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보미술관, 연희동 작업실 옆에 문을 열다
연희동에서 만나는 박서보의 유산과 동시대 미술
박서보(1931~2023)의 작업실이 있던 연희동에 박서보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을 2027년 1월 3일까지 선보인다.

서울 연희동 골목 안, 한국 단색화의 거장 박서보(1931~2023)가 생전 생활하고 작업했던 작업실 옆에 새 미술관이 들어섰다. 지난 8월 21일 공식 개관한 박서보미술관이다. 박서보재단이 운영하는 이곳은 박서보의 작품과 아카이브를 보존·연구하며, 동시대 미술과 새로운 대화를 이어가는 문화 플랫폼을 지향한다. 개관전으로 박서보와 베트남 출생의 프랑스 작가 흐엉 도딘(Huong Dodinh)의 2인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을 2027년 1월 3일까지 선보인다.

박서보재단은 2019년 설립(구 기지재단) 이후 작가가 평생 모아온 방대한 아카이브를 정리해 왔다. 이 과정에서 단지 한 작가의 회화를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교육자이자 연구자로서 한국 현대미술의 제도적 기반을 다졌던 그의 예술적 유산을 동시대와 연결할 필요성을 확인했다.

박서보미술관은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계획된 공간은 아니었다. 박서보의 작품과 생애를 기리는 작은 기념관으로 설계를 시작했지만, 박서보의 생전 마지막 시기와 맞물려 미술관의 방향이 구체화됐다. 이후 인근 부지를 추가로 확보하면서 건축 계획을 확장했고, 약 3년에 걸친 공사를 거쳐 올해 5월 준공 허가를 받아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자연과 빛을 내부로 들인 공간

미술관 건축 설계는 최문규 연세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가 맡았다. 대지면적 약 760㎡, 연면적 약 2,000㎡ 규모로 지하 2층부터 지상 3층까지 총 5개 층으로 구성된다. 지하 2층 SPACE Ø, 지상 2층 SPACE 2, 지상 3층 SPACE 3 등 세 개의 전시 공간과 커뮤니티 및 다목적 공간인 지상 1층 SPACE 1, 야외 정원 등을 갖췄다.



건물의 가장 큰 특징은 자연과의 적극적인 연결이다. 작품 보존을 위해 외부 빛을 철저히 차단하는 일반적인 미술관과 달리 박서보미술관은 각 층마다 작은 정원을 두고 큰 창을 내어 자연광을 안으로 들였다. 관람객은 전시를 감상하는 도중 창밖의 자연을 마주하며 작품과 계절의 변화를 한 공간 안에서 감각하게 된다.


특히 3층에 위치한 높이 8m의 정사각형 공간 ‘큐브(Cube)’는 반투명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부드러운 자연광이 백미다. 시간과 날씨에 따라 변하는 빛은 작품 표면의 미세한 질감과 물성을 드러낸다. 이와 함께 각 층에는 미디어와 음향 콘텐츠를 자유롭게 구현할 수 있는 시스템이 마련돼, 향후 회화를 넘어 다채로운 동시대 예술 콘텐츠를 담아낼 수 있도록 했다.
비워낸 자리에서 만난 충만, 박서보와 흐엉도딘

개관전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은 박서보의 회화 25점과 흐엉 도딘의 회화 17점 등 총 42점을 소개한다. 전시는 서로 다른 시대와 문화적 배경, 작업 방식을 지닌 두 작가가 ‘반복과 축적을 통한 비움’이라는 공통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박서보는 1967년부터 이어온 ‘묘법(Ecriture)’ 연작을 통해 화면 위에 반복적으로 선을 긋고 한지를 밀어내며 자아를 비워내는 수행적 회화를 구축했다. 화면에 쌓인 선과 결은 작가가 통과한 시간의 흔적이자 정신적 질서의 결과물이다.

흐엉 도딘은 선 대신 색의 층위를 쌓는다. 프랑스 남부 그라스 지역의 광물 안료와 직접 만든 유기 바인더를 사용해 수십 차례 얇은 색을 중첩한다. 정교하게 쌓인 색 층은 광학적 깊이를 형성하며, 마치 화면 내부에서 빛이 스스로 발현되는 듯한 효과를 만든다. 두 작가의 작업은 모두 화면에서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며 오히려 더 깊은 밀도와 충만함에 도달한다.


전시는 지하 2층 SPACE Ø에서 시작해 지상 2층 SPACE 2를 거쳐 지상 3층 SPACE 3으로 이어진다. SPACE Ø에서는 두 작가의 1990년대 작업을 함께 배치했다. 구체적인 형상을 재현하지 않는 화면이지만 안개와 흙, 물과 바람, 빛처럼 자연을 떠올리게 하는 감각이 공간을 채운다.


SPACE 2에서는 박서보의 묘법 연작의 변주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짙은 흑색에서 밝고 다채로운 색채로 변화하는 화면을 따라가며 묘법의 확장과 함께 박서보의 삶과 태도까지 들여다본다. 검은 화면에는 어머니의 사랑과 희생에 대한 기억이, 색채 한지묘법에는 급변하는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자연에서 위안과 치유를 얻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다.


마지막 SPACE 3에서는 두 작가의 백색 계열 작품을 만난다. 형태와 색채를 극도로 절제한 화면에는 빛과 물질의 미세한 흔적만 남는다. 자연광과 작품의 표면이 만나는 이 공간에서는 관람객의 움직임에 따라 화면의 느낌도 달라진다. 특히 흐엉 도딘이 2023년 박서보를 만난 뒤 그 만남을 기억하며 제작한 <X.K.N.31>(2025~2026)이 함께 전시된다.

올해는 한국과 프랑스 수교 140주년을 맞는 해다. 프랑스를 기반으로 활동해 온 흐엉 도딘과 박서보의 작품을 함께 소개하는 이번 전시는 이러한 시점과도 맞닿아 있다. 박서보를 한국 단색화의 대표 작가라는 미술사적 위치에만 한정하지 않고, 문화와 지역을 넘어 회화의 본질을 탐구해 온 작가로 다시 읽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깊다.
박서보의 정신을 다음 세대로

박서보미술관은 박서보의 작품과 자료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보존하는 한편 국내외 작가를 소개하는 전시와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을 이어갈 예정이다. 박서보가 생전 새로운 작가를 발굴하고 후배들을 이끌며 한국 현대미술의 기반을 넓혀왔다. 미술관 역시 젊은 작가와 연구자들이 더 넓은 세계와 만날 수 있는 플랫폼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

박승호 박서보재단 이사장은 “박서보의 작품과 자료를 체계적으로 연구, 보존하는 한편 젊은 작가를 소개하는 기획전과 교육 프로그램을 꾸준히 운영할 계획”이라며 “한국 현대미술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는 문화적 거점으로 자리매김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개관전과 연계한 프로그램도 마련했다. 9월부터 12월까지 매월 둘째 주 일요일에는 박서보가 남긴 일기와 편지를 따라 자신의 문장을 써보는 ‘마음을 채우는 글쓰기’가 진행되며, 매월 중순 목요일에는 명상과 앰비언트 음악, 차와 그림을 통해 전시를 경험하는 ‘마음을 비우는 드로잉’이 열린다.

박서보미술관의 첫 전시는 박서보의 작품세계를 보여주는 데서 출발하지만, 그가 남긴 예술적 태도와 교육 정신을 동시대 미술로 이어가는 시작점이기도 하다. 박서보를 기억하는 공간을 넘어 새로운 작가와 관객, 연구와 전시가 만나는 장소로서 박서보미술관의 앞으로의 행보가 기대된다.
〈박서보와 흐엉 도딘: 비움 그 충만〉
주소 서울시 서대문구 연희로 24길 9-54, 박서보미술관
기간 2026년 8월 21일 – 2027년 1월 3일
운영 시간 11:00 – 18:00 (월 휴관)
참여 작가 박서보, 흐엉 도딘(Huong Dodinh)
주최 박서보미술관
후원 주한프랑스대사관 문화과
홈페이지 박서보미술관
인스타그램 @parkseobo.museu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