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리테일 공간의 문법을 만드는 스튜디오, 시게(Ciguë)

버켄스탁부터 꼬달리까지, 브랜드가 시게를 선택하는 이유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시게(Ciguë). 지난 15년간 레스토랑, 카페, 패션 부티크, 오피스까지 다양한 상업 공간을 아우르며 파리 리테일 디자인의 문법을 바꿔왔다.

파리 리테일 공간의 문법을 만드는 스튜디오, 시게(Ciguë)

파리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건축·디자인 스튜디오 시게(Ciguë)는 지난 15년간 리테일 디자인의 문법을 조용히 바꾸어 온 곳이다. 눈길을 사로잡는 과장된 제스처보다 재료와 동선, 사용감, 시간의 흐름 같은 요소를 중요하게 여기면서 설계하는 방식은 단순해 보이지만 깊이가 남다르다. 레스토랑, 카페, 패션 부티크, 오피스까지 다양한 상업 공간을 클라이언트의 세계관과 철학을 기본으로 그 위에 본인들의 방식을 더해 사용자들이 감각적 경험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을 창조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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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달리 파리 헤드쿼터 외관 © Maris Mezulis

최근 완공된 프랑스 화장품 브랜드 꼬달리(Caudalie)의 새로운 파리 헤드쿼터는 시게의 태도가 가장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프로젝트다. 5,000㎡ 규모의 대형 오피스이자 스파, 요가 스튜디오, 이벤트 공간을 아우르는 이 복합 프로젝트는 사무실을 넘어 ‘케어(care)’라는 개념을 공간 차원으로 번역했다. 사용 경험과 물성에서 출발하는 시게의 디자인은 브랜드 이미지를 장식하려 하지 않는 대신 브랜드의 역사, 재료, 문화적 맥락, 그리고 사람들이 그 공간 안에서 어떻게 움직이고 머무는지를 고민해 하나의 분위기를 구축한다. 그렇기 때문에 결과물들은 유행을 따르지 않고, 오히려 시간이 흐르면서 디자인의 의도가 더 또렷해진다. 꼬달리 본사는 바로 이런 시게의 철학이 가장 큰 규모로 구현된 결과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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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달리 파리 헤드쿼터 외관 © Maris Mezu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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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측 투영 사이트 © Mars Architecture

파리 마레 지구의 파베 길(Rue Pavée)에 자리한 이 프로젝트는 15~16세기와 18세기에 지어진 두 개의 저택(hôtel particulier), 그리고 에펠 양식의 산업 구조물이 결합된 역사적 건축물 안에 위치한다. 총 5,000㎡ 규모의 공간에는 오피스뿐 아니라 일반 방문객도 이용 가능한 스파, 7개의 트리트먼트 룸, 브랜드 최초의 요가 스튜디오, 그리고 630㎡ 규모의 이벤트 공간이 포함되어 있다. 프로젝트의 핵심은 ‘architecture of care’, 즉 ‘돌봄의 건축’이라는 개념이다. 시게는 이 작업을 통해 일하는 환경 자체를 신체적·감각적 경험으로 재구성하고자 했다. 꼬달리가 포도밭과 와인 테라피(vinotherapy), 식물 연구에서 출발한 브랜드라는 점을 출발점으로, 그들이 다루는 ‘테루아(terroir)’, 즉 토양과 재료를 건축 언어로 번역하는 것이 프로젝트의 목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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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자재로 사용된 프롱트낙 석재 추출 모습 © ciguë

이를 위해 시게는 꼬달리와 수년에 걸쳐 공유해온 자재들을 본사 전체로 확장했다. 오크 배럴의 스테이브(stave)에서 착안한 목재 패널, 보르도 인근에서 채석한 프롱트낙 석재, 실험실을 연상시키는 스테인리스 스틸이 그것이다. 오크는 와인 숙성과 케어의 시간을, 석재는 지역성과 지질학적 기억을, 스테인리스는 꼬달리의 과학적 연구 기반을 상징한다. 하지만 이 자재들은 공간 속에서 과도하게 연출되지 않고 언제나 절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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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출 콘크리트 천장과 구조체, 유리와 금속 파사드, 자연광이 흐르는 오픈 플랜 구조 속에서 목재와 펠트, 밝은 색조의 마감재들이 조용히 균형을 이룬다. 오피스 공간은 지나치게 기업적이지 않으면서 오히려 호텔 로비처럼 설계된 1층 공용 공간에서는 회의, 식사, 휴식, 비공식적인 대화가 자연스럽게 뒤섞인다. 효율성 중심이 아닌, 관계와 리듬, 감정 상태까지 고려하는 현대적 업무환경이란 이런 것이 아닐까.

이 프로젝트가 특히 인상적인 이유는 브랜드 아이덴티티를 오피스 공간에까지 자연스럽게 확장시켰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리테일 공간과 본사 오피스는 서로 완전히 다른 인테리어를 적용하는 경우가 많지만 꼬달리 본사에서는 스파와 부티크에서 발전해 온 감각적 경험을 일상의 업무 환경 안으로 이어지도록 했다. 직원들이 일하는 공간과 고객이 브랜드를 체험하는 공간 사이의 경계가 희미해지는 것. 이는 곧 오늘날 브랜드가 더 이상 제품만이 아니라 하나의 라이프스타일과 감각 체계를 판매한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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꼬달리 파리 헤드쿼터 내부 © Maris Mezulis

2022년부터 본격화된 시게와 꼬달리의 관계는 보르도의 첫 부티크-스파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브뤼셀, 뉴욕, 파리 생 쉴피스, 그리고 이번 본사 프로젝트까지 이어졌고, 이 과정은 일련의 반복이 아닌 점진적인 진화로 발전했다. 장소의 역사와 건물의 기존 구조, 브랜드의 이미지를 천천히 읽어내고, 일종의 고고학적 접근으로 완성된 공간 디자인은 대규모 업무 환경으로 확장됐다.

그런 의미에서 꼬달리 파리 헤드쿼터는 시게에게 중요한 전환점처럼 보인다. 일반적인 오피스와도 다르고, 유행하는 공간의 이미지가 보이지도 않는다. 실제로 몸이 편안한 환경을 만들기 위해 가장 기본적인 빛과 자재, 동선과 음향으로 휴식과 집중의 균형을 이뤘다. 이러한 태도는 시게가 완성한 다른 브랜드들과의 협업에서도 일관되게 드러나는데, 그 예로 파리의 리테일 공간 네 곳을 소개한다.


버켄스탁(Birkenstock)

Rue des Archie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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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 지구 버켄스탁 매장 © cigu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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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 지구 버켄스탁 매장 © ciguë

독일적 기능주의를 미니멀하게 해석하는 대신 목재와 금속, 산업적 구조를 활용해 신체와 재료의 관계를 강조했다. 샌들이라는 제품의 물리적 특성과 사용 경험을 공간 차원으로 확장한 셈이다. 매장 내부는 판매 공간이라기보다 워크숍 혹은 실험실처럼 느껴진다. 이는 버켄스탁의 인체공학적 철학과도 연결된다.

이솝(Aesop)

Le Mara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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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 지구 이솝 매장 © ciguë

이솝은 전 세계적으로 매장마다 서로 다른 건축 스타일을 사용하는 브랜드로 유명한데, 시게는 파리라는 도시 특유의 맥락 속에서 브랜드의 조용한 감성을 물질적으로 풀어낸다. 공간은 지나치게 장식적이지 않으며, 빛과 표면, 질감이 매우 섬세하게 조율된다. 특히 반복되는 모듈과 재료의 리듬감은 시게 특유의 건축적 접근 방식이다. 브랜드의 정체성을 로고나 컬러가 아니라 공간의 분위기 자체로 전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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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레 지구 이솝 매장 © ciguë

카페 키츠네(Café Kitsuné)

Louv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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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키츠네 © cigu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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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키츠네 © ciguë

카페 키츠네에서는 경쾌한 면모가 드러난다. 패션, 음악, 카페 문화가 결합된 메종 키츠네의 세계관은 지나치게 스타일링된 라이프스타일 공간으로 풀어낼 수 있었겠지만, 시게는 이를 보다 건축적인 균형 안에서 정리했다. 목재 가구와 간결한 구조, 절제된 컬러 사용은 브랜드 특유의 파리지앵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공간을 지나치게 커머셜한 이미지로 만들지 않았다. 그 결과 유행하는 카페가 아닌 일상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장소처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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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키츠네 © ciguë

세드릭 그롤레(La Pâtisserie du Meurice par Cédric Grol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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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뮤리스 세드릭 그롤레 © ciguë

이곳에선 디테일이 더욱 극적으로 드러난다. 화려한 디저트로 유명한 파티시에 세드릭 그롤레의 공간은 의외로 차분하다. 디저트 자체가 시각적 중심이 되도록 배경을 절제한 것. 석재와 금속, 조명, 진열 구조는 매우 정교하게 설계되어 있지만 전혀 과시적이지 않고 제품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환경을 만든다.

이렇게 시게가 만드는 공간의 핵심은 형태보다 분위기다. 많은 브랜드 공간이 즉각적인 시각 효과와 SNS 이미지를 향해 달려가는 시대에, 시게의 작업은 오히려 느린 감각과 지속성을 이야기한다. 쉽게 소비되지는 않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어지고, 사용될수록 더 자연스러워진다는 그 점이 지금 시게가 가장 주목받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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