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오는 5월 29일 개관한다. 2015년부터 장장 10여 년간의 건립 준비 끝에 마침내 베일을 벗는다. 국내 최초의 공공 사진 미술관을 건축과 공간, 콘텐츠 관점에서 조목조목 살펴봤다.
사진 문화를 향한 열린 플랫폼,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매체에 특화된 지역 공립 미술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탄생한 배경은 명확하다. 한국에도 공공 사진 미술관이 하나쯤 있을 법 한데 없었다. 사진이 일찍이 우리 일상에 깊숙이 개입한 데 반해 사진을 만나고, 이해하고, 사진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공공기관은 부재했다. 한국 사진 예술의 중심에서 사진 매체에 대한 연구와 보존, 수집, 전시, 교육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수행할 기관이 필요하다는 점이 중요한 건립 동기가 됐다. 미술관이 들어선 지역은 도봉구 창동. 서울시가 2015년부터 문화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 박물관과 미술관을 건립하기 위해 추진 중인 ‘박물관 미술관・도시, 서울’ 사업의 일환이다. 즉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서울시립미술관의 분관이라는 정체성을 지닌다. 사진 매체의 특화 못지않게 지역 거점이라는 맥락이 중요한 이유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창동 서울아레나, 서울로봇인공지능과학관 등과 함께 동북권 문화 기반 시설로, 지역 발전을 도모하는 기관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전경. ⓒ 정지현 서울시립미술관 제공
빛을 담은 모놀리식 건축
2019년 설계 공모에 당선한 오스트리아 건축가 믈라덴 야드리치Mladen Jadric와 일구구공도시건축 건축사사무소는 카메라 셔터가 열리고 닫히는 원리에서 디자인 콘셉트를 도출했다. 바닥에 붙어 있는 매스를 살짝 회전시키면서 한쪽 부분을 들어 올려 출입이 가능한 개구부를 만들고, 다른 한쪽에는 땅으로 깔리면서 이벤트가 펼쳐지는 외부 공간을 계획했다. 여기에는 사진과 건축이 공유하는 ‘빛’의 개념이 담겨 있다. 믈라덴 야드리치는 “건축이 빛 속에 있는 형태들의 유희라면, 사진은 빛으로 빚는 그림”이라며 사진과 건축의 유사점을 언급했다. 이를 바탕으로 건축적으로 보면 하나의 덩어리지만, 그 사이로 빛이 들면 모놀리스크 같은 덩어리가 움직인다는 역설적인 개념을 구현하고자 했다. 미술관에는 층고가 10m나 되는 로비 같은 열린 공간이 있는가 하면, 암실처럼 닫힌 공간도 있다. 마감재도 검은 콘크리트와 회색 금속을 사용해 흑과 백의 대비를 표현했다. 이러한 건축적 장치를 활용해 빛의 개념을 시각화했다. 준공 후 인테리어 디자인을 맡은 진달래(마음스튜디오)는 프레임, 조리개, RGB 컬러 같은 사진의 구성 요소에서 영감받은 가구를 디자인했다. 건축물의 외관만큼이나 인테리어가 미술관의 이미지를 결정하고 관람객에게 다채로운 경험을 제공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판단해 수개월간의 워크숍과 논의, 디자인과 목업 작업을 거쳐 가구를 완성했다.
내부 조감도. 디자인 야드리치 건축 ZT GmbH, 일구구공도시건축 건축사사무소
보고, 듣고, 경험하는 사진
지하 2층, 지상 4층 규모인 공간은 다채로운 프로그램으로 채웠다. 지하에는 사진술 도입기부터 20세기 말에 창작되거나 발표된 한국사진의 걸작과 필름, 자료, 그리고 동시대 사진 작품을 보관, 보존하기 위한 수장고를 배치했다. 사진 매체 특화 미술관이라는 정체성에 걸맞게 필름 수장고를 구비한 것이 특징이다. 필름 수장고는 필름 보존을 위해 0℃를 유지하는 특수 공간이다. 지하 주차장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거나 정문에서 바로 1층에 진입하면 10m 층고의 로비가 펼쳐진다. 미술관의 경험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마치 모든 빛을 빨아들인 듯한 회색 배경의 로비를 지나면 전시장 입구로 향하는 계단이 나온다. 2층과 3층에는 4개의 전시실과 영상 홀을 배치했다. 1, 2 전시실과 영상 홀이 있는 2층이 경사진 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비정형의 공간이라면, 3층 전시실은 전형적인 화이트 큐브 공간이다. 2층은 동시대 작가의 다양한 시도가 드러나는 전시나 큐레이터의 실험 정신과 창의력이 돋보이는 전시를, 3층은 평면 작업이 주를 이루는 사진 작품의 특성을 염두에 두고 차별화했다. 4층은 방문객의 휴식과 발견, 배움과 소통을 위한 공간이다. 사진과 관련한 다양한 출판물과 희소성 높은 자료를 열람할 수 있는 포토 라이브러리와, 사진 중심의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교육실과 암실이 자리해 있다.
북숍을 위해 디자인한 가구. 디자인 진달래(마음스튜디오)
“조리개(f값), 프레임, 셔터 스피드 등을 모티브로 삼아 가구 및 집기 디자인에 활용했다. 예를 들어 라운지 카페의 조명, 의자, 테이블, 숍 선반은 사진 비율에 맞는 프레임을 설정해 이야기를 담는 도구의 툴로 삼았고, 교육실의 테이블과 자료실 서가의 동그란 원형은 조리개에서 착안했다. 16:9 프레임 안에서 다양하게 바뀌는 인포데스크의 컬러로 미술관이 지향하는 다채로움을 반영하고자 했다.”
이달우 진달래(마음스튜디오) 대표
사진과 디자인의 접점, 포토 라이브러리
4층 포토 라이브러리는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에서도 특별한 공간이다. 사진과 문헌정보학을 전공한 박소진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학예사는 사진책의 의미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진가에게 사진집이 단순한 출판물이 아니라, 중요한 표현 수단이자 아카이브라는 것을 알았기에 차별화된 구성이 가능했다. 약 200㎡ 규모의 포토 라이브러리는 1만여 권의 장서를 보유하고 있다. 서울시립미술관 본관과 북서울미술관, 미술아카이브 등 산하 기관도 각각 라이브러리를 운영하지만, 사진 관련 도서의 비중이 낮다는 점을 고려해 일반 도서는 배제하고 한국 사진사 및 사진가의 아카이빙을 집중 수집하는 전문 섹션을 꾸렸다. 흥미로운 것은 지난해 운영이 종료되어 많은 디자이너들의 아쉬움을 자아냈던 wrm의 레퍼런스 룸 자료를 3000권가량 인수한 것이다. “사진은 촬영 단계에서부터 프레임 안의 구도와 풍경, 피사체의 배열까지 디자인된 이미지로 만들어지고, 책이나 인쇄물로 재구성되는 과정에서도 그래픽 디자인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사진과 디자인은 떼려야 뗄 수 없는 매체다.” 사진집과 더불어 디자인 관련 서적을 선별해 배치한 이유다. 포토 라이브러리에서 계획 중인 또 다른 프로그램으로는 손으로 직접 사진책을 만드는 마케트maquette 세미나가 있다. 편집 디자이너를 강사로 초대해 사진가와의 접점을 만들 계획이다.
포토 라이브러리 조감도. 디자인 진달래(마음스튜디오)
축적을 시각화한 아이덴티티 디자인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비주얼 아이덴티티 시스템은 네임드가 개발했다. 조리개의 움직임을 형상화한 건축물의 콘셉트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미술관의 정체성이라고 할 수 있는 아카이브의 ‘축적’을 시각화하고 시스템화하는 데 집중했다. 축적의 의미를 레이어로 정의하고, 쌓여가는 역사와 콘텐츠의 중첩을 표현했다. 이 개념을 사이니지 디자인 시스템으로도 확장해 방문객이 공간을 이동하며 미술관의 정체성을 자연스럽게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미술관 상설 전시에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드러낼 수 있는 그래픽 요소. 모티프를 공간에 넓게 적용할 때의 모습이다. 디자인 네임드옥외 광고에 적용한 전시 아이덴티티. 2D의 면이 3D의 입체적인 모션으로 확장될 수 있도록 고안했다. 디자인 네임드브로슈어에 적용한 전시 아이덴티티. 디자인 네임드
Interview
한정희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장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이 목표로 하는 역할과 정체성은 무엇인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사진의 영향력과 예술적 가치를 경험하고, 사진작가를 포함한 국내외 시각 문화 생산자와 사용자들이 활발히 교류할 수 있는 사진 매체 특화 미술관이다. 이곳은 건립 타당성 검토 단계에서부터 우리나라 최초의 공공 사진 미술관임을 강조해왔다. 모든 미술관은 공공성을 지향하며 공공을 위해 존재함에도 이를 강조한 이유는 누구나 동등하게 사진을 만나고, 이해하며, 그것에 대해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하는 역할을 다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한국 사진 예술 중심의 사진 매체에 대한 연구와 보존, 수집, 전시, 교육 등 미술관이 행하는 모든 사업을 지속적이고 규칙적으로 운영하겠다는 의미도 담겨 있다.
준비 과정에서 건축만큼이나 작품 수집에 힘을 쏟았다고 들었다.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은 한국 사진 예술 연구의 중추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한다 .한국 사진의 역사가 이미 한 세기를 뛰어 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연구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다. 이를 감안해 한국 사진 예술의 과거와 현재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미래지향적인 사진 예술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활동을 긴 호흡으로 지속하고자 한다. 아울러 빠르게 소실 중인 한국 사진의 걸작과 동시대 사진 작품을 수집, 보존하고, 다양한 분야의 전문인들과 협력해 이를 다각적으로 연구할 것이다.
이형록, 시장의 아침, 1957, 젤라틴 실버 프린트, 26.6×35.8cm임석제, 1955년 상동중석광산에서, 1955, 젤라틴 실버 프린트, 11.4×10.9cm
수집 대상으로 삼은 자료의 범위와 기준은?
지난 10년간 수집을 개관 준비의 핵심 활동으로 삼았다. 수집의 범위와 기준은 장시간의 수집 관련 연구와 논의를 통해 결정했다. 선정 기준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고려한 것은 이 작품들이 서울시립 사진미술관만의 정체성, 고유성 확립과 전시와 교육 등 미술관 활동에 근간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사진을 소장한 국내외 미술관들과 소장품에 대한 작가별, 시대별 분석 등 전방위적 연구를 진행했다. 그 결과 한국 사진사에 중요한 역할을 한 사진 작품과 자료 2만 1000여 점을 수집했다.
수집 과정에서 깨달은 점이 있다면?
연구와 분석 결과 사진술 도입기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사진사의 체계화를 위한 작가와 작품의 수집이 부족하다는 것을 발견했다. 당시 작품이 망실될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해 이 시기의 사진을 집중적으로 수집했다.
설계 공모안을 바탕으로 공간이 구축되기까지 주요하게 다룬 과제는 무엇인가?
마치 인화지가 층층이 쌓인 것 같은 형상의 외관을 따라가보면 건물의 유연한 형태를 느낄 수 있다. 이를 구현하기 위해 건축가와 시공사가 무척 공을 들였다. 미술관 내부에도 이런 특성이 잘 반영되어 있다. 특히 경사진 벽과 바닥으로 이루어진 2층은 서울시립 사진미술관만의 독특한 매력 포인트다. 동시에 포용적인 공간으로서 본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도록 건축적 특징과 실용성 사이의 합의점을 찾는 일도 필요했다. 설계 공모안에 담긴 특성은 지키되, 효율적으로 전시를 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모두가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는 전시 공간을 구현하는 데 주력했다.
개관 특별전에 대한 소개를 부탁한다.
‘광(光)적인 시선’이라는 주제 아래 기획한 두 가지 개관 특별전을 연중 개최할 계획이다. 〈광채光彩: 시작의 순간들〉와 〈스토리지 스토리Storage Story〉 두 전시는 2015년부터 약 10년간 집요하고 꾸준하게 진행한 건립의 결과를 토대로 빛(光)의 그림인 사진에 대한 새로운 시각과 시선, 애정을 다각도로 조망한다. 이는 새로운 사진미술관의 탄생을 알린다는 의미도 담고 있다. 특히 〈스토리지 스토리Storage Story〉는 동시대 작가 6명이 1년여간 경험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의 건축 과정을 각자의 시선으로 해석해 작품으로 구현한 전시로, 서울시립 사진미술관 건립의 의의와 존재 이유를 다각도로 선보일 예정이다.
원성원, 완성되지 않은 건축 지어지는 중인 자연, 2025,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149x269cm서동신, 위험에서 벗어난, 2025, 아카이벌 피그먼트 프린트, 90x60cm
건축 야드리치 건축 ZT GmbH(대표 믈라덴 야드리치), 일구구공도시건축 건축사사무소 (대표 윤근주·황정환) 아이덴티티 디자인 네임드(대표 윤영노) 인테리어 디자인 진달래(마음스튜디오)(대표 이달우) 주소 서울시 도봉구 마들로13길 68 웹사이트 sema.seoul.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