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자기의 미학이 담긴 부가티의 로드스터
예술과 기술의 결합, '블랑 에테르넬(Blanc Éternel)'
부가티(Ettore Bugatti)는 자동차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바라보는 철학을 바탕으로, 초호화 하이퍼카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해 왔다. 최근 부가티는 고객 맞춤형 비스포크 프로그램 쉬르 메쥐르(Sur Mesure)와 베를린 왕립 도자기 공방(Königliche Porzellan-Manufaktur Berlin, KPM)과의 협업을 통해 W16 미스트랄(W16 Mistral Roadster)을 도자기의 미학으로 재해석한 '블랑 에테르넬'을 공개했다.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태어난 에토레 부가티(Ettore Bugatti)는 1909년 프랑스 알자스 지방의 몰샤임(Molsheim)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자동차 브랜드 ‘부가티(Bugatti)’를 설립했다. 이후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부가티는 초호화 하이퍼카 브랜드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하며, 압도적인 성능과 희소성, 예술적인 디자인을 대표하는 존재로 군림해 왔다. 자동차를 제작하는 공장을 예술가의 작업 공간을 뜻하는 ‘아틀리에(Atelier)’라고 부르는 것만 보아도, 자동차를 하나의 작품으로 바라보는 이들의 철학과 자부심을 엿볼 수 있다.
부가티의 아틀리에는 부품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때까지 장인의 손으로 일일이 다듬어 자동차를 완성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장인 정신에 첨단 기술을 접목하며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제조 방식을 구축하고 있다. 2016년부터 사실적 3D 애니메이션과 가상 개발 기술을 적극 도입했고, 이를 기반으로 디자인팀은 창작 모델 제작 과정의 90% 이상을 디지털화했다. 최근에 공개한 투르비용(Tourbillon)에는 금속 3D 프린팅 기술을 적용해 서스펜션 무게를 기존 모델보다 45% 줄이는 등, 성능 개선에 새로운 기술을 적극 활용하고 있다.

언제나 최고의 자동차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부가티에게 디지털 기술은 성능과 디자인을 극대화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그럼에도 장인 정신과 아날로그 감성을 고수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브랜드 철학은 변함이 없다. 이러한 가치 덕분에 부가티는 수많은 자동차 브랜드가 경쟁하는 시장 속에서도 독보적인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브랜드가 지닌 희소성과 예술성은 그 자체로 높은 가치를 인정받고 있으며, 부가티의 고객층 역시 일반적인 스포츠카 소비자가 아닌 세계 최상위 부유층과 컬렉터가 중심이 되고 있다.

이러한 부가티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로드스터 중 하나로 꼽히는 W16 미스트랄(W16 Mistral Roadster)을 도자기의 미학으로 재해석해 화제를 모으고 있다. 부가티의 고객 맞춤형 비스포크 프로그램인 쉬르 메쥐르(Sur Mesure)와 수백 년 역사를 자랑하는 베를린 왕립 도자기 공방(Königliche Porzellan-Manufaktur Berlin, KPM)과의 협업으로 탄생한 이 작품은 ‘블랑 에테르넬(Blanc Éternel)’이라는 이름으로 공개되며 전 세계 자동차 애호가와 예술계의 이목을 동시에 집중시키고 있다.
도자기의 미학을 입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로드스터
이 독특한 작품은 섬세한 수작업과 더불어 디지털 디자인 기술이 조화를 이룬 결과다. 블랑 에테르넬 제작에는 과거처럼 점토 모형을 만들어 형태를 다듬는 방식이 더 이상 필요하지 않았다. 대신 차량의 형상은 넙스(NURBS)라 불리는 컴퓨터 그래픽 기법으로 설계됐다. ‘Non-Uniform Rational B-Spline(비균일 유리 B-스플라인)’의 약자인 NURBS는 곡선과 표면을 수학적 함수로 정의해 부드럽고 정밀한 3차원 곡면을 구현하는 기술이다. 이를 통해 W16 미스트랄 특유의 유려한 볼륨과 조형미를 디지털 환경에서도 정교하게 구현할 수 있었다.

순백의 도장으로 완성된 차체는 ‘블랑 에테르넬’이라는 이름이 뜻하는 ‘영원한 흰색’처럼, 도자기의 변치 않는 아름다움과 부가티 역사에서 W16 엔진이 지닌 상징성을 함께 담아낸다. 부가티를 대표하는 W16 엔진과 이를 세상에 각인시킨 베이론(Veyron), 그리고 W16의 마지막 양산 모델인 W16 미스트랄까지, 부가티는 블랑 에테르넬을 통해 하나의 시대를 마무리한 W16의 유산과 브랜드가 추구해 온 디자인 철학, 그리고 장인 정신에 경의를 표하고 있다.

여기에 순백의 차체를 따라 흐르는 섬세한 검은 선은 차량의 조형미를 더욱 돋보이게 한다. 절제된 흑백의 대비는 새롭게 다듬어진 말굽 모양 그릴과 조각 같은 전면부, 유려하게 솟아오르는 C라인, 역동적인 공기 흡입구, 그리고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X자형 테일라이트까지 W16 미스트랄의 핵심 디자인 요소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이 선들은 부드러운 차체 아래 숨겨진 기하학적 구조, 즉 디자인 과정에서 사용된 디지털 와이어프레임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며, 디지털 모델링이 만들어낸 정교한 설계 언어를 자연스럽게 보여준다.

차량의 설계는 디지털 기술이 담당했지만, 마지막 완성은 결국 사람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차체를 수놓은 검은 선은 부가티 장인들이 하나하나 직접 마스킹하고 채색한 결과물이다. 자동차의 형태를 정확히 이해한 장인의 감각과 오랜 시간 축적된 경험, 그리고 섬세한 인내가 더해지며 디지털 설계는 비로소 현실의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었다.


실제 도자기로 자동차 부품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고도의 기술과 경험이 요구된다. 도자기는 가마에서 소성하는 과정에서 약 17% 수축하기 때문에, 설계 단계에서 이를 정확하게 계산해야 한다. 여기에 소성 이후 정밀한 마감 작업까지 더해져야 모든 부품이 차량의 지정된 위치에 오차 없이 맞아떨어진다. 쉽지 않은 작업이지만, 수백 년의 전통을 이어온 KPM의 노하우가 이를 가능하게 했다.

연료 주입구 캡, 엔진 커버 장식, EB 배지 및 여러 부품이 도자기로 만들어졌으며, 각 요소에는 KPM의 왕실 홀 마크가 새겨져 있다. 또한 차량 내부의 센터 콘솔, 스피커 그릴, 기어 시프터, 창문 스위치, 도어 트림 등 손이 닿는 부분에도 도자기가 적용되었으며, 이는 검은색 디테일로 포인트를 준 흰색 가죽 시트와 대비를 이루며 차량 안팎에 일관된 예술성을 완성했다.
KPM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토마스 벤젤(Thomas Wenzel)은 “블랑 에테르넬의 차체 악센트와 장식 요소는 최고의 정성과 정밀함을 바탕으로 세심하게 제작되었습니다.”라며 “이처럼 섬세한 소재를 고성능 차량에 적용할 수 있도록 완성한 것은 장인 정신이 이루어낸 놀라운 성취입니다.”라고 설명했다.

이 프로젝트를 기념하기 위해 KPM과 부가티는 한정판 ‘블랑 에테르넬’ 도자기 컬렉션을 선보인다. 투 드라이브 컵(To-Drive Cup)과 KPM의 대표 제품인 에비에이터 컵(Aviator Cup)으로 구성된 이 컬렉션은 1,000개 한정 수작업 제품으로, 각 제품에는 두 브랜드의 공통된 가치인 정밀함, 순수함, 그리고 변치 않는 디자인에 대한 추구가 담겨 있다.
15년 전부터 이어진 협업의 역사
W16 시대의 마지막을 기념하는 블랑 에테르넬을 탄생시킨 부가티와 KPM의 파트너십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이들은 15년 전인 2011년에도 베이론 그랜드 스포츠(Veyron Grand Sport)를 도자기 디테일로 재해석한 ‘로르 블랑(L’Or Blanc)’을 선보이며 자동차와 도자기의 경계를 허문 바 있다. 차체와 실내에 최고급 도자기를 적용한 세계 최초의 자동차 중 하나로 주목받은 이 작품의 개발에 부가티 디자인 디렉터인 프랑크 헤일(Frank Heyl)이 직접 참여했다. 그는 차체 곳곳을 세심하게 다듬었으며, 푸른 곡선을 손으로 직접 그려 넣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로르 블랑의 디자인은 이탈리아 디자이너 엔조 마리(Enzo Mari)가 KPM을 위해 디자인한 화병에서 영감을 얻었다. 마리는 1993년부터 1996년까지 당시 KPM의 수석 디자이너였던 토마스 벤젤과 긴밀히 협업하여 강렬한 개성을 담은 오브제들을 선보였고, 그의 작품들은 지금까지도 브랜드를 대표하는 클래식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흰색 도자기 위를 유려한 푸른 선이 감싸는 화병은 훗날 부가티와 KPM의 새로운 프로젝트를 이끄는 출발점이 됐다. 단순하면서도 힘 있는 붓놀림은 부가티 디자이너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고, 이를 하이퍼 스포츠카의 조각 같은 차체 위에 구현할 방법을 찾는 과정으로 이어졌다.

이에 대한 해답은 자동차 디자이너와 품질 전문가들이 차량 표면을 검사할 때 사용하는 ‘빛줄기’에서 찾았다. 차체 표면에 반사되는 빛은 모든 곡선은 물론 육안으로 쉽게 확인하기 어려운 미세한 굴곡까지 드러낸다. 이러한 빛의 흐름을 푸른 선으로 형상화하여 완성된 로르 블랑에서 차량의 아름다운 실루엣을 느낄 수 있다. 차체를 따라 유려하게 이어지는 선들은 하나의 붓질처럼 차량의 조형미를 드러내며, 자동차와 도자기가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완성될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부가티가 도자기에 매료된 이유?
최고의 성능과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브랜드가 도자기를 선택한 이유는 무엇일까. 자동차와 도자기는 서로 다른 분야처럼 보이지만, 최고의 결과물을 만들기 위해서는 장인의 섬세한 손길과 정밀한 기술이 필요하다는 공통점을 지닌다. 부가티는 이러한 접점을 발견했고, 자동차를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확장하는 가장 적합한 소재가 도자기라고 판단했다. 무엇보다도 도자기는 자동차의 유려한 곡면과 장인의 손길을 가장 아름답게 담아낼 수 있는 매체였다. 인간의 손으로 빚어내는 기술과 예술의 만남을 도드라지게 하기 위해 상상치도 못한 조합에 도전했던 부가티는 자동차 역사에 길이 남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이 시도는 찬사를 받았던 모델의 기원을 존중하는 동시에 디자인 개발 과정이 어떻게 진화했는지를 보여주기 위한 작업이기도 하다. 로르 블랑과 블랑 에테르넬의 모습에서 이러한 변화를 느낄 수 있다. 로르 블랑이 장인의 손길과 아날로그 감성을 기념한 작품이었다면, 블랑 에테르넬은 여기에 디지털 기술까지 품으며 새로운 시대의 부가티를 표현한 작품이다.

부가티와 KPM의 협업은 단지 자동차에 도자기를 접목한 것이 아니라, 아날로그와 디지털 기술이 공존하는 오늘날에도 하이퍼카의 기준을 제시하는 브랜드의 철학을 하나의 예술 작품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변하지 않는 장인 정신 위에 시대의 기술을 더하는 시도가 바로 로르 블랑과 블랑 에테르넬을 관통하는 부가티의 디자인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글 박민정 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