의 생생한 흔적과 자연스럽게 마주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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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출처 펄프 갤러리 홈페이지

이번 전시는 치아트/데이 프로젝트의 기원과 역사적 맥락, 미학적 의미, 그리고 유산을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도록 출간과 함께 진행된다. 아카이브 자료와 사진, 관계자들의 증언, 비평적 분석을 아우르는 이 도록은 페셰의 작업을 보다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계기를 제공한다. 이를 통해 그를 디자인 분야에만 국한된 인물이 아니라, 건축, 가구, 오브제 등 모든 예술 분야를 아우르는 하나의 포괄적인 비전을 구현하는 전인적인 예술가로 바라볼 수 있도록 한다.

이제 더 이상 디자이너는 세상에 없지만, 그의 작품은 세상에 남아 깊은 울림을 선사하고 있다. 급진적이며 자유로운 그의 세계는 아름다움의 기준을 다시 묻는 동시에 디자인과 예술, 건축이라는 구분이 실은 하나로 이어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번 전시에 재현된 사무 공간은 그가 평생 탐구해온 가치의 집약체이자, 앞으로의 창의적 작업 환경이 나아갈 방향을 암시하는 하나의 청사진이라 할 수 있다.

〈Gaetano Pesce, The Chiat/Day New York Project〉

주소 30 rue de Seine, 75006 Paris
기간 2026년 3월 26일 – 5월 30일
운영 시간 12:00 – 18:00
웹사이트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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