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방에서 사진의 세계로, 렌즈를 든 바우하우스 여성 작가 3인
베를린 사진 미술관 기획전, <New Woman, New Vision>
바우하우스 제도의 한계 속에서 거트루드 아른트, 마리안네 브란트, 루치아 모홀리는 지정된 공방을 넘어 사진을 선택했다. 이들은 퍼포먼스, 포토콜라주, 건축 사진을 통해 독자적인 시각 언어를 완성하며 주체적인 예술 세계를 펼쳤다.

1919년 독일 바이마르에서 창설된 바우하우스는 예술과 공예, 건축의 통합을 표방한 조형 학교로 20세기 디자인과 시각 언어의 근간을 형성했다. 바우하우스는 남녀동등 입학을 표방했지만, 예비 과정 이후 여성 지원자 대다수는 직조 공방으로 배치되었다. 사진 전공이 정식 개설된 것은 1929년이었으며, 그 이전부터 여성 사진작가들이 기관 홍보용 이미지 담당했다는 사실은 이 구조적인 균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렇게 학교의 제도가 여성을 특정 공방으로 몰아넣는 동안, 사진은 커리큘럼 바깥에서 자라고 있었다.

오는 10월 4일까지 열리는 베를린 사진 미술관(Museum für Fotografie)의 이번 전시는 바우하우스의 여성 사진작가들을 전면에 조명한 최초의 기획전이다.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바우하우스의 이미지들을 재소환하는 대신 그 이미지를 만든 여성 작가를 복원하는 데 집중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 직조 작업으로 잘 알려진 거트루드 아른트(Gertrud Arndt)가 있다. 1923년 바우하우스에 입학한 아른트는 건축가가 되려는 꿈을 품고 있었으나 직조 공방으로 배정되었고, 1927년 최종 시험까지 4년을 그곳에서 보냈다.
퍼포먼스와 사진의 경계를 넘다, 거트루드 아른트
그녀의 카펫과 태피스트리는 바우하우스 직조 공방의 미학적 성취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꼽힌다. 격자와 줄무늬를 기본 구조로 삼되, 실의 굵기와 밀도 차이를 의도적으로 변주해 화면 안에 리듬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특징적이다.

원색을 쓰지 않는다. 베이지, 갈색, 회색 계열의 무채색 톤을 주조로 삼아 간결하되 촉각적으로 풍요로운 화면을 만들었고, 이 절제의 미학은 당시 바우하우스 직조 공방이 추구하던 기능주의적 아름다움과 정확히 맞닿아 있었다. 그런데 아른트 자신은 이 작업에 대한 애정을 공개적으로 거의 표명하지 않았다. 직조는 자신이 선택한 매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1927년 시험을 마친 뒤 그녀는 직조를 그만두고 카메라로 돌아왔다.

그렇게 아른트의 카메라가 남긴 것은 1930년 미망인, 팜므파탈 여인, 귀부인 등을 담은 마스크 포토 연작이다. 작가는 다양한 의상과 소품을 걸치고 거울 앞에 섰으며, 표정과 제스처까지 연기했다. 스스로 여성성의 클리셰를 직접 수행함으로써 그 클리셰를 해부하는 방식으로, 퍼포먼스와 사진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업이었다. 그러나 이 사진들은 공개를 전제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아른트는 평생 사진 작업을 사적인 취미라고 불렀는데, 1931년 첫아이가 태어나던 해, 그녀는 카메라를 내려놓았다. 직조가 제도의 선택이었다면 사진은 자신의 선택이었고, 그 선택마저 모성의 역할 앞에서 접혀야 했다. 그녀의 사진에 대한 재발견은 거의 반세기 뒤인 1979년 에센의 폴크방 미술관(Folkwang Museum)에서의 전시 이후에야 찾아왔다.
제도의 틀을 거부한 사진, 마리안네 브란트
그에 반해, 마리안네 브란트(Marianne Brandt)는 아른트와 다른 궤도를 밟았다. 브란트는 바우하우스 금속 공방의 유일한 여성 학생으로 시작해, 라즐로 모홀리-나기(László Moholy-Nagy)의 지도 아래 짧은 시간 안에 공방의 핵심 작가로 올라섰다. 1924년에 제작한 반구형 티포트와 티인퓨저 셋트(MT 49)는 지금도 20세기 산업 디자인의 고전으로 꼽힌다. 황동과 은도금 처리된 금속으로 만든 이 찻주전자는 완벽에 가까운 구 형태를 기본으로 삼되, 손잡이와 주둥이를 기하학적으로 최소화해 기능과 형태가 분리되지 않는 상태를 만들어냈다.

그 어떤 장식을 추가하는 대신, 표면의 물성 자체가 장식이다. 빛에 따라 달라지는 금속의 반사와 질감이 오브제의 존재감을 만들어내는 방식은 바우하우스 금속 공방이 추구하던 기능미의 가장 정교한 표현이었다.

이후 제작한 칸뎀(Kandem) 테이블 조명(1928)은 조절 가능한 방향성과 단순화된 형태로 대량생산 시대의 조명 디자인 문법을 바꾼 작업으로 평가받는다. 이후 그녀는 공방 대리 책임자 자리까지 올랐으며, 바우하우스 역사에서 여성이 공방 운영을 맡은 거의 유일한 사례였다.

그런 그녀가 사진에서만큼은 제도의 틀을 거부했다. 발터 피터한스(Walter Peterhans)의 정규 수업 제안을 뿌리치고 1929년 바우하우스를 떠난 브란트는 마치 금속 공방에서 자신의 작업과 같은 사진을 남겼다. 1928~1929년 데사우 메탈릭 페스티벌에서 금속 구체 표면에 비친 자기 모습을 포착한 셀프 포트레이트는 그 정점에 있는 작품이다. 구의 곡면이 공간을 왜곡하고 그 안에 카메라를 든 사진가 자신이 반사되는 이 사진은, 물성을 통해 자기를 서술하는 방식으로 그녀 자신이 금속 공방에서 제작한 오브제들과 같은 방법론을 따른다.


동시에 그녀가 남긴 포토콜라주들은 신문과 잡지 지면에서 오려낸 이미지와 텍스트를 재배치하며 바이마르 공화국 여성의 이상과 현실 사이 균열을 비평적으로 조합했다. 사진이 그녀에게 디자인의 연장이었다면, 콜라주는 그 너머의 언어였다. 나치가 집권하며 그녀는 일자리를 잃고 켐니츠로 돌아갔으며, 이후 드레스덴과 베를린에서 교직을 이어갔지만, 전쟁 이전과 같은 작업 밀도는 다시 만들어지지 못했다.
기록 그 이상의 건축 사진, 루치아 모홀리
루치아 모홀리(Lucia Moholy)의 사진들은 가장 뒤늦게 이름을 찾았다. 예술사와 철학을 공부하고 출판계에서 교정자로 일하다 모홀로-나기와 결혼한 그녀는 1923년부터 1928년까지 바우하우스의 건물, 공방, 구성원, 작품을 체계적으로 기록했다. 오늘날 바우하우스의 시각 언어를 형성하는 사진의 상당수가 그녀의 손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기록 사진을 넘어선다. 모홀리의 건축 사진들은 빛과 그림자의 배분, 화면 내 기하학적 구조의 설계를 통해 모더니즘 건축의 논리를 시각적으로 번역해 내는 작업이었고, 그 번역의 정밀함이 데사우 바우하우스 건물을 근대 건축의 아이콘으로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그러나 1933년 나치를 피해 런던으로 망명할 때, 작가는 네거티브들을 챙길 수 없었고, 그 일부가 바우하우스 설립자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후 그로피우스는 이를 저작권자 표기 없이 수십 년에 걸쳐 활용하며 바우하우스 이미지로 세계화했다. 모홀리는 런던에서 초상 사진가로 자리를 잡았고, 1939년에는 사진의 역사를 다룬 저서 『A Hundred Years of Photography 1839-1939』(1930)를 펴내며 독자적인 경력을 이어갔다. 그러나 자신의 이름이 지워진 채 전 세계를 순환하는 이미지들을 그녀는 수십 년간 지켜봐야 했다. 법적 투쟁 끝에 일부 네거티브가 반환된 것은 1957년, 촬영으로부터 30년이 지난 뒤였다.


아른트가 첫아이를 낳던 해 카메라를 내려놓고, 브란트의 콜라주가 신문 지면의 여성 얼굴을 오려내어 다른 자리에 붙여 넣은 것. 그리고 모홀리의 이름이 지워진 채 수십 년간 유통된 사진이 법정에서야 돌아온 장면들을 떠올리며, 이들의 사진을 찬찬히 살펴보니 마음 어딘가가 씁쓸해진다. 전시 제목처럼 이 ‘새로운’ 여성들은 당시에 독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그 시선 뒤에 작가가 자리하기까지,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린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