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리의 순간을 새긴 오브제, e스포츠 트로피 디자인
'리그 오브 레전드'부터 '배틀그라운드'까지
e스포츠 트로피는 선수의 노력과 팬의 열망이 응축된 상징물로, 전통 스포츠 못지않은 독창성과 권위를 정립해 가고 있다. 특히 롤드컵의 소환사의 컵, 발로란트 챔피언스 컵, 배틀그라운드의 PNC 및 PGC 우승컵 등은 시대와 리그의 역사에 맞춰 진화하는 e스포츠 트로피 디자인의 세계를 보여준다.

스포츠에서 트로피는 단순한 금속 오브제가 아니다. 수천 시간의 피와 땀, 좌절을 딛고 일어선 선수들의 위대한 여정이 마침내 도달하는 종착지이자, 팬들의 열망이 응축된 궁극의 상징물이다. 전통 스포츠의 오랜 역사만큼이나, 출범 수십 년 만에 글로벌 주류 문화로 자리 잡은 e스포츠 역시 독창적이고 권위 있는 트로피 문화를 정립해 가고 있다. 그중에서도 ‘리그 오브 레전드 월드 챔피언십(이하 롤드컵)’의 ‘소환사의 컵(Summoner’s Cup)’과 장르적 개성을 극대화한 ‘발로란트 챔피언스 컵’ 그리고 배틀그라운드의 ‘펍지 네이션스 컵(PNC)’ 및 ‘펍지 글로벌 챔피언십(PGC)’ 우승컵은 시대와 리그의 역사에 맞춰 진화하는 트로피 디자인의 세계를 보여준다.
과거와 미래를 잇다, 롤드컵 소환사의 컵
매년 가을 전 세계를 열광시키는 리그 오브 레전드(LoL)의 정점, 롤드컵. 그 우승 트로피인 ‘소환사의 컵’은 지난해 3세대 디자인으로 거듭나며 큰 화제를 모았다. 3세대 소환사의 컵 디자인과 제작을 맡은 곳은 프롭 및 레플리카 전문 제작사로 명성을 떨쳐온 ‘볼핀 프롭스(Volpin Props)’다.
볼핀 프롭스가 디자인한 3세대 소환사의 컵은 ‘과거의 영광과 미래의 혁신을 연결한다’는 철학을 중심에 뒀다. 외형적으로는 초기 1세대 소환사의 컵이 가졌던 중후하고 판타지적인 매력을 계승하면서도, 정밀한 3D 모델링 및 프린팅 가공 기술과 미래지향적인 커팅 기술을 적용해 현대적 감각을 극대화했다. 특히 소환사 형상의 정교한 디테일을 구현하기 위해 파트별 고해상도 3D 레진 출력 기법을 도입했으며, 빛나는 금속 표면을 위해 수차례의 연마 과정과 전도 공정을 거쳤다. 여기에 은빛 바디와 대비되는 골드 크롬 및 전기 도금 포인트를 더하고, 정밀하게 캐스팅된 반투명 블루 레진 보석들을 입체적으로 배치하여 디자인 완성도를 높였다.
한편 3세대 디자인에서 돋보이는 물리적 변화는 바로 ‘무게 감량’이다. 과거 1세대 소환사의 컵은 최초 무게가 32kg에 육박했다. 압도적인 무게 탓에 우승팀 선수들이 트로피를 한 손으로 들어 올리기는커녕 여러 명이 함께 겨우 들어 올리는 해프닝이 발생하곤 했다. 볼핀 프롭스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부에 카본 파이버 등 경량 신소재를 도입하고 인체공학적 구조를 적용했다. 트로피 본연의 볼륨감은 그대로 유지하되 무게만 획기적으로 줄였다.

이러한 혁신 이전에도 소환사의 컵은 글로벌 브랜드와의 협업을 통해 그 가치를 더해왔다. 라이엇 게임즈는 하이엔드 주얼리 브랜드 티파니앤코(Tiffany & Co.)와 손잡고 2세대 소환사의 컵을 제작한 바 있다. 당시 티파니앤코는 로드아일랜드에 위치한 자사 공방에서 스털링 실버, 스테인리스 스틸, 황동을 사용해 4개월간의 수작업 끝에 27인치(약 68.5cm) 높이의 실버 트로피를 완성했다.

자동차 브랜드와의 협업도 진행되었다. 메르세데스-벤츠(Mercedes-Benz)는 2025년 월드 챔피언십 개최를 기념하고 15년의 역사를 기리기 위해 ‘리그 오브 레전드 메르세데스-벤츠 CLA 아트 피스’를 공개했다. 디자이너 및 크리에이터들과 파트너십을 통해 개발한 ‘클래스 오브 크리에이터스’ 시리즈의 일환이다. 이 차량은 3세대 소환사의 컵 디자인에서 영감을 받아 실버 크롬 마감과 블루 사파이어, 골드 악센트를 차량 외관에 반영했다.


트로피를 운반하고 기념하는 방식에도 이러한 협업이 적용되었다. 메르세데스-벤츠는 대회 당시 우승 트로피의 안전한 운송을 위해 특별 제작한 공식 트로피 캐리어 차량을 함께 지원했다. 순수 전기 G클래스 차량의 내부를 소환사의 컵 전용 모듈로 재설계하여, 단순한 이동 수단을 넘어 ‘트로피를 위한 이동형 성소’라는 테마로 연출했다.

게임 속 세계관을 현실로 소환하다, 발로란트 챔피언스 트로피
볼핀 프롭스의 해석력이 반영된 또 하나의 작업은 라이엇 게임즈의 전술 슈팅 게임 발로란트(VALORANT)의 세계 최고 권위 대회인 ‘발로란트 챔피언스(Valorant Champions)’ 우승 트로피다.

발로란트 챔피언스 트로피는 게임의 세계관과 배경 설정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했다. 발로란트의 핵심 스토리라인은 두 개의 평행 우주인 ‘알파 지구’와 ‘오메가 지구’가 가상의 자원인 ‘레디아나이트(Radianite)’를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는 내용이다. 볼핀 프롭스는 이 서사를 약 60cm 높이의 트로피에 압축해 냈다. 트로피의 상하단은 두 개의 원뿔 모양이 마주 보고 서 있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이 두 원뿔이 만나는 정중앙에는 세계관의 핵심 오브제인 ‘레디아나이트 큐브’가 배치되어 있다.

큐브의 투명도와 굴절률을 표현하기 위해 우레탄 수지를 연마했다는 점도 눈여겨볼 부분이다. 외관은 24K 금도금과 로듐 플레이팅 기법이 적용되었으며, 표면은 블랙 토르말린(전기석)의 질감을 살려 마감했다. 금빛 균열이 가 있는 원뿔 표면은 레디아나이트 에너지가 폭발하는 순간을 형상화한 결과물이다.
트로피 디자인은 인게임 요소로도 확장된다. 라이엇 게임즈는 매년 챔피언스 대회를 기념해 출시하는 한정판 인게임 아이템 ‘챔피언스 컬렉션’에 실제 트로피 디자인을 이식하고 있다. 경기 중 최다 킬을 기록한 플레이어에게 황금빛 아우라가 나타나거나, 무기를 점검할 때 트로피 모형이 홀로그램 형태로 구현되는 등의 연출을 선보였다. 무대 위 트로피 디자인이 유저들의 플레이 속에서 시각적 매개체로 기능하는 셈이다.
전장의 영광을 형상화하다, 배틀그라운드 PNC & PGC 트로피
롤드컵이 클럽 대항전의 정점이라면, 크래프톤의 대표 e스포츠 ‘PUBG: 배틀그라운드’의 ‘펍지 네이션스 컵(PUBG Nations Cup, 이하 PNC)’은 전 세계 국가대표들이 모여 최강의 국가를 가리는 올림픽과 같은 무대다. 지난 6월 23일부터 28일까지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전 세계 팬들의 뜨거운 열기 속에 치러진 PNC 2026는 브라질이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리며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대회에서 또 하나 주목받은 것은 배틀그라운드만의 거칠고 날것의 매력을 고스란히 담아낸 PNC 트로피 디자인이다. PNC 우승 트로피는 배틀그라운드 IP가 가진 핵심 가치인 ‘생존’을 강조하는데 초점을 맞췄다. 일반적인 스포츠 트로피가 매끄럽고 정형화된 곡선을 강조하는 것과 달리, PNC 우승컵은 배틀그라운드 특유의 거칠고 단단한 금속 질감을 살렸다. 전장 유물이 연상되는 무기 및 방어구의 텍스처, 인게임 오브제에서 영감을 얻은 날카로운 직선과 기하학적 배치가 돋보인다.
롤에서 ‘롤드컵(World Championship)’이 있다면, 배틀그라운드에는 PGC(펍지 글로벌 챔피언십)가 있다. PGC 우승 트로피는 펍지 이스포츠 역사상 가장 크고 무거우며, 구조적으로도 가장 복잡하다. 성인 상체만 한 크기로 제작되어, 우승의 순간 모든 팀원이 함께 들어 올릴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이 특징이다. 디자인은 대회 본연의 여정을 시각화하는 데 집중했다. 전 세계 32개 참가 팀이 본선을 거쳐 최종 16개 팀으로 좁혀지는 토너먼트 구조를 형상화한 것이다. 하단에서 시작된 16개의 기둥이 위로 뻗어 올라가 상단의 32개 구조로 결합하는 입체적인 기하학 구조가 이를 증명한다.
제작 과정에서는 50여 가지의 스케치와 3D 시뮬레이션을 통해 구조적 안정성을 확보했다. 초기 모델링 단계에서는 날카로운 모서리가 돋보였으나, 우승 팀이 안전하게 트로피를 거머쥘 수 있도록 모든 모서리를 뭉툭하게 다듬는 마감 공정을 거쳤다. 유행을 타지 않는 디자인으로 이스포츠의 자부심을 담아낸 PGC 트로피는 챔피언이 거머쥘 최고 무대의 권위와 영광을 증명한다. 한편 PGC 2026은 오는 12월 1일(화)부터 13일(일)까지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열릴 예정이다.