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기에 건축가가 다시 그린 ‘화가의 집’
건축가가 원 소유주의 화풍을 이어받아 완성한 '화가의 집'
벨기에 소도시 알터에는 화가 안톤 데 클레르크가 직접 설계한 집이 있다. 직선과 면, 색면을 조합해 일상 풍경과 건축물을 그렸던 그의 회화 세계는 집의 구조에도 고스란히 배어 있다. 화가의 사후 낡아버린 이 집은 헨트 기반 건축 스튜디오 아틀리에 벤스 반벨의 손을 거쳐 새로운 공간으로 다시 태어났다.


벨기에 브뤼헤와 헨트 사이 소도시 알터(Aalter)에는 화가 안톤 데 클레르크(Antoon De Clerck, 1923~2001)가 살던 집이자 작업실이 있다. 데 클레르크는 1970년대 벨기에를 대표하는 하이퍼리얼리즘 화가로 꼽힌다. 데인제·헨트 아카데미에서 수학했고, 1945년 벨기에 청년 화가 상을 받았지만 건강 문제로 활동이 한동안 끊겼다가 1967년에야 다시 붓을 잡았다. 1980년대 이후엔 점점 더 개인적인 세계로 침잠하며 작품에 깊이와 영성을 더했고, 멕시코 건축가 루이스 바라간(Luis Barragán)의 건축을 동경해 그에게 바치는 오마주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가 생전 직접 설계한 이 집도 그의 회화 세계와 맞닿아 있었다. 그는 직선과 면, 색면을 조합해 일상 풍경과 건축물을 그렸는데, 이 화풍은 집의 구조에도 그대로 배어 있었다.

화가의 유산을 이어받은 헨트의 아틀리에 벤스 반벨
화가 사후 낡아버린 이 집을 매입한 건 새 소유주 이너·샤를(Ine & Charles) 부부였다. 이들은 건물이 지닌 원래의 건축적 정체성을 지키면서도 지금의 라이프 스타일에 맞게 고쳐줄 건축가를 찾았고, 헨트 기반 건축 스튜디오 아틀리에 벤스 반벨(Atelier Vens Vanbelle)에 의뢰했다. 스튜디오를 이끄는 드리스 벤스(Dries Vens)와 마르텐 반벨(Maarten Vanbelle)은 네덜란드에서 시작된 미술, 건축 운동 데 스테일(De Stijl, 몬드리안의 원색과 수직, 수평선이 대표적인 양식)의 원리와 원색과 추상을 결합한 데 클레르크의 화풍에서 건축적 해법을 찾았다. 스튜디오는 헨트 근교에 게스트하우스와 전망대를 겸하는 독특한 형태의 부속 건물을 지은 이력이 있다. 오래된 오크나무를 구조 기둥 삼아 오각형 평면의 집을 지은 적도 있다. 이번에도 스튜디오 특유의 방식대로, 건축과 회화 사이의 접점을 찾아나갔다.

그림 한 점에서 시작되는 공간의 여정
집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부터 데 클레르크의 그림 한 점을 만나게 된다. 그의 작품 〈로헤르와 줄마의 방문〉을 실물 크기로 인쇄해 자전거 보관소 외벽에 붙였는데, 그림 속엔 인물들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이 실제 현관으로 향하는 길목에 자리해, 방문객은 그림 속 인물들과 마주치며 진짜 현관으로 들어서게 된다. 아틀리에 벤스 반벨은 기존 건물의 1층을 침실, 욕실, 드레스룸, 현관 홀, 세탁실, 사무공간으로 재구성했는데, 이 기존 구조를 지나면 좁은 부엌·다이닝 공간으로 이어진다. 옆면의 접이식 창을 열면 곧바로 야외 테라스와 연결되고, 그 옆으로는 길게 뻗은 수영장이 뒤뜰까지 이어지며 부지 전체가 일직선으로 뻗어 있다는 인상을 준다. 거실과 다이닝 같은 주요 생활공간은 부지 뒤편에 새로 지은 확장 공간으로 옮겼다. 이 공간은 부엌·테라스·기존 건물보다 바닥이 살짝 높게 설계됐다. 부지 앞쪽에는 색과 형태가 뚜렷한 카포트가 있고, 이 카포트가 집의 첫인상을 좌우한다.

바우하우스의 색, 미드 센추리의 형태
이 집의 전반적인 색채는 화이트, 블랙, 그레이를 기본 팔레트로 삼고, 여기에 색을 입힌 유약 벽돌을 특정 위치에만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색을 입힌 천장은 실내뿐 아니라 지붕이 덮인 야외 공간에도 그대로 적용됐다. 아틀리에 벤스 반벨은 데 클레르크가 남긴 원색의 선과 면을 그대로 살리면서, 바우하우스 색채와 미드 센추리 미학을 함께 끌어왔다. 동시대적인 느낌을 잃지 않기 위해 지붕을 감싼 금속 마감, 흰 벽돌로 쌓은 벽난로 같은 현대적 디테일도 곳곳에 더했다. 그 결과 이 집은 누군가에겐 낯익은 모더니즘 요소들을 재치 있게 다시 배치한, 옛 감성을 살리면서도 지루하지 않은 인상을 준다.

복제 대신 재해석을 택한 이유
이 집이 특별한 이유는 원 소유주의 화풍을 그대로 복제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아틀리에 벤스 반벨은 데 클레르크가 남긴 집을 하나의 완성된 유산으로 보존하기보다, 새로운 삶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으로 바라봤다. 기존 건물의 성격과 화가의 흔적은 존중하되 필요한 부분은 과감하게 바꾸고 확장하면서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 안에서 자연스럽게 공존하도록 했다. 덕분에 리노베이션 이후에도 이 집의 주인공은 여전히 데 클레르크다. 하지만 그의 흔적은 과거의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는 방식이 아니라, 새로운 거주자의 일상 속에서 계속 읽히고 경험된다. 한 화가가 자신의 세계를 담아 지었던 집은 그렇게 멈춰 있는 기념물이 아닌, 다음 세대의 삶을 품으며 이어지는 공간이 됐다.
글 최새미 객원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