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reator+] 패션 스튜디오 르쥬의 A to Z : 〈케데헌〉 이재의 오스카 드레스부터 제니 〈ZEN〉 MV 의상까지

강주형&제양모 르쥬 디자이너·공동 대표

르쥬는 자신들의 이야기를 과감하게 풀어내고, 전통을 감각적으로 재해석하며, 수공예의 장인정신을 존중한다. 앞으로의 행보가 더 기대되는 르쥬의 지금까지의 대표 작품과 프로젝트를 살펴본다.

[Creator+] 패션 스튜디오 르쥬의 A to Z : 〈케데헌〉 이재의 오스카 드레스부터 제니 〈ZEN〉 MV 의상까지

르쥬의 작품을 마주하면 해석력과 표현력에 놀라게 됩니다. 인상에 오래 남을 정도로 아름다운 디자인 때문에 많은 이가 감각에만 의존하여 작업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르쥬는 자료 조사부터 시작합니다. 이 과정은 디자이너의 이야기의 근거를 단단하게 만들어주고, 시각 표현에도 새로운 아이디어를 제공해줍니다. 여기에 기본적으로 4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장인들의 만듦새까지 더해져 옷이 아닌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프로젝트 A to Z

Collaboration with Sulwhaso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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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5월, 르쥬는 글로벌 뷰티 브랜드 설화수와 협업 제품을 출시하고, 이를 기념하는 전시 <Room of Women, 세대를 잇는 여성의 방>을 6월 14일까지 연다. 한국의 미(美)라는 가치를 장인 및 공예 작가와 협업하며 전달하고, 우리나라의 헤리티지를 알리는 설화수와의 협업은 르쥬의 브랜드 정신과 통하는 부분이 있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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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ore Pacific

협업 제품 ‘퍼펙팅 쿠션 리미티트’는 매화를 모티프로 한 자개 장식이 패키지에 새겨져 한국의 화려한 아름다움을 전달한다. 제품 출시와 함께 열린 전시에서는 검은 자개장에서 영감 받은 뷔스티에와 조선시대 궁중 여성들의 머리 모양인 어여와 떠구지의 형태를 닮은 볼드한 실루엣의 스커트, 5명의 장인이 200시간 넘게 바느질하여 만든 드레스 등 장인들의 노력으로 완성된 르쥬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Gir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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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쥬의 쇼룸 이름인 ‘기록’은 후일에 남길 목적으로 어떤 사실을 적는 행위를 뜻하는 단어 ‘기록(記錄)’에서 앞의 한자를 베틀 기(機)로 바꿔 ‘베틀로 천을 엮으며 르쥬의 감각과 시간을 남긴다’는 뜻을 지닌다. 한자 하나를 바꿈으로써 패션 브랜드로서의 정체성을 드러낸 것이다. 부조화 속 조화를 추구하는 르쥬는 브랜드의 지향점을 공간적 경험으로 느낄 수 있도록 한국(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럭셔리와 마이너가 한 공간에 어우러지도록 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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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디자이너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소파와 이한규 장인의 공작선이 함께 놓여 있고, 장승태 작가의 테이블 앞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가져온 빈티지 의자가 있다. 또,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고가구 위에는 막 데뷔한 공예가의 도자기가 올려져 있다. 공간의 작은 부분 하나까지, 르쥬라는 브랜드의 정체성뿐만 아니라 강주형, 제양모 두 디자이너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려주는 듯하다.

I, Me, Mine
I

1인칭대명사로 된 컬렉션명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2026 S/S 컬렉션은 르쥬가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이자 답이다. 이를 준비하면서 브랜드의 근간을 이루는 요소들, 예를 들어 감각적인 장인정신(Sensual Artisanal)이라는 브랜드 모토, 전통과 수공예를 현대적인 시각으로 재해석한다는 아이덴티티, 구조적인 실루엣, 상반된 요소들의 조화 등 그동안의 고민들을 총체적으로 보여주면서 그 모든 것이 르쥬 그 자체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임을 전달하고자 했다. 한마디로 26 S/S 컬렉션은 르쥬가 다시 한번 세상에 자아를 정의하고, 자신들이 나아갈 길을 공표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자신을 돌아보는 컬렉션의 핵심 형태는 순환과 회귀에서 영감을 받은 ‘원(Circle)’이다. 그래서 컬렉션 전반적으로 원의 형태와 그를 활용한 패턴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MMA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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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이 뚜렷한 아티스트일수록 디자이너도 망설임없이 그들의 이야기를 작품에 담을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르쥬와 제니의 작업은 큰 시너지를 보여준다.

<ZEN>에 이어 작년 MMA 무대 의상도 한국 문화, 특히 한글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다. 한글로 기록된 최초의 노래 가사집 <청구영원>에 수록된 구절을 15미터의 베일에 제니가 개발한 한글 폰트 ‘젠 세리프’로 적은 의상은 한글이 가진 구조적 아름다움과 아티스트의 정체성을 조화롭게 보여줬다.

또한, 노래를 언어로 표현한 가사집을 무대 위에서 시각적으로 펼쳤다는 점에서 노래와 무대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장치로도 해석할 수 있다. 제니가 마지막 곡에서 입었던 자켓은 제니의 이름을 2,000개의 장식에 금박장 기법으로 새김으로써 아티스트의 존재를 언어로서 다시 한번 강조하는 효과를 전달하고자 했다.

Osc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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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M.P.A.S.

제98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영화 주제가상을 받고, 특별공연을 펼친 〈케이팝 데몬 헌터스〉의 이재가 입은 화려한 금박 장식의 드레스도 르쥬의 작품이다. 이재는 노래 제목인 ‘골든(Golden)’의 색채감과 한국인의 정체성이 담긴 의상을 요청했고, 르쥬는 무궁화를 떠올렸다. 무궁화는 우리나라의 국화이자, 대한제국의 대례복을 장식했던 꽃이다.

이에 르쥬는 백의 민족을 상징하는 순백의 드레스를 애니메이션의 주인공인 헌트릭스의 제복을 연상케 하는 실루엣으로 디자인한 후, 대한제국 황실에서 사용한 무궁화와 덩굴 문양 당초문을 사용하여 가슴 앞면과 소매를 장식했다. 이는 한국 전통 금속 공예인 두석장이 직접 제작한 것으로, 무궁화는 영원과 끈기, 사라지지 않는 생명을 상징한다.

Sob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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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와 서울디자인재단이 〈밀라노 디자인위크 2026〉에서 개최한 특별전 〈Seoul Life 2026 Mlian – Heritage Reimaguned, Soban〉은 한국 전통 가구인 소반을 통해 우리나라의 유연한 라이프스타일을 살펴보고, 과거부터 현재까지 시대를 관통하는 디자인 가치를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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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디자인재단

이 전시에 참여한 르쥬는 자연석을 가공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나무 기둥의 받침돌로 사용하는 우리나라 전통 건축 공법인 ‘덤벙주초’에서 영감받아 다리를 비대칭으로 재구성한 소반 ‘IRI-JEORI’를 디자인했다. 다리 구조 하나만 변화를 주었을 뿐인데 매우 모던한 가구가 탄생했다. 어긋나있는 다리의 형태는 르쥬의 대표 작품인 ‘L Jeans’와도 닮았다. 이처럼 르쥬는 균형을 깨서 다시 균형감을 만드는 형태를 추구한다.

Untitl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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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년대 우주시대(Space Age)에서 영감받은 2023 S/S 컬렉션의 테마 ‘Space Le Je’는 몸이라는 입체를 옷이라는 영역으로 가져와 평면화한 르쥬만의 공간적 개념을 뜻한다. 이 컬렉션에서 공개한 아트피스 ‘Untitled’은 선으로 공간을 짓는 러시아의 구성주의 조각가 나움 가보(Naum Gabo)의 미학에서 영감받은 드레스다. 1960년대의 조명 제작 방식을 따라 투명한 아크릴 위에 위치를 철저하게 계산한 수백 개의 실을 엮어 만들었다. 머릿 속의 이미지를 구현하기 위해 처음엔 귀걸이정도의 크기로 시작하여 점차 키워 나가면서 구조적인 부분을 수정했다. 반면, 색에서는 한국적인 면을 담고자 했다. 르쥬는 연두, 분홍 등 일반적으로 한국의 색이라고 떠올릴 수 없는 색을 한국적인 감성을 담아서 표현하고자 하는데, 이 작품에서는 검은색과 연두색을 사용했다.

Z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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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쥬는 한국의 반만 년이라는 긴 역사 속에 숨겨진 감각적이고 아름다운 면모를 전달하고자 한다. 제니의 뮤직비디오 〈ZEN〉에서 선보인 의상은 그러한 철학을 잘 보여주는 예다. 신라 금관에서 모티브를 얻은 의상은 신라시대의 여성 청소년으로만 이루어진 수련단체로서 여성의 리더십을 보여주는 ‘원화(源花)’의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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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니는 첫 솔로 앨범을 통해 한국인으로서의 뿌리에 대한 고민, 여성으로서의 자존감을 이야기했기 때문에 르쥬는 아티스트의 메시지를 최대한 담고자 했고, 그와 어울리는 역사 속 이야기로 원화를 선택, 금관으로서 상징적으로 풀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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