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의 목적이 되어줄, 건축가들이 만든 숙소
제주, 하동, 강릉, 서울에서 찾은 건축가들의 숙소 5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됐다.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며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고 있다면, 이번에는 목적지를 지역이 아닌 숙소에 두고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됐다. 여름휴가 계획을 세우며 어디로 떠날지 고민하고 있다면, 이번에는 목적지를 지역이 아닌 숙소에 두고 여행을 떠나보는 건 어떨까. 익숙한 호텔이나 평범한 숙소 대신, 건축가의 손길이 닿은 특별한 공간들을 찾아가는 여행 말이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풍경과 시간에 따라 달라지는 빛, 손에서 느껴지는 공간의 소재와 분위기는 여행을 더욱 오래 기억하게 한다. 특히 지역의 풍경과 재료, 오래된 건물의 시간,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축으로 풀어낸 숙소라면 더욱 그렇다. 이런 공간은 여행자가 그 지역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꾸고, 잠시 머무는 시간을 더 깊은 경험으로 만들어준다. 그래서 준비했다. 여름휴가지로 사랑받는 제주부터 하동과 강릉, 멀리 떠나기 어려운 이들을 위한 서울까지. 각 지역에서 특별한 공간 경험을 선사하는 숙소들을 찾아보았다.
르 카바농
주소 제주 제주시 애월읍 애월해안로 10-3
건축 지랩(Z-LAB)

지랩이 설계한 제주 숙소 ‘르 카바농’은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가 남프랑스 해안에 지은 작은 휴가용 오두막 ‘르 카바농’에서 이름을 빌려왔다. 제주 전통 돌집을 현대적으로 재해석한 이곳은 익숙한 돌담의 형태를 재현하는 대신, 오래된 벽체에서 발견한 재료의 흔적과 구축 방식을 새로운 건축 언어로 옮겼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외벽이다. 건물 안팎에서 구조체의 질감을 그대로 느낄 수 있도록 설계했고, 노출 콘크리트에는 잘게 부순 제주 소라 껍데기를 섞었다. 콘크리트의 붉은빛은 제주 돌집을 고치며 마주한 흙의 색에서 가져왔다. 이후 표면을 하나하나 다듬는 작업을 거쳐, 콘크리트 안에 섞인 골재와 소라 껍데기 조각이 자연스럽게 드러나도록 했다. 매끈하게 마감해 제주다운 분위기를 흉내 내는 대신, 재료 자체에 제주가 가진 시간과 질감을 담아낸 방식이다.



건물은 두 개의 긴 매스가 서로 마주 보는 ‘11자’ 형태로 배치됐다. 두 동 사이에는 시선과 거리를 조절하는 틈이 만들어지고, 이 틈을 중심으로 각 공간은 연결과 분리를 반복한다. 글을 쓰거나 책을 읽는 개인적인 시간부터 음악과 영화 감상, 수영과 스파처럼 함께 즐기는 활동까지 다양한 경험을 담았다. 공간은 서로의 존재를 느낄 수 있도록 연결되면서도, 필요에 따라 혼자만의 휴식을 누릴 수 있도록 분리된다.



이름을 빌려온 르 코르뷔지에의 작은 휴가용 오두막처럼, 실내는 크기나 장식보다 머무는 시간에 조금 더 초점을 맞췄다. 주변 주거의 높이와 규모를 고려해 마을과 밭 사이에 조용히 자리한 건물은 제주의 풍경에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전통을 그대로 재현하기보다 지역 고유의 재료와 건축 방식을 세련되게 풀어내며, 머무는 이에게 제주를 조금 더 깊이 경험하게 한다.
벽·선·들
주소 경남 하동군 화개면 화개로 633 벽선들
건축 온건축사사무소

지리산 쌍계사 계곡 인근의 경사진 차밭에 자리한 ‘벽·선·들’은 지리산의 경사와 차밭의 석축, 계곡의 풍경을 공간 곳곳에 이어 붙인 스테이다. 2025년 경상남도 건축상 최우수상을 받은 이곳은 수익성이 낮아 방치됐던 차밭을 숙소로 바꾸고, 고향으로 돌아온 자녀 세대가 직접 운영하며 지역에 새로운 활기를 더하고 있다. 건축 설계는 온건축사사무소가 맡았다.

설계의 출발점은 지리산과 쌍계사 계곡, 그리고 경사지를 따라 여러 겹으로 이어지는 계단식 차밭의 풍경이다. 건물은 지상으로 높이 솟기보다 지하층과 지상 1층으로 낮게 구성하고, 일부를 땅속에 묻어 경사지에 내려앉은 듯한 모습을 만들었다. 차밭의 돌담과 경사진 지형을 따라 배치해, 건물이 주변 풍경 속에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도록 했다.



이름의 ‘벽·선·들’은 차밭의 풍경을 건축으로 풀어낸 세 가지 설계 요소다. ‘벽’은 차밭의 수직적인 석축을 10개의 벽으로 옮긴 것이다. 벽은 실내와 외부 공간을 가르고, 때로는 겹쳐지며 다양한 공간감을 만든다. ‘선’은 벽 사이로 길게 이어지는 선형 공간을 뜻한다. 다실, 휴게 공간, 다이닝, 주방, 침실, 수영장 등 다양한 프로그램이 이 선을 따라 놓였으며, 각각의 공간은 경사지를 따라 조금씩 다른 높이와 시선을 가진다. 머무는 이들은 이를 따라 지리산의 풍경을 여러 방향에서 마주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들’은 벽과 선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외부 공간이다. 관조를 위한 정원부터 기존 차밭의 석축과 이어지는 마당, 산의 풍경과 맞닿은 수영장, 하늘과 대나무 숲을 담아내는 작은 뜰까지. 실내와 비슷한 비중으로 구성된 외부 공간은 자연 속에서 머무는 경험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방이 되어준다.

세틀러
주소 강원특별자치도 강릉시 주문진읍 신영길 18-2
건축 폼아키텍츠

‘세틀러’는 강릉 소돌해변 인근의 작은 마을에 자리한 스테이다. ‘정착하는 사람’이라는 이름처럼, 여행자가 강릉의 생활과 창작 문화를 가까이 경험하도록 만든 공간이다. 강원건축문화상 최우수상을 받은 이곳은 주변 풍경을 건축적으로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지역의 사람과 브랜드를 숙소 경험 안으로 연결하는 데 집중했다.


외관은 흰색 소형 타일로 마감한 두 개의 단정한 매스로 구성된다. 창을 최소화한 입면에는 유리블록 창을 더했고, 하부에는 붉은 줄눈의 타일을 적용해 다른 밀도의 표정을 만들었다. 1층은 기둥을 세운 필로티 구조로 비워 주차 공간을 확보했으며, 스테인리스 패널과 기둥, 외부 계단이 함께 놓인다. 두 동 사이에는 계단과 연결 통로를 두어 각 층의 객실로 이어지는 동선을 구성했다.

객실에는 강릉의 로컬 브랜드들과 함께한 다양한 물건들이 놓여 있다. 지구리워크가 제작한 티 코스터와 습기 가림막, 즈므로스터리의 드립백처럼 머무는 동안 자연스럽게 손이 가는 물건들이다. 세틀러는 이처럼 지역의 로스터리와 공방, 디자이너, 브랜드와 협업해 공간을 채우고, 온·오프라인 가이드를 통해 주변의 장소와 창작자까지 소개한다.


공간은 집처럼 편안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미닫이문으로 객실을 분리하거나 연결할 수 있어 인원과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활용할 수 있으며, 스킵 플로어 구조는 공간의 높이를 달리하며 입체적인 구성을 만든다. 그리고 모든 객실에는 편백나무 히노끼탕과 포켓 테라스가 마련돼 있다. 혼자 또는 둘이 머물기 좋은 ‘step.1(minimal)’, 저상형 침대와 넉넉한 히노끼탕을 갖춘 ‘step.2(home)’ 등 인원과 여행 방식에 따라 객실을 선택할 수 있다. 1층 라운지와 작은 정원은 커피나 차 한 잔을 곁에 두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공용 공간이다.

담백한 외관과 달리 세틀러 안에는 강릉의 다양한 매력이 촘촘히 담겨 있다. 지역 브랜드의 물건부터 주변의 장소와 창작자를 소개하는 가이드까지, 숙소는 강릉의 생활과 문화를 머무는 동안 충분히 경험하게 한다.

선너머섬
주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판포중길 33-89
건축 건축사사무소 코이오크, GEGH PRESS ROOM

제주 한경면 판포리의 경작지 사이에 자리한 ‘선너머섬’은 일상과 여행 사이의 경계를 건축으로 풀어낸 스테이다. 이름의 ‘선’은 일상과 여행 사이의 경계를, ‘섬’은 잠시 다른 시간 속에 머무는 경험을 뜻한다. 도로에서 안쪽으로 들어간 대지는 주변 마을과 떨어져 있어, 조용하고 독립적인 분위기를 만든다. 건축은 이런 장소의 특징을 숨기기보다 높은 담장과 정원을 통해 외부의 시선을 조절하고, 여행자가 일상에서 잠시 벗어난 듯한 감각을 느끼도록 했다.

처음 마주하는 것은 높게 둘러친 담장과 그 안의 정원이다. 담장은 외부의 시선을 막아 정원을 단순한 조경 공간이 아니라 하나의 독립된 방처럼 만든다. 긴 이동 끝에 도착한 여행자는 이곳에서 바깥의 번잡함을 잠시 내려놓고, 담장 안에 마련된 고요한 마당을 지나 집 안으로 들어선다. 중정에 심은 녹나무는 계절과 바람의 변화를 담아내며, 닫힌 담장 안의 풍경에 생기를 더한다.



닫힌 외부와 달리 내부는 메인 홀을 중심으로 여러 방향으로 시선이 뻗어나가는 구성이다. 높은 천장의 메인 홀에는 주방과 입식 거실, 좌식 공간이 하나로 이어져 함께 머무는 이들의 시선과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진다. 중앙의 사각 천창으로 들어오는 빛은 시간에 따라 공간의 표정을 바꾸고, 바닥 높이와 천장 높이, 창의 형태를 달리한 각 공간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제주 풍경을 담아낸다. 테라스와 이어지는 입식 거실은 바깥으로 시선을 열고, 바닥을 낮춘 주방에서는 한라산 능선과 오름의 실루엣을 바라볼 수 있다. 반대로 바닥을 높인 좌식 거실은 보다 가까운 풍경을 마주하며 조용히 머무는 공간으로 구성했다.


외부는 노출 콘크리트와 콘크리트 치핑으로 마감했고, 내부는 미장 벽과 콘크리트 폴리싱 바닥, 합판 천장을 중심으로 절제된 분위기를 만들었다. 흔한 펜던트 조명처럼 시선을 끄는 요소를 최소화해, 창밖 풍경과 빛의 변화가 공간의 중심이 되도록 했다. 두 개의 침실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가구를 배치했으며, 공용 공간과 마찬가지로 단순한 재료 조합 안에서 편안한 휴식의 분위기를 이어간다.
아르뎁 서울
주소 서울 중구 퇴계로56가길 7
건축 스테이 아키텍츠

멀리 떠나지 못한다면 서울에서 작은 여행을 즐겨보자. 서울 장충동의 골목에 자리한 ‘아르뎁 서울’은 약 60년간 운영된 ‘신도여관’을 리노베이션한 숙소다. 도시를 여행하는 사람들을 위해 호텔의 기능성과 게스트하우스의 편안함 사이를 고민한 공간으로, 2025년 완공 후 굿디자인 코리아 디자인 셀렉션에 선정됐다.

프로젝트의 출발점은 오래된 여관이 가진 좁고 불규칙한 구조였다. 기존 건물은 리셉션 뒤로 작은 객실이 미로처럼 이어졌고, 침대 하나를 들이기에도 빠듯한 방과 작은 욕실이 1층부터 3층까지 빽빽하게 배치돼 있었다. 스테이 아키텍츠는 오랜 시간 덧붙은 마감재를 걷어내며 건물의 본래 구조를 확인했고, 각기 다른 각도로 꺾인 벽과 제각각인 치수를 그대로 받아들이며 새로운 평면을 계획했다.

객실 수는 기존의 절반 수준인 8실로 줄였다. 대신 모든 객실이 채광과 환기를 확보할 수 있도록 배치하고, 좁은 면적 안에서도 두 사람이 편안히 머무를 수 있는 조건을 만들었다. 객실은 모두 2인실이며, 3층에는 테라스와 연결된 객실을 마련했다. 테라스를 향해 ㄷ자 형태로 돌출된 창 앞에는 테이블을 두어, 객실 안에서도 바깥의 공기와 풍경을 가까이 느낄 수 있도록 했다.





1층의 기존 리셉션과 주인방은 공용 라운지와 관리 공간으로 바뀌었다. 골목을 향한 큰 창은 라운지 안으로 바깥 풍경을 들이고, 1층과 2층 사이에 만든 작은 오프닝은 층과 층 사이의 시선을 이어준다. 3층으로 오르는 계단 앞에는 공용 테라스를 두어 투숙객이 개별적으로 쉬거나 작은 프로그램을 열 수 있도록 했고, 반대편에는 두 객실을 위한 전용 테라스를 마련해 조금 더 사적인 시간을 보낼 수 있게 했다.

외관은 기존 건물의 규모와 골목의 분위기를 해치지 않도록 차분하게 정리했다. 내부는 도장 마감과 무늬목, 원목마루, LVT 등 서로 다른 재료를 사용해 오래된 여관의 소탈한 분위기와 오늘의 숙소가 갖춰야 할 편안함을 함께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