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인스파이어드 100+α ③] 영감을 구현한 제품들
월간 〈디자인〉 Vol.578 | Special Feature
영감은 머릿속에서 끝나지 않는다. 아이디어는 수많은 고민과 실험을 거쳐 하나의 제품이 되고, 그렇게 세상에 나온 제품은 다시 누군가의 영감이 된다. 새로운 형태와 기술, 그리고 쓰임의 가능성을 보여준 제품들. 그 안에 담긴 영감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니체어 X(Nychair X)
니체어 X는 앉는 행위를 깊고 편안한 경험으로 바꿀 수 있음을 보여 주는 일본 디자인의 명작이다. 금속 프레임과 천으로 이루어진 이 의자는 불필요한 요소를 덜어낸 최소 구조로 놀라울 만큼 정확한 비례와 지지감을 구현한다. 디자이너 니이 다케시의 절제된 사고와, 북유럽 디자인의 권위자 시마자키 마코토가 공명했던 덴마크 디자인의 합리성이 맞닿으며 일본식 절제미와 북유럽의 이성이 의자 안에서 조화를 이룬다. 무엇보다 니체어 X는 작고 가벼운 의자 안에 생활을 대하는 섬세한 태도와 국제적 디자인 감각을 함께 응축하며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감각의 기준이 되었다.
Interviewee 시마자키 마코토_ 일본의 디자인 평론가이자 가구 디자이너. 덴마크 왕립 미술 아카데미에서 가구 디자인을 연구했다. 1960년 니이 다케시를 처음 만난 뒤 평생 그의 작업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기록했다. 이번 답변은 시마자키가 2007년 고인이 된 니이 다케시를 대신해 생전 그의 디자인 철학과 생각을 바탕으로 작성했다.
![[더 인스파이어드 100+α ③] 영감을 구현한 제품들 1 20260729095948 088](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7/29185955/20260729095948-088-832x1109.jpg)
당신이 일하고 생각하는 데에서 영감은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나?
니이 다케시에게 영감은 1960년대 일본에서 ‘자전거처럼 부담 없이 쓰이고, 카레라이스처럼 많은 사람에게 사랑받는 의자를 만들고 싶다’는 바람을 현실로 만드는 원동력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 바람이 있었기에 불필요한 요소를 철저히 덜어내고, 튼튼하면서도 누구나 부담 없이 구입 가능한 접이식 의자라는 해답에 이를 수 있었다. 그 결과 특별한 존재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의자가 탄생했다.
누군가 당신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영감은 어디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나?
단순한 형태와 군더더기를 덜어낸 기능미, 와비사비를 떠올리게 하는 고요한 존재감에서 영감을 얻는 것이 아닐까. 가볍고 접을 수 있어 ‘편안함 자체’를 들고 다닐 수 있다는 점 또한 큰 매력이다. 어디에 두어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고, 앉는 순간 그곳이 자신의 자리가 된다. 이러한 ‘이동의 편안함’이 많은 사람의 감각에 깊이 작용하는 것 같다. 그 바탕에는 니이 다케시의 성장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길러진 미의식이 있었을 것이다. 그는 골동품상인 할아버지에게서 사물의 가치를 알아보는 안목을, 검도용품점을 운영하던 아버지에게서 실용적인 기술과 지혜를 배웠을 것이다. 예를 들어 접었을 때 팔걸이를 고정하는 검은 끈은 검도 장비의 손 보호대에 사용하는 매듭 구조를 그대로 응용한 것이다. 이처럼 작은 디테일에도 그의 성장 배경이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작업하는 동안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기준이나 감각이 있다면?
니이 다케시는 가능한 한 적은 부품으로, 가능한 한 단순한 구조로, 가능한 한 튼튼하게, 가능한 한 적은 운송비로, 가능한 한 합리적인 가격을, 가능한 한 편안한 착석감을 구현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이처럼 ‘가능한 한’이라는 원칙을 거듭 추구한 태도가 최소한의 부품으로 최고의 착석감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단순한 효율이 아니라 목적에 끝까지 충실하려는 자세였다고 생각한다.
![[더 인스파이어드 100+α ③] 영감을 구현한 제품들 2 20260729100015 180620 126](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7/29190019/20260729100015-180620_126-832x555.jpg)
시간이 흘러도 당신의 작업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니이 다케시가 일관되게 중요하게 여긴 것은 ‘디자인의 좋고 나쁨은 결국 세상이 판단하는 것’이라는 믿음이었다. 디자이너 자신의 주장을 앞세우기보다 소비자들이 실제로 사용하면서 그 가치가 계속 검증되어야 한다는 태도였다.
감각이나 판단이 흐려졌다고 생각될 때, 되돌리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나 기준이 있나?
니이 다케시가 언제나 되돌아간 기준은 ‘이것이 정말 삶에 필요한가’라는 질문이었다. 외양의 아름다움을 넘어, 그 의자가 사람들의 삶과 사회 속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쉽게 펼칠 수 있고, 안심하고 몸을 맡길 수 있는 친숙한 존재. 이와 같은 생활자의 시선이야말로 판단이 흔들릴 때마다 제자리를 찾게 해준 기준이었으며, 영감의 원천이기도 했다고 생각한다.
반대로, 당신의 감각과 영감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필연성 없는 요소가 하나둘 쌓여 가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능과 구조에서 분명한 이유가 사라지고 형태나 유행에 휩쓸리기 시작하면 판단의 기준도 점차 흐려진다. 또한 정보나 타인의 평가에 지나치게 흔들리는 것 역시 니이 다케시의 영감을 흐리게 만드는 요인이었을 것이다.
니이 다케시 Inspired by
페테르 비트와 올라 묄고르닐센이 디자인한 AX 체어. 1955년 무렵 이 의자를 처음 만났을 때 니이 다케시는 그 아름다움과 합리성에 깊이 매료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가죽과 목재를 연결하는 방식에 다소 무리가 있다고 보고, ‘더 나은 구조가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품게 된 계기가 됐던 것 같다. 또 고액의 수입 가구에 대해서는 ‘접이식 구조라면 포장과 운송 비용을 줄일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이 경험이 훗날 끊임없이 접이식 의자를 탐구하는 출발점이 되었던 것으로 추측한다.
나이키 프레스토 디지털 브레이슬릿
나이키 프레스토 디지털 브레이슬릿은 손목 위의 디지털 기기를 단순한 스포츠 액세서리가 아니라, 나이키의 디자인 언어를 확장한 하나의 조형으로 재해석한 작업이다. 유연하게 감기는 실루엣과 과감하게 비워낸 구조는 기존 나이키가 보여 주던 시각적 문법을 넘어, 테크놀로지가 보다 가볍고 유기적인 형태로 존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브랜드 안에 잠재해 있던 또 다른 감각의 가능성을 조용히 드러낸 이 작업은 지금 다시 보아도 오래도록 남는 영감으로 읽힌다.
Interviewee 스콧 윌슨_ 미국의 산업 디자이너이자 디자인 스튜디오 MNML의 설립자. IDEO와 모토로라를 거쳐 나이키의 글로벌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를 지냈으며, 나이키 프레스토 디지털 브레이슬릿과 엑스박스 키넥트 등을 디자인했다. 웨어러블과 디지털 제품을 아우르며 기술과 일상의 경험을 연결하는 디자인을 선보였다.
![[더 인스파이어드 100+α ③] 영감을 구현한 제품들 3 20260729100342 001 Presto Digital Bracelet CMYK300dpi 9x12](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7/29190348/20260729100342-001_Presto-Digital-Bracelet_CMYK300dpi_9x12-832x1109.jpg)
당신이 일하고 생각하는 데에서 영감은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나?
영감은 제품이 ‘원래 그래야 한다’고 여기는 방식을 의심할 용기를 주었다. 가장 흥미로운 가능성은 사물을 당연하게 정의해 온 기준을 내려놓을 때 나타난다. 나이키 프레스토 디지털 브레이슬릿은 그런 사고에서 출발했다. 프레스토 운동화처럼 손목에 가볍게 차는 시계를 상상했고, 스트랩이 곧 케이스이자 구조가 되도록 설계했다. 영감은 사물의 오래된 전제를 걷어냈을 때, 그것이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지를 보게 해준다.
누군가 당신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영감은 어디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나?
산업 디자인은 기존 제품을 보기 좋게 만드는 일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디자인은 제품군을 다시 정의하고, 행동을 바꾸며, 기술을 더 인간적이게 만들 수 있다. 디자이너의 가치는 스타일링이 아니라 호기심과 통찰, 문제 해결 능력, 그리고 직접 만들어내는 행동에 있다. 사람들은 시장이 이미 알고 있는 답을 반복하는 대신, 만들어지고 나면 ‘왜 이제야 나왔을까’ 싶을 만큼 자연스러운 것을 만들려는 태도에서 영감을 받는 것 같다.
작업하는 동안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기준이나 감각이 있다면?
처음 떠올린 아이디어의 명료함을 지키려 한다. 프로젝트가 진행될수록 기능과 디테일, 수많은 타협이 더해지고 결국 핵심 개념을 흐리게 만들기도 한다. 프레스토에서 가장 중요한 생각은 시계 전체가 손목을 감싸는 하나의 연속된 제스처처럼 느껴지는 것이었다. 모든 요소는 그 단순함을 뒷받침해야 하고, 평범한 손목시계처럼 느껴지는 순간 프로젝트의 본질은 사라진다. 나는 제품이 설명보다 먼저 직관적으로 이해되는 순간을 끝까지 지키려 한다. 디자인은 감성과 이성이 균형을 이룰 때 가장 좋은 결과에 도달한다고 믿는다.
![[더 인스파이어드 100+α ③] 영감을 구현한 제품들 4 20260729100402 Presto Package](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7/29190406/20260729100402-Presto-Package-832x936.jpg)
시간이 흘러도 당신의 작업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아이디어와 사용자 사이의 거리를 최대한 줄이려는 태도다. 나는 익숙함과 새로움이 함께 담긴 사물에 관심이 많다. 아무리 혁신적인 제품이라도 어딘가 익숙한 단서가 있어야 한다. 또 하나는 모든 요소가 하나의 중심 아이디어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믿음이다. 제품을 둘러싼 모든 경험은 마지막에 덧붙이는 게 아니라 처음부터 하나의 아이디어로 통합돼야 한다.
감각이나 판단이 흐려졌다고 생각될 때, 되돌리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나 기준이 있나?
언제나 디자인하는 물건의 존재 이유와 사용자 경험으로 돌아간다. 거기에 판단 기준을 두면 대부분 답은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나는 스스로에게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이것은 무엇을 위한 것인가?’ ‘가장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가?’ ‘무엇을 더 덜어낼 수 있는가?’ 또 하나의 기준은 직접 만드는 과정이다. 스케치하고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실제 크기로 구현해 보는 일은 어떤 레퍼런스보다 빠르게 판단을 되찾게 해준다.
반대로, 당신의 감각과 영감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많은 레퍼런스와 합의, 이미 시장에서 성공한 것에 의존하는 태도다. 모든 이해관계자를 만족시키려는 순간, 처음 아이디어의 긴장감과 고유함은 사라진다. 디자인이 기존의 기대를 관리하는 일이 되는 순간 영감은 약해진다. 상업적 성공을 거둔 프로젝트 상당수는 조직이 개입하기 전, 서로를 신뢰하는 작은 팀이 하나의 아이디어를 믿고 밀어붙였기에 가능했다.
스콧 윌슨 Inspired by
나이키는 디자인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았다. 최고의 나이키 제품은 스타일이나 시장의 관습이 아니라 운동선수와 움직임, 아직 해결되지 않은 필요에서 출발했다. 그 문화는 디자이너들이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도록 장려했고, 나는 디자인이 기존 제품을 낫게 만드는 걸 넘어, 제품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을 새롭게 제안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또 하나는 자연이다. 자연에서는 무엇도 고립되어 존재하지 않고, 하나의 결과는 다른 과정의 출발점이 된다. 자연은 수억 년의 실험과 적응, 진화가 축적된 가장 오래된 연구소이며, 그래서 나는 가장 뛰어난 디자인 역시 독립된 물건이 아니라 서로 연결된 더 큰 시스템의 일부여야 한다고 믿는다.
오루 카약(Oru Kayak)
오루 카약은 오리가미 구조의 유연함에 감각적인 소재와 그래픽 언어를 결합해 아웃도어 기어의 새로운 가능성을 연 브랜드다. 빛을 투과하는 독특한 질감의 소재 위로 선과 면이 정교하게 나뉘며 만드는 감각적인 시각적 대비는 자연으로 향하는 여정을 단순하고 아름다운 행위로 바꾼다. 이동의 한계를 독창적인 구조와 그래픽 미학으로 극복하며 일상의 경계를 다시 보게 만드는 오루 카약은 자연과 인간이 마주하는 방식을 감각적으로 재정의한다.
Interviewee 앤톤 윌리스_ 오루 카약의 창업자이자 디자이너. 건축가이자 제품 디자이너로 활동하던 그는 샌프란시스코의 작은 아파트로 이사하며 카약을 보관할 수 없게 된 경험을 계기로 접이식 카약을 구상했다. 일본 오리가미와 북극권 전통 카약에서 영감을 받아 종이 모델과 프로토타입을 거듭 시도한 끝에 도시 생활자도 보관이 용이하고 옮길 수 있는 오루 카약을 완성했다.
![[더 인스파이어드 100+α ③] 영감을 구현한 제품들 5 20260729100757 001 Copy of Beach Sport Cayen Top Box View](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7/29190800/20260729100757-001_Copy-of-Beach-Sport_Cayen_Top_Box-View-832x832.jpg)
당신이 일하고 생각하는 데에서 영감은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나?
내게 영감은 모든 것이다. 영감을 느끼지 못하는 프로젝트는 좀처럼 잘하지 못하지만, 한번 흥미를 느끼면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파고든다. 덕분에 의뢰를 받아 작업하는 전형적인 디자이너의 길과는 조금 멀어졌지만, 대신 훨씬 더 실험적이고 가능성이 낮아 보이는 일들을 현실로 만들 수 있었다. 오루 카약의 첫 번째 디자인 역시 건축 드래프터로 일하던 시절, 퇴근 후와 주말을 모두 쏟아부으며 4년에 걸쳐 완성했다. 집착에 가까운 영감이 아니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누군가 당신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영감은 어디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나?
두 가지에서 비롯되었으면 좋겠다. 첫 번째는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자연을 더 쉽게 경험할 수 있도록 만들고자 하는 나의 디자인 철학이다. 이는 여러 프로젝트를 관통하는 중요한 목표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서로 전혀 다른 디자인의 원천을 하나로 결합하는 방식이다. 오루 카약은 북극 원주민의 카약과 일본 종이접기 모두에서 영감을 얻었다. 종이의 가벼움과 투명함, 이누이트 카약의 유려한 형태를 현대의 소재와 기술로 구현하고자 했다.
![[더 인스파이어드 100+α ③] 영감을 구현한 제품들 6 20260729100824 002 Copy of Bay 2025 update Top View](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7/29190828/20260729100824-002_Copy-of-Bay-2025-update-Top-View--832x832.jpg)
작업하는 동안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기준이나 감각이 있다면?
놀라움과 즐거움이다. 디자인은 단순히 제대로 작동하는 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사용자에게 크고 작은 순간마다 기쁨을 주어야 한다. 초기 카약 프로토타입 가운데 새로운 종이접기 구조를 적용한 모델이 있었다. 어느 날 해변에서 그것을 접고 있는데, 지나가던 사람이 카약이 여행 가방으로 변하는 순간 놀라 탄성을 내질렀다. 그 표정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디자인을 마무리할 때마다 나는 늘 스스로에게 묻는다. 이 제품도 누군가에게 같은 놀라움을 줄 수 있을까?
시간이 흘러도 당신의 작업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경이로움과 탐험, 그리고 새로운 곳을 향한 동경. 내가 만드는 것은 세상을 더 복잡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다. 오히려 세상의 놀라움과 낯섦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는 데 방해가 되는 장애물을 걷어내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감각이나 판단이 흐려졌다고 생각될 때, 되돌리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나 기준이 있나?
자연과 움직임, 그리고 몸을 쓰는 일이다. 엄밀히 말하면 영감이라기보다 하나의 방법에 가깝다. 막막할 때 영감이 찾아오기만 기다리다 보면 오랫동안 제자리걸음을 하게 된다. 그럴 때는 머리보다 손발을 먼저 움직이는 편이 낫다. 그렇게 하면 감각이 다시 살아나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받아들일 준비도 자연스럽게 갖춰진다.
앤톤 윌리스 Inspired by
나는 사물보다 환경과 공간에서 더 많은 영감을 얻는다. 깊이와 복잡성을 지닌 장소에 둘러싸여 있을 때만큼 생각이 맑아지고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오르는 순간은 없다. 나는 숲으로 둘러싸인 도시 외곽에서 자랐고 건축을 공부했다. 어쩌면 제품 디자이너가 된 것은 우연이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건축처럼 큰 스케일에서 출발한 영감이 렌즈를 통과하듯 제품이라는 작은 스케일로 응축된 것일 수도 있다. 또 페터 춤토르의 브루더 클라우스 필드 채플과 엘레멘탈의 카사 오초케브라다스를 특히 좋아한다. 두 작품 모두 거칠고 기념비적이면서도 어딘가 낯설고 불안정한 분위기를 품고 있다. 목적지를 알지 못한 채 앞으로 나아가는 태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이 작품들을 좋아한다.
혼다 아시모(Honda Asimo)
혼다 아시모는 인간의 생활 공간에 자연스럽게 스며들도록 정교하게 계산한 비례와 절제된 조형으로 완성한 로봇 디자인의 마스터피스다. 위협감을 주지 않는 130cm의 아담한 신장, 무겁고 투박한 배터리 팩을 우주비행사의 가방처럼 보이도록 설계한 뒷모습은 엔지니어링의 물리적 한계를 위트 있는 시각적 장치로 전환한다. 얼굴은 날카로운 센서나 카메라 렌즈를 드러내는 대신 둥근 바이저visor 뒤로 시선을 감춰 로봇의 응시로부터 올 수 있는 위압감을 덜어냈다. 기술의 복잡성을 하나의 순수한 미래적 형상으로 시각화한 것이다. 이러한 디자인 철학은 혼다가 선보인 한 편의 광고에서도 잘 드러난다. 광고 속 아시모는 깊은 밤 불 꺼진 박물관을 홀로 거닐며 인류의 유산을 호기심 어린 아이처럼 바라본다. 그 모습은 차가운 기계성과 압도적인 효율성만을 앞세우는 최근의 인공지능 로봇과는 다른 결의 따뜻함을 보여 준다. 아시모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기술이 도달해야 할 가장 인간적인 휴머노이드 디자인의 기준으로 남아 있다.
Interviewee 고시이시 다케시_ 혼다 R&D 디자이너. 휴머노이드 로봇 아시모의 스타일링 디자인 개발에 초기 단계부터 참여했으며, 이후 뉴 아시모 디자인으로 첨단 기능과 인간적 친화성이 공존하는 로봇 디자인의 방향을 구체화했다. 그 밖에도 공항 안내 로봇, 레이싱 휠체어 등 다양한 프로젝트로 사람과 기술이 자연스럽게 관계 맺는 방식을 탐구해 왔다.
![[더 인스파이어드 100+α ③] 영감을 구현한 제품들 7 20260729100912 20260729 100912](https://design-plus.storage.googleapis.com/wp-content/uploads/2026/07/29190915/20260729100912-20260729_100912-832x624.jpg)
당신이 일하고 생각하는 데에서 영감은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나?
개인적 에피소드로 설명하고 싶다. 어린 시절 영화관에서 본 〈스타워즈〉는 내 사고의 원점 가운데 하나다. 다스 베이더와 격투 끝에 루크가 한쪽 팔을 잃는 장면은 어린 내게 큰 충격이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에서 의료 로봇의 치료로 새로운 팔을 얻는 모습을 보며, 기술은 단순히 신체 기능을 회복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인간의 능력 자체를 확장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영화 속 이야기다. 하지만 그때부터 인간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기술이나 의료에 기여하는 제품에 자연스럽게 관심을 갖게 됐다. 당시 기억의 조각들은 분명 지금의 내 일에 큰 도움이 되고 있다. 나는 기술 자체보다, 기술이 사람의 감정과 의미로 바뀌는 순간 비로소 디자인의 역할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군가 당신의 작업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할 때, 그 영감은 어디서 비롯됐다고 생각하나?
나는 그 원천이 창작자가 완성한 결과물 자체가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속에 남은 ‘상상의 여백’에 있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내가 디자인한 아시모는 얼굴을 검은 스모크 실드로 덮어 매우 단순한 인상을 갖도록 설계했다. 실드 아래에는 기존 로봇처럼 카메라나 모터 같은 기계장치를 그대로 드러내지 않고, 그것을 감싸는 ‘얼굴’에 해당하는 부품을 배치했다. 다만 외부에서는 그 형태가 희미하게만 보이도록 조정했다. 이렇게 한 이유는 로봇이 특정 표정이나 감정을 드러내기보다 로봇을 대면하는 사람이 스스로 로봇의 표정과 감정을 자유롭게 상상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사람이 단순한 기계에서도 마음을 느끼고 자신의 감정을 투영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것, 나는 바로 그 여백이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는 원천이라고 생각한다.
작업하는 동안 끝까지 지키고자 하는 기준이나 감각이 있다면?
아시모의 디자인 철학이기도 한 ‘첨단성과 친화성의 조화’다. 휴머노이드 로봇은 사람 형태를 하고 있지만, 내부에는 복잡한 구조를 갖춘 최첨단 기계가 들어 있다. 외형이 지나치게 기계적이고 날카로우면 인간의 생활 공간에서 이질감을 준다. 반대로 지나치게 친근함을 강조해 봉제 인형처럼 만들어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사람과 너무 가깝지도, 너무 멀지도 않은 적절한 거리감, 다시 말해 상대를 배려하는 ‘기분 좋은 거리감’을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사람들이 심리적 편안함을 느끼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친화성으로 이어진다. 물론 그 기준은 시대 변화에 따라 계속 달라진다. 한번은 디자인 검증 과정 중 아시모의 목업에서 머리 부분을 떼어낸 적이 있다. 그 순간 현장에서 “꺅!” 하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생명이 없는 물건인데도 사람들은 그것에서 생명이나 영혼 같은 존재를 느낀 것이다. 그 경험을 통해 영혼이 있다고 느끼는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은 결국 보는 사람의 감성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수많은 부품이 함께 움직이는 상황에서도 형태가 무너지지 않는 동적인 조형이 만들어내는 기능미, 그리고 파트너로서 느껴지는 친근함을 높은 수준에서 조화시켜 사람과 따뜻한 관계를 만드는 것, 이 기준만큼은 이후의 디자인 작업에서도 변함없이 지켜오고 있다.
시간이 흘러도 당신의 작업에서 변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혼다 창업자 혼다 소이치로가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던 ‘고객’과 ‘꿈’이라는 철학이다. 나는 그가 세상을 떠난 뒤 입사했기 때문에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가끔 ‘만약 그가 아시모를 봤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하고 상상한다. 아마도 ‘정말 고객을 가장 먼저 생각했는가?’, 그리고 ‘꿈을 현실로 만들었는가?’라고 물었을 것이다. 두 번째는 사물에 대한 감사와 사람들이 함께 만들어가는 이야기의 소중함이다. 일본에는 오래 사용한 바늘에 감사를 전하는 ‘하리쿠요’ 문화가 있다. 아무리 최첨단 기술이라도 언젠가는 낡는다. 하지만 로봇이나 AI처럼 인간을 비추는 거울 같은 존재로 만들어지는 인간과 기술의 관계, 그리고 그 안에 깃든 이야기는 시대가 지나도 계속 남는다. 그런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야말로 내 일의 변하지 않는 본질이라고 생각한다.
감각이나 판단이 흐려졌다고 생각될 때, 되돌리게 하는 영감의 원천이나 기준이 있나?
어린 시절처럼 상상하던 시간으로 돌아간다. 이상을 강하게 그리면 반드시 그곳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일이 잘 풀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설령 잘됐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아직 다른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시도하고 다시 시작한다. 다시 시작한 횟수만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다. 초대 아시모를 개발하던 혼다의 요시노 전 사장이 내게 “꿈이라는 에너지는 무궁무진하고 무한하다. 그렇게 믿기만 하면 된다”라고 했던 말을 자주 떠올린다. 벽에 부딪힐 때마다 처음 품었던 꿈으로 돌아가려는 이유다.
반대로, 당신의 감각과 영감을 흐리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설명하는 디자인은 상상력과 사고를 멈추게 하고, 결국 영감마저 무디게 만든다. 사실 아시모를 개발하던 초기에 실드를 투명하게 만들어 얼굴을 그대로 드러낸 디자인을 발표한 적이 있다. 어느 정도 반응은 있었지만 많은 사람의 공감을 얻지는 못했다. 형태를 지나치게 현실적으로 만들어버린 탓에 사람들이 자유롭게 상상할 여지를 없애 버렸다고 생각한다. 모든 것을 형태로 설명하려 하기보다 받아들이는 사람의 감각에 맡기는 여백을 남겨두는 것. 그것을 잊는 순간 사람의 마음을 깊이 움직이는 것은 만들어낼 수 없게 된다. 결국 주인공은 사람이지 사물이 아니다.
고시이시 다케시 Inspired by
첫 번째는 로봇 프로젝트에 합류한 직후의 일이다. 나는 곧바로 도치기현 모테기에 있는 혼다 컬렉션 홀을 찾아가, 당시 전시되어 있던 1986년 이후의 역대 시험 제작 로봇을 세세하게 살펴봤다. 이후에는 로봇에 관한 책과 영화를 닥치는 대로 찾아봤고, 〈철완 아톰〉 전권을 사서 읽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작품은 ‘불새’ 시리즈에 등장하는 ‘로비타Robita’였다. 인간의 마음을 가진 로봇이 인간의 모순과 고뇌마저 떠안는 모습을 보며, ‘인간을 닮은 존재를 만든다’는 일이 얼마나 무거운 의미를 갖는지 깊이 생각하게 됐다. 이것은 이후 로봇 디자인을 하는 내내 중요한 바탕이 되었다. 최근 주목받고 있는 피지컬 AI나 자율형 로봇에 대해서도 같은 생각을 한다. 사람의 태도와 설계 철학이 결국 결과에 깊은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서로 맞닿아 있다고 느낀다. 두 번째는 일본의 전통 공연 예술인 다키기노와 앙리 마티스가 제작한 로사리오 성당 벽화다. 일본 전통 공연인 ‘노能’에서 배우가 쓰는 가면은 눈과 입이 움직이지 않는데도, 미세한 각도와 몸짓만으로 풍부한 표정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마티스의 벽화에는 얼굴이 그려져 있지 않다. 보는 사람이 마음속에서 스스로 얼굴을 완성할 여지를 남겨두기 위해서였다고 알려져 있다. 모든 것을 다 그리지 않았기에 오히려 관람자의 마음속에서 이미지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 경험은 아시모를 디자인하면서 ‘여백’의 가치를 확신하게 된 중요한 근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