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 ‘더치 디자인 위크’가 주목한 디자인 실험들
AI부터 바이오디자인까지, 에인트호번에서 펼쳐진 디자인의 새로운 시도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2026 더치 디자인 위크가 열렸다. 올해는 ‘R.A.W.’를 주제로 2,500여 명의 디자이너가 참여해 기존 관습에 도전하는 실험적인 작업을 선보였다. AI와 바이오디자인, 새로운 소재와 제작 기술부터 사회적 문제를 탐구하는 프로젝트까지.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한 현장을 소개한다.

네덜란드 최대 디자인 축제인 더치 디자인 위크(Dutch Design Week)가 지난 10월 17일부터 25일까지 열렸다. 올해로 26회를 맞은 이 행사는 매년 10월 에인트호번 전역에서 펼쳐지며, 완성된 제품을 선보이는 데 그치지 않고 새로운 아이디어와 실험을 통해 디자인의 가능성을 탐색하는 자리다. 기성 디자이너부터 신진 디자이너, 기업과 교육기관까지 폭넓게 참여하며, 특히 같은 기간 개최되는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Design Academy Eindhoven)의 졸업전은 주요 프로그램 중 하나로 꼽힌다.

올해의 주제는 ‘R.A.W.(Rebel, Authentic, Worth)’다. 기존 관습에 도전하는 태도와 진정성, 가치를 의미하는 세 단어의 첫 글자를 딴 것으로, ‘날것의’를 뜻하는 영어 단어 raw의 의미도 함께 담았다. AI와 디지털 기술이 효율과 완벽함을 추구하는 시대에 정제되지 않은 아이디어와 실험, 소재 탐구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번 행사에는 2,500명이 넘는 디자이너가 참여해 AI와 바이오디자인, 새로운 소재와 제작 기술, 공동체를 위한 디자인 등 다양한 프로젝트를 선보였다.
올해의 주요 하이라이트

AI가 일상의 모든 것을 지켜본다면 개인의 사생활은 어떻게 달라질까. 디자이너 메스 부이언(Mees Boeijen)의 ‘transparent.citizen’은 이러한 질문에서 출발했다. 그는 일주일 동안 AI가 자신의 움직임과 활동을 추적하도록 했다. 수집된 데이터는 한 사람의 일상을 담은 인쇄물로 남으며, 이를 읽는 관람객 역시 감시의 대상이 된다. AI 시대에 개인의 프라이버시와 감시의 경계를 질문하는 작업이다.


탐 인더스트리스(TAM Industries)의 ‘House of Lights’는 재활용 플라스틱을 활용한 실물 크기의 3D 프린팅 주택이다. 외벽 전체를 하나의 구조물로 출력했으며, 제작 단계에서 최종 색상까지 구현하고 사용 후에는 다시 재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했다. 대형 3D 프린팅 기술을 건축에 적용해 새로운 제작 방식의 가능성을 보여준 프로젝트다.


파운데이션 위 아(Foundation We Are)가 기획한 그룹전 〈더 컬렉티브 리스폰스(The Collective Response – Design for Shared Action)〉는 디자인이 공동체의 참여와 집단행동을 이끌어내는 방식을 탐구했다. 그중 야무나 포르자니(Yamuna Forzani)의 ‘It Takes a Village’는 태피스트리와 커튼, 휴식 공간으로 이루어진 설치 작품이다. 관람객이 그 안에 머물며 소속감과 돌봄, 타인과의 연결에 대해 생각해 보도록 했다.

아티스트 타이스 비어스테커(Thijs Biersteker)와 전기차 브랜드 폴스타(Polestar)가 협업한 ‘We Harvest Wind’는 재생에너지와 소재 전환을 다룬 설치 작품이다. 바람의 움직임과 재활용 소재를 활용해 에너지 생산과 자원, 기후변화처럼 복잡한 문제를 관람객이 직접 경험할 수 있도록 풀어냈다.
올해의 비컨(Beacon)으로 선정된 바이오디자이너 에마 판 데르 레이스트(Emma van der Leest)는 〈더 바이오디자인 웨어하우스(The Biodesign Warehouse – Department Store for Life)〉를 선보였다. 바이오디자인의 현재를 백화점 형식으로 소개한 전시로, 화장품을 비롯한 다양한 제품과 응용 사례를 통해 생물학적 소재와 기술이 실험 단계를 넘어 실제 생활과 산업에 적용될 가능성을 살펴봤다.
컬렉터블 디자인의 새로운 거점
올해는 컬렉터블 디자인의 새로운 거점도 형성됐다. 스트레이프-T·R(Strijp T+R) 지역의 빌딩 TT(Building TT)와 새롭게 개방된 빌딩 TX(Building TX)가 피트 헤인 에이크(Piet Hein Eek)의 공간과 함께 새로운 전시 동선을 이뤘다.


빌딩 TX에서 열린 〈Forward Furniture〉는 브뤼셀과 뉴욕에서 개최되는 디자인 페어 컬렉터블(COLLECTIBLE)의 공동 창립자이자 예술감독 리브 바이스베르흐(Liv Vaisberg)가 기획한 전시다. 신진 디자이너부터 기성 디자이너까지 다양한 참여자가 각자의 가구 컬렉션을 선보이며 고유한 조형 언어와 제작 방식을 소개했다.


빌딩 TT에서는 디자이너 디르크 다위프(Dirk Duif)가 자신의 작업실을 개방하고 〈A makers Thought〉를 선보였다. 지난 몇 년간 제작한 가구와 오브제, 설치 작품을 한자리에 모은 전시로, 의자와 테이블 등 익숙한 사물의 크기와 비례, 기능을 변형하는 실험에 주목했다. 특히 철의 구조와 제작 흔적을 숨기지 않고 드러내며 소재와 제작 과정 자체를 디자인의 중요한 요소로 다뤘다.
도시로 나온 디자인
에인트호번의 거리와 광장도 디자인 실험의 무대가 됐다. 올해는 도심과 옛 산업지구 스트레이프-S(Strijp-S)에 대형 설치 작품 8점이 들어섰으며, 모두 무료로 개방됐다. 공공 공간을 활용해 건강과 안전, 새로운 감각적 경험까지 다양한 주제를 탐구한 작업들이다.

마르크트 광장에 설치된 아틀리에 판 리스하우트(Atelier Van Lieshout)의 ‘Consultation Room of the Future’는 거대한 알 위에 높이 7m의 황금빛 새가 앉아 있는 독특한 모습으로 눈길을 끌었다. 알 내부를 상담실로 꾸며 AI와 로봇 기술이 정신 건강에 미치는 영향을 질문했다.


시청 광장에서는 이사벨 + 헬렌(Isabel + Helen)의 ‘FIELD’가 바퀴 달린 풍력 터빈을 통해 관람객이 바람과 움직임의 관계를 직접 탐색하도록 했다. 루카 오르트만(Luca Ortmann)의 ‘Waiting for the Bus’는 노란색 강철 구조물을 거리 한복판에 설치해 일상적인 기다림을 위한 공간을 제안했다.
2026 더치 디자인 어워드
올해 더치 디자인 어워드(Dutch Design Awards)에서는 15명의 신진 디자이너가 최종 후보에 오른 가운데, 준 후지사쿠(Jun Fujisaku), 오리 오리순 메르하브(Ori Orisun Merhav), 에스메이 바헤만스(Esmay Wagemans) 등 3인이 수상자로 선정됐다.

준 후지사쿠는 건축과 가구 제작 기술을 바탕으로 형태와 구성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는 모듈형 가구를 선보였다. 주거 공간의 전통적인 구성과 일상적인 가사노동의 방식을 재검토하는 작업으로, 심사위원단은 이를 한 차원 진화한 모듈형 디자인이라고 평가했다.

오리 오리순 메르하브는 곤충에서 추출한 바이오 소재를 활용해 전통 공예와 3D 적층 제조 기술을 결합한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자연과 동물, 기술의 관계에서 새로운 소재와 제작 방식의 가능성을 모색한 것이다. 에스메이 바헤만스는 신체에 직접 재료를 입혀 형태를 만들고 이를 캐스팅하는 방식으로 인간의 몸과 기술의 관계를 탐구했다. 신체의 유동성과 자율성, 사이보그적 가능성을 드러내는 작업이다. 심사위원단은 세 수상자가 기존의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독자적인 작업 방식을 통해 디자인의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 졸업전
디자인 아카데미 에인트호번(Design Academy Eindhoven)은 올해 졸업전에서 학사·석사 과정 졸업생들의 프로젝트 200여 개를 선보였다. 옛 통신회사 건물을 활용한 전시 공간 마이크로스타트(Microstad)에서 열린 이번 전시는 과거의 결정이 현재에 남긴 흔적에 주목하며, 소재와 자원 채굴, 사회적 규범과 책임의 문제를 탐구했다. 오브제와 영상, 사운드, 인터랙티브 설치 등 다양한 형식의 작업이 소개됐다.

졸업전 우수작으로 선정된 세 프로젝트는 사회적 문제의식이 두드러졌다. 라가드 사크팔하이트(Raghad Saqfalhait)는 팔레스타인 고고학 발굴 현장의 흙과 재를 통해 땅에 남은 역사와 기억을 다뤘다. 아타나시오스 파스팔리아리스(Athanasios Paspaliaris)는 직접 이삿짐 운송 일을 하며 촬영한 영상으로 도시의 보이지 않는 노동과 이주의 문제를 드러냈다. 루엘라 엑스턴(Louella Exton)은 호주 마랄링가 지역의 핵실험으로 남은 방사성 오염의 흔적을 추적하고 시각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