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터 춤토르의 첫 미국 미술관, LACMA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 개관

건축·동선·큐레이션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재구성하다

지난 4월,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의 새로운 상설 전시관인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가 개관했다. 약 20년에 걸친 기관 재편의 결과물이자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의 첫 미국 프로젝트이며, 최대 규모 작업이다.

페터 춤토르의 첫 미국 미술관, LACMA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 개관

지난 4월 19일, 로스앤젤레스 카운티 미술관(Los Angeles County Museum of Art, 이하 LACMA)의 새로운 상설 전시관인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가 개관했다. 약 20년에 걸친 기관 재편의 결과물이자 스위스 건축가 페터 춤토르(Peter Zumthor)의 첫 미국 프로젝트이며, 최대 규모 작업이다. 길이 약 274미터에 달하는 유리·콘크리트 구조는 핸콕 파크를 따라 곡선을 그리며 이어지고, 윌셔 대로를 가로지른다. 약 6,000년에 걸친 15만여 점의 컬렉션이 새롭게 배치된다.

LACMA는 미국 서부에서 가장 큰 미술관이다. 단일한 미술사 서사보다 다양한 문화권의 동시적 존재를 강조해왔다. 특히 CEO이자 관장인 마이클 고반(Michael Govan) 주도 아래, 대형 커미션 작업과 건축 프로젝트를 통해 미술관의 정체성을 적극적으로 재구성했다.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는 이러한 흐름의 정점에 위치하며, 전시의 구조 자체를 다시 짜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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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Associates/LACMA 사진: Iwan Baan

프로젝트가 더욱 주목받는 이유는 춤토르의 작업 방식과도 긴장 관계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그는 소규모 프로젝트에서 재료, 빛, 감각적 경험을 밀도 있게 다루는 건축가로 알려져 있으며, 명확한 형태적 아이콘보다 공간의 분위기와 체험을 중시해왔다. 그런 그가 대규모 미술관, 그것도 방대한 컬렉션을 다루는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점은 이례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건물의 두드러진 특징은 주요 전시층 전체가 지면에서 약 9미터 들어 올려져 있다는 점이다. 약 11만 평방피트의 전시 공간이 단일한 연속 평면 위에 펼쳐지며, 이 구조를 일곱 개의 파빌리온이 지지한다. 파빌리온 사이와 주변으로는 상부 전시층의 그늘 아래 플라자가 있고, 교육 및 공공 프로그램 시설, 극장, 리테일 공간 등이 배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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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Associates/LACMA 사진: Iwan Baan

이 구조는 미술관이 도시와 관계 맺는 방식을 재정의한다. 기존 미술관이 대지 위를 점유하고 내부로 기능을 집중시키는 방식이었다면,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는 하부를 비워 도시의 흐름을 통과시키는 구조를 취한다. 입장 여부와 관계없이 접근 가능한 영역을 형성하며, 미술관은 경계로 닫힌 공간이 아니라 공공 인프라로 작동한다. 윌셔 대로를 가로지르는 배치는 이러한 전략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낸다. 건물은 하나의 부지에 고정되지 않고 도시 네트워크를 가로지르며, 이동과 통과의 흐름 속에서 인지된다. 이는 미술관을 목적지가 아니라 경로 위의 공간으로 전환시키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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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발의 커미션 작업 © Mariana Castillo Deba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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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Associates/LACMA 사진: Iwan Baan

약 19,200㎡ 규모의 플라자 바닥은 멕시코의 시각예술가 마리아나 카스티요 데발(Mariana Castillo Deball)의 커미션 작업 ‘Feathered Changes’로 구성된다. 춤토르와의 협업으로 완성된 이 작업은 장소가 과거 습지 생태계였던 역사와 현재의 건축을 연결하며, 지면 자체를 하나의 전시 매체로 전환한다. 이처럼 전시는 내부 공간에 국한되지 않고 외부까지 확장되며, 건물과 대지는 하나의 연속된 전시 환경으로 읽힌다.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변화는 동선의 해체다. 특정한 관람 경로는 설정되지 않으며, 다양한 규모와 밀도의 갤러리가 하나의 평면 위에서 연속적으로 이어진다. 관람객은 정해진 순서 없이 이동하며 자신의 경로를 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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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Associates/LACMA 사진: Iwan Baan

이 구조는 전통적인 미술관의 시간 기반 서사를 해체한다. ‘입구–전개–결론’으로 이어지는 선형 구조 대신, 관람 경험은 분산되고 병렬적으로 축적된다. 건축은 이 여정을 유도하는 장치로 작동하며, 공간은 시야와 흐름이 겹치는 장면들의 연속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동선은 전시 구성 방식과 직접적으로 맞물린다. 개관 전시는 45명의 큐레이터가 협력해 구성했으며, 태평양·대서양·인도양·지중해라는 네 개의 해양 네트워크를 프레임으로 삼는다. 이는 국가나 시대 중심의 분류를 대체하는 구조로 서로 다른 지역과 시기의 작품을 동일한 층위에서 병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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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Associates/LACMA 사진: Iwan Baan

이는 미술사를 교류와 이동의 경로 위에서 형성된 네트워크로 바라보게 만든다. 작품은 특정한 기원이나 범주에 고정되지 않고, 서로 다른 맥락 속에서 다시 읽히게 된다. 동시에 관람객은 이 관계를 스스로 구성해야 하며, 전시는 해석을 제공하기보다 해석의 조건을 설계하는 방식으로 작동한다.

빛은 건물에서 전시 경험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다. 외곽을 따라 설치된 바닥부터 천장까지 이어지는 유리 파사드는 자연광을 깊숙이 유입시키며, 전시 공간을 균일한 조명 환경에서 벗어나게 한다. 춤토르의 설계는 빛을 통제하기보다 빛과 그림자의 상호작용을 전제한다. 외곽의 테라스형 갤러리와 내부의 보호된 갤러리가 공존하며, 각 공간은 서로 다른 조명 조건을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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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Associates/LACMA 사진: Iwan Ba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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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eum Associates/LACMA 사진: Iwan Baan

도쿄 기반 섬유 디자이너 스도 레이코(Reiko Sudō)의 금속성 반투명 커튼은 빛을 차단하기보다 확산시키며 공간에 또 다른 레이어를 형성한다. 시간대, 계절, 날씨에 따라 빛의 조건이 시시각각 달라지고, 작품의 인상 또한 변화한다. 동일한 전시가 재방문 시 다르게 경험된다는 점에서, 공간은 시간에 따라 변형되는 환경으로 작동한다. 이러한 선택은 완벽하게 통제된 전시 조건을 포기하는 대신, 경험의 유동성을 수용하는 태도를 드러낸다. 자연광으로 인한 반사나 음향 문제는 설계의 부수적 결과이지만, 동시에 미술관을 하나의 살아 있는 환경으로 다루려는 접근의 일부이기도 하다.

데이비드 게펜 갤러리는 건축 형식, 관람 동선, 전시 서사를 분리된 요소로 다루지 않았다. 수평 구조, 비선형 동선, 네트워크 기반 전시라는 세 축이 하나의 시스템으로 작동하며, 미술관을 정리된 지식을 전달하는 공간이 아니라 탐색과 선택이 이루어지는 장으로 재구성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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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개관 소식을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건축적 실험 때문만이 아니다. 미술관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아닌, 어떻게 보여주고 어떻게 경험하게 하는가에 대해 건축과 전시가 동시에 응답하고 있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대 중심의 분류를 해체한 전시, 변동성을 수용한 빛의 설계, 도시에 열린 구조는 동일한 태도에서 비롯된 결정들이다. 그 태도란, 미술관을 완결된 서사의 그릇이 아니라 해석이 끊임없이 갱신되는 조건으로 설계하는 것이다. 갤러리가 앞으로 컬렉션을 어떻게 재배열하고, 비선형 구조 안에서 어떤 전시 실험을 이어가는지는 동시대 미술관 모델을 둘러싼 논의에서 중요한 참조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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