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창열 화가의 집, 평창동 작업실에서 문화공간으로

개관전 〈김창열, 물방울의 흔적〉과 최수연·홍재승 건축가 인터뷰

김창열이 30여 년간 거주하며 작업했던 평창동 자택이 '김창열 화가의 집'으로 5월 28일 개관했다.

김창열 화가의 집, 평창동 작업실에서 문화공간으로
20260618015554 20260618 015554
물방울, 1998, 캔버스, 한지에 아크릴릭 물감, 130×162cm, 종로구 소장 자료 제공 종로구

물방울 화가로 알려진 김창열(1929~2021)은 1970년 파리에 정착해 국제 무대에서 활동하며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1988년에는 서울 평창동에 자택을 짓고 파리와 서울을 오가며 작업을 이어갔다. 프랑스에서는 습도로 인해 종이 반죽이 쉽게 마르지 않았지만, 한국의 풍부한 일조량은 한지 작업을 가능하게 했다. 평창동 작업실은 김창열이 한지를 활용한 작품 세계를 본격적으로 확장한 장소이기도 하다.

20260618015604 20260618 015604
물방울, 1980년대, 한지에 아크릴릭 물감, 40×31cm, 종로구 소장 자료 제공 종로구

김창열 화백이 별세 전까지 30여 년간 가족과 함께 거주하며 창작을 이어온 평창동 자택이 지난 5월 28일 ‘종로구립 김창열 화가의 집’으로 문을 열었다. 생전 자신의 작업 공간을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싶다는 작가의 뜻에 따라 종로구는 유족과 업무협약을 맺고 자택을 매입했다. 이후 리모델링을 거쳐 공공문화시설로 새롭게 조성했다.

회귀(回歸)의 공간

20260618015634 20260618 015634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설계를 맡은 플랫폼 건축사사무소는 단순한 보존이나 복원을 넘어, 이 집에 축적된 시간과 기억의 층위를 오늘의 건축 언어로 다시 읽어내는 데 집중했다. 공간의 중심 개념은 김창열의 대표 연작 ‘회귀’에서 가져왔다. 기존 ㄷ자 구조를 재해석해 중심을 비워낸 ‘回’ 자 형태의 공간 질서를 만들고, 비워진 중정을 중심으로 내부와 외부, 빛과 그림자가 순환하도록 계획했다.

20260618015648 20260618 015648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빛은 이 건축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지하 작업실은 천창과 고측창을 통해 절제된 자연광을 받아들이며 침묵과 사유의 분위기를 만든다. 새롭게 재구성된 지상 2층은 빛이 흐르고 확장되는 구조로 계획됐다. 화강석, 노출 콘크리트, 종석 마감 위로 드리워지는 빛의 변화는 공간 전체를 하나의 화폭처럼 드러낸다.

김창열, 물방울의 흔적

20260618015956 20260618 015956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김창열 화가의 집 개관과 함께 5월 29일부터 8월 23일까지 개관전 〈김창열, 물방울의 흔적〉이 열린다. 이번 전시는 평창동 자택의 장소성에 주목해 작품을 선정했다. 특히 이 작업실에서 탄생한 한지와 종이 작업을 집중 조명한다. 회화 19점, 판화 4점, 드로잉 1점 등 총 24점으로 구성되며,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작품 세계의 변화를 살펴볼 수 있다.

20260618020008 20260618 020008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공간의 첫 진입은 지상 2층에서 시작된다. 기존 주택은 경사지에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도로보다 약 1.5m 낮은 위치에 자리했다. 리모델링 과정에서 담장을 허물고 땅을 메워 외부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마당을 조성했으며, 건물 높이도 약 1.5m 낮췄다.

20260618020145 20260618 020145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마당을 지나 내부로 들어서면 지상 1층 기획전시실과 아카이브실로 동선이 이어진다. 이곳에서는 1970년대부터 이어진 김창열의 재료 실험과 1980년대 중반 이후 전개된 ‘회귀’ 연작을 만나볼 수 있다. 당시 김창열은 젯소를 칠하지 않은 캔버스를 사용하는 한편 종이, 흑연, 모래, 신문지, 나무 등 다양한 재료를 활용하며 지지체에 대한 실험을 이어갔다. 이후 화면에 천자문을 도입한 ‘회귀’ 연작은 어린 시절 한자를 익히던 기억과 동양 문화로의 회귀를 상징한다.

20260618020212 20260618 020212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20260618020218 20260618 020218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1999년 제작한 판화 연작 ‘눈(La Neige)’도 함께 소개된다. 물방울 형태를 음각한 판 위에 적신 한지를 올려 천천히 떠내는 방식으로 제작한 작품이다. 종이의 질감이 만들어내는 화면은 실제 눈이 소복이 내려앉은 풍경을 연상시킨다. 이 시리즈는 평창동 작업실에서만 제작됐다. 대표 연작 ‘물방울’과 ‘회귀’의 미완성 밑작업도 함께 공개된다.

20260618020248 20260618 020248
자료 제공 종로구

지하 1·2층 작업실은 김창열이 30여 년간 작업을 이어온 공간이다. 공간은 가구와 집기, 작업 흔적을 화가의 마지막 손길이 닿아 있던 모습에 가깝게 복원했다. 작업 구상을 위해 오려둔 물방울 조각과 붓, 물감이 놓인 책상, 대형 작품 작업에 사용하던 긴 이동 의자 등이 그대로 남아 있다.

20260618020259 20260618 020259
자료 제공 종로구

종로구립 김창열 화가의 집은 과거의 작업실을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한 예술가의 삶과 작업, 도시의 시간이 축적된 장소를 공공문화공간으로 전환한 사례다. 설계를 맡은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최수연·홍재승 건축가는 이 작업을 ‘보전·복원·재형성’이라는 세 가지 원칙으로 설명한다. 김창열 화가의 집이 완성되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Interview

최수연·홍재승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대표

20260618021037 20260618 021037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이번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설계의 핵심 원칙은 무엇이었나?

최수연 김창열 화가의 집은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공간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화백의 삶과 작업이 과거의 시간 속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오늘의 관람객과 미래 세대가 새롭게 만날 수 있는 장소가 되기를 바랐다. 설계 핵심은 기존 공간을 단순히 복원하거나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남아 있는 시간의 층위를 현재의 공간 경험으로 이어가는 것이었다. 남겨야 할 흔적은 최대한 존중하고, 새롭게 개입해야 하는 부분은 절제된 방식으로 접근했다.

20260618021106 20260618 021106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사적인 주택에 공공의 기능을 수용하기 위해 ‘보전, 복원, 재형성’이라는 기준을 세웠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적용됐나?

최수연 먼저 이 집이 품은 시간의 층위를 해석하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1988년 준공 이후 여러 차례 변화가 이뤄진 흔적을 살피고, 당시 청사진 도면과 현재 상태를 비교하며 건축의 원형과 변화 과정을 함께 검토했다. 이후 건축적 가치와 작업 공간으로서의 의미, 공공문화공간으로서의 역할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세 가지 키워드를 설정했다.

20260618021132 20260618 021132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20260618021138 20260618 021138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화백의 아틀리에는 가장 중요한 보전의 대상이었다. 단열과 설비, 방수 등 현행 기준을 맞추기 위한 필수적인 조치를 제외하고는 기존 공간의 분위기를 최대한 유지했다. 반면 가족들의 생활 과정에서 변형된 지상 1층 외부 회랑은 한옥의 툇마루 같은 기능을 회복하는 방향으로 복원해 전체 공간의 시퀀스를 다시 구성했다. 재형성은 주로 지상 2층에서 이뤄졌다. 기존 담장을 허물고 땅을 메워 외부에서 바로 진입할 수 있는 마당을 만들었고, 건물 높이를 약 1.5m 낮춰 편안한 인상을 갖도록 했다. 침묵 속에서도 사람을 환대했던 화백의 성품처럼, 이 집의 첫인상 역시 조용하지만 따뜻하기를 바랐다.

20260618021200 20260618 021200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20260618021208 20260618 021208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경사지에 자리한 사적 주택을 공공공간으로 전환하면서 접근성 문제는 어떻게 해결했는지 궁금하다.

최수연 가장 중요한 과제는 보행약자를 위한 접근성이었다. 경사지에 자리한 4개 층 규모의 주택인 데다 내부 복도 폭도 매우 좁아 내부에 경사로나 리프트를 설치할 경우 기존 공간 구조를 크게 훼손할 우려가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건물 외부에 엘리베이터 타워를 독립적으로 설치해 지상 2층부터 지하 1층까지 연결하고, 지하 2층은 뒷마당 경사로를 통해 접근할 수 있도록 했다. 기존 공간 구조를 유지하면서도 공공건축에 필요한 보편적 접근성을 확보하는 방법이었다. 공공건축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외부 엘리베이터와 브리지 역시 구조적 훼손을 최소화하면서 공공성을 확보하기 위한 고민의 결과였다.

20260618021229 20260618 021229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화백의 작품 세계를 직접적인 형상 대신 공간의 언어로 은유했다. 어떤 해석에서 출발했나?

홍재승 “이것은 물방울이 아니다”라는 전제를 세웠다. 우리는 김창열의 물방울을 단순한 시각적 이미지가 아니라 하나의 개념으로 이해하고자 했다. 물방울은 빛과 그림자, 존재와 부재, 사유와 침묵을 담아내는 장치라고 보았다. 제주도립 김창열미술관을 설계할 때부터 이어 온 중심 주제이기도 하다. 이번 프로젝트에서는 그 해석을 화백의 삶과 작업이 공존했던 공간 전체로 확장했다. 물방울을 직접 재현하기보다 빛과 어둠, 비움과 응축의 감각을 통해 그의 세계를 드러내고자 했다. 기존의 ㄷ자 구조는 회랑을 더해 ㅁ자형 공간 질서로 재구성했고, 중정과 회랑을 중심으로 한 ‘회귀’의 동선을 만들었다. 방문객은 여러 겹의 공간 레이어를 통과하며 빛과 그림자가 만들어내는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20260618021250 20260618 021250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공간 곳곳에 화백과의 연결 고리를 심어두었다. 특히 주목할 만한 요소가 있다면?

홍재승 화백이 생전에 사랑했던 형제봉의 풍경이 지붕과 중정의 프레임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오도록 계획했다. 방문객은 이동하는 과정에서 건축과 풍경이 겹쳐지는 장면을 만나게 된다. 출입구 코너에 설치한 레인체인(Rain Chain)은 1970년대 초기 물방울 작품에 대한 오마주다. 비가 올 때 빗물이 사슬을 따라 조용히 흐른다. 이곳이 김창열 화백의 공간임을 직접적이지 않고 절제된 방식으로 드러내고자 했다.

20260618021313 20260618 021313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한편 작가의 지하 작업실은 생전 모습에 가깝게 복원됐다.

홍재승 화백이 숨 쉬던 그 공기 자체를 살려내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남겨진 작품과 물품은 종로구 문화과 학예팀이 아카이빙 했고, 건축적으로는 공간 전체를 3D로 기록하는 작업을 병행했다. 이를 바탕으로 서재와 아틀리에의 가구, 집기, 작업 흔적을 화백의 마지막 손길이 닿아 있던 자리 그대로 되돌릴 수 있었다. 완공 후 가족들이 “아버님이 그대로 계시는 것 같다”고 말씀해 주셨다. 이번 작업의 의미를 가장 잘 보여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기록과 보존, 재설치 과정에 참여한 많은 이들의 세심한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20260618021348 20260618 021348
사진 glimworkers ⓒ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작가의 마지막 손길을 간직한 작업실과 새롭게 쌓여갈 시간이 한 집 안에 공존하게 됐다. 이 공간이 어떤 장소로 남기를 바라나?

최수연 김창열 화가의 집은 화백이 남긴 정신적 유산을 이어가는 장소다.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예술적 영감을 얻고, 다시 찾고 싶은 공간으로 기억해 주었으면 한다. 단지 한 예술가를 기념하는 장소에 머무르지 않고, 앞으로도 그의 철학과 예술 세계가 조용히 이어지는 공간으로 남기를 바란다.

개관전 〈김창열, 물방울의 흔적〉

기간 2026년 5월 29일 – 8월 23일
주소 김창열 화가의 집 (서울시 종로구 평창7길 74)
운영 시간 10:00 – 18:00 (화~일)
주최 종로구
운영 종로문화재단
웹사이트 jfac.or.kr

김창열 화가의 집

설계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최수연, 홍재승 (설계 담당: 조성우)
시공 ㈜심우건설
조경 디자인 스튜디오 이레
전시 스튜디오 럭키즈
경관 조명 루미노
MI·사이니지·개관전 디자인 오오앤피
자료 제공 종로구, ㈜플랫폼 건축사사무소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