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 공예의 새로운 선언, 크라프트 데이즈

크라프트 데이즈의 첫 번째 에디션은 폴란드가 전통 공예를 매개로 국제 문화 지형에서 새로운 위상을 모색하는 출발점이자 동유럽 공예를 위한 새로운 플랫폼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다.

폴란드 공예의 새로운 선언, 크라프트 데이즈

지난 5월 바르샤바 중심부에 위치한 역사적 건축물 가브론스키흐 빌라(Willa Gawronskich)에서 새로운 공예 플랫폼 ‘크라프트 데이즈(Craft Days)’가 출범했다. 1920년대 가브론스키흐 가문을 위해 폴란드 건축가 마르친 베인펠트(Marcin Weinfeld)가 설계한 이곳은 1930년대에 외교 공관으로,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 대사관으로 쓰이기도 했다. 이 유서 깊은 공간은 동시대 폴란드 공예와 디자인을 재해석하는 장으로 다시 태어났다. 5월 20일부터 24일까지 열린 크라프트 데이즈는 오늘날 폴란드가 공예로 문화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국제적 영향력을 확장하려는 시도를 보여 준 자리였다. 행사를 주최한 비스테리아 재단(Visteria Foundation)은 폴란드 디자인과 공예의 역사적 맥락을 연구하고 이를 국제적으로 알리는 것을 목표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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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리나 메르스카(Karolina Merska)의 샹들리에 ‘Weaves’와 아그니에슈카 마주르(Agnieszka Mazur)의 램프 ‘Knitting Sand_05’. 사진 Edward Wendt

직조를 중심으로 한 큐레이션

이번 행사는 2025년 12월 폴란드 전통 바구니 공예인 ‘플레치온카르스트보(plecionkarstwo)’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직후 기획한 것이라 그 의미가 각별했다. 재단은 중부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공예 중 하나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은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직조’를 주제로 전시를 기획했다. 전시장에서는 버드나무 같은 자연 섬유를 엮어 만든 전통 공예 작품부터 현대 조형 예술 작업까지 폭넓은 스펙트럼의 작업을 함께 선보였다. 큐레이션을 맡은 비스테리아 재단은 바구니 공예를 단순한 전통 기술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독자적인 시각 언어로 보고 공예와 예술, 디자인 사이의 경계를 의도적으로 허무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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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프트 데이즈(Craft Days) 전시장 풍경. 1960년대에 제작한 거장 브와디스와프 보우코프스키(Władysław Wołkowski)의 가구 시리즈 ‘Untitled’와 젊은 공예가 알라 사바셰비치(Ala Savashevich)의 대형 설치물 ‘Braids’를 함께 배치했다. 사진 Edward Wendt

전시의 중심에는 폴란드를 대표하는 두 거장이 자리했다. 그중 브와디스와프 보우코프스키(Władysław Wołkowski)는 바구니 공예를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린 인물이다. 그가 생전에 선보인 갈대와 버드나무 가구는 기능적 오브제를 넘어 조각 작품에 가깝다. 또 한 사람은 폴란드 컨템퍼러리 디자인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파베우 그루네르트(Paweł Grunert)다. 그는 구조와 재료에 대한 실험을 통해 공예와 산업 디자인 간의 경계를 확장해 왔다. 행사 기간에는 두 작가의 작업 세계를 조명하는 강연 프로그램이 열려 폴란드 디자인이 민족의 전통을 넘어 현대적 조형 언어로 발전해 온 과정을 엿볼 수 있었다.

박람회에서는 폴란드 작가뿐 아니라 해외 작가들의 작업도 폭넓게 소개했다. 세계적인 섬유 예술가 셰일라 힉스(Sheila Hicks)의 대형 설치 작업과 마그달레나 아바카노비치(Magdalena Abakanowicz)의 희귀 작품 ‘시살 핸드(Sisal Hand)’는 공예를 현대미술의 일부로 확장해 인식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폴란드,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등 중동부 유럽 출신 작가와 디자이너들이 참여해 크라프트 데이즈가 국가 단위의 행사를 넘어 동유럽 전반의 창작자를 연결하는 플랫폼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시사했다.

전시의 핵심 개념인 ‘직조’를 공간 전반에 녹여낸 전시 디자인도 인상적이었다. 디자인을 맡은 안나 슈체스니(Anna Szczesny)와 바르토시 브릴레프스키(Bartosz Brylewski)는 빌라 곳곳에 버드나무와 다양한 재료로 직조한 대형 구조물을 설치해 작품을 느슨하게 연결하며 하나의 연속적인 풍경을 만들어냈다. 가구, 오브제, 텍스타일, 조각, 설치 작업이 각자 독립성을 유지하면서도 하나의 흐름처럼 이어지도록 설계해 관람객은 동선을 따라 이동하며 직조 행위가 재료와 형태를 넘어 시간과 기억을 연결하는 매개가 될 수 있음을 경험했다. 특히 역사적 작품과 동시대 작업이 같은 층위에서 공존하도록 구성한 연출은 공예를 현재 진행형의 언어로 다루고자 한 크라프트 데이즈의 철학을 명확히 보여 주었다.

공예를 통한 문화 재편

크라프트 데이즈가 주목받는 이유는 최근 공예와 디자인이 폴란드의 국가적 문화 전략과 맞물려 있기 때문이다. 지난 수년간 폴란드는 디자인과 공예를 국가 브랜드의 핵심 요소로 육성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비스테리아 재단이 2025년과 2026년 밀라노 디자인 위크에서 전통 공예와 현대 디자인을 결합한 대형 전시를 선보인 것이 중요한 분기점이 됐다. 과거 산업 생산이나 현대건축에 집중됐던 국가 이미지에서 벗어나 장인 기술과 디자인 언어로 국가 정체성을 재구성하는 방식에 주목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으로 참고한 모델 중 하나가 바로 한국이다. 한국공예·디자인문화진흥원을 중심으로 공예, 디자인, 국제 교류를 유기적으로 결합하는 시스템이 성공적인 사례로 평가받으며 폴란드 공예 관계자들도 적극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양국 기관 간 협력 확대라는 실질적 교류로 이어지고 있다. 크라프트 데이즈의 첫 번째 에디션은 폴란드가 전통 공예를 매개로 국제 문화 지형에서 새로운 위상을 모색하는 출발점이자 동유럽 공예를 위한 새로운 플랫폼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과거의 기술을 미래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예술가들의 실천과 이를 뒷받침하는 비스테리아 재단의 지속적인 지원이 있다.


Interview

카시아 요르단(Kasia Jordan)
비스테리아 재단 설립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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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을 향한 투쟁’이야말로 폴란드 창의성의 중요한 특징이 아닐까.”

재단을 설립한 계기가 궁금하다.

〈보그 리빙 폴란드〉 첫 호를 제작하면서 출판을 넘어서는 더 큰 플랫폼의 필요성을 느꼈다. 폴란드 국내에 아직 존재하지 않는 디자인과 공예의 허브를 만들고자 한 것이다. 폴란드에는 오래전부터 훌륭한 예술가와 장인들이 있었지만, 디자인과 공예 문화는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했다. 전 세계적으로 디자인이 다시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부상하고 있는 지금, 우리는 디자인이 국가의 정체성과 가치를 드러내는 핵심적인 ‘소프트 파워’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폴란드 공예와 디자인에 대한 관심이 다시 높아지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내가 어린 시절에는 폴란드에 산업디자인연구소와 ‘체펠리아(Cepelia)’라는 조직이 있었다. 체펠리아는 공산주의 시기에 장인들을 지원하고 전통 공예를 보호하는 역할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이후 자본주의 체제가 도입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젊은 세대는 미국과 서유럽 문화를 동경했고, 지역적이고 전통적인 것은 더 이상 매력적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당시 우리는 스스로를 서유럽에 비해 열등하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흐름이 바뀌었다. 공산주의 시절을 직접 경험하지 않은 젊은 세대는 과거의 콤플렉스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우리의 문화유산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폴란드의 역사와 공예, 예술적 전통이 다시금 중요한 문화적 자산으로 재조명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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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브론스키흐 빌라 입구를 장식한 버드나무 설치물. 사진 Tomo Yarmush
현재의 폴란드 디자인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사실 아직은 명확하게 정의하기 어렵다. 1950~1960년대 폴란드 디자인은 이미 역사적으로 충분히 연구하고 정리했지만, 동시대 디자인은 여전히 과정 속에 있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젊은 디자이너들은 해외에서 공부하고 여행하며 국제적인 영향을 받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세계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이들은 더 이상 단일한 의미에서 ‘폴란드적’이라고 규정하기 어려운 존재가 됐다. 다만 공예 기술과 제작 방식에는 지금도 지역적 유산이 남아 있다. 세대를 거쳐 축적된 기술과 기억이 여전히 작업의 기반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몇 년간 더 많은 연구와 논의가 축적된다면, 그때 비로소 오늘날의 폴란드 디자인을 보다 명확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폴란드 창의성을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를 꼽는다면?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 ‘기업가 정신’이다. 폴란드 예술가들은 아름다운 작품을 만드는 것뿐 아니라, 예술가로 살아남는 방법도 알고 있다. 작품을 만들면서 동시에 지속 가능한 구조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한다. 이는 폴란드 역사와 관련이 있다. 우리는 늘 어려운 지정학적 환경에서 살아왔고, 무언가를 위해 끊임없이 싸워야 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움을 향한 투쟁’이야말로 폴란드 창의성의 중요한 특징이 아닐까. 그 정신은 지금도 우리의 DNA에 남아 있다.

슬라브 지역 전체로 확장하려는 야심을 내비치기도 했다.

그렇다. 우리는 폴란드를 넘어 슬라브 문화권 전체를 연결하는 플랫폼을 구축하고자 한다. 폴란드뿐 아니라 체코,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헝가리 등 다양한 국가의 창작자와 협업하는 것이 목표다. 또한 ‘슬라브 예술(Slavic arts)’이라는 개념이 무엇인지 탐구할 예정이며, 향후에는 이 지역 전체를 아우르는 오픈 콜(Call for Artists)도 계획하고 있다.

폴란드가 이탈리아처럼 강력한 디자인 산업을 구축할 수 있다고 보는가?

물론이다. 이탈리아가 오늘날 디자인 강국으로 자리 잡은 이유는 단순히 더 오래된 역사 때문이 아니다. 사실 산업디자인의 발전 시기만 놓고 보면 폴란드와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이탈리아는 기업과 산업이 성장할 수 있는 환경을 더 오랫동안 유지했다. 지금 폴란드는 경제적으로도 매우 안정적이고, 국제적 위상도 높아지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이 폴란드 디자인이 본격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중요한 시기라고 본다.

한국을 롤 모델로 삼고 있다고 했는데, 한국 공예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점은 무엇인가?

한국은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을 디자인과 공예를 통해 매우 성공적으로 구축했다. 한국이 보여 준 소프트 파워의 영향력은 이제 공예와 디자인을 넘어 문화 전반으로 확장되고 있다. 특히 지난 호모 파베르 비엔날레에서 접한 한국 공예 작품에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또한 한국은 역사적 맥락에서 폴란드와 유사한 점이 많다. 한국 역시 강대국 사이에서 자국의 정체성을 지켜야 했고, 복합적인 역사적 경험을 거쳐왔기에 그 과정에서 형성된 문화적 자부심과 창조성이 폴란드와 닮아 있다고 느낀다.

비스테리아 재단의 궁극적 목표는 무엇인가?

과거의 정치적 상황과 ‘철의 장막’으로 인해 국제 무대에서 충분히 조명받지 못했던 예술가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다. 그들의 작품과 서사는 충분히 소개될 가치가 있었지만, 시대적 조건 때문에 그러지 못했다. 이제는 그것을 다시 드러내고 재평가할 시기가 왔다고 생각한다.

주최·주관 비스테리아 재단
전시 디자인 안나 슈체스니, 바르토시 브릴레프스키
웹사이트 visteriafoundation.pl

*이 콘텐츠는 월간 〈디자인〉 577호 (2026.07)에 발행한 기사입니다. E-매거진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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